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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기승을 부리던 한파도 3월에 접어들고 경칩이 지나자 봄눈 녹듯이 녹아 한결 따사롭다. 남녘의 양지쪽에서는 복수초가 뽀얀 얼굴을 내밀며 봄을 재촉하고 얼었던 산야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한국전망대 옆에 조국을 향해 서있는 추모비는 이국에서 조난당한 역사관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 조선국역관사순난비 한국전망대 옆에 조국을 향해 서있는 추모비는 이국에서 조난당한 역사관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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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9일에는 주말을 틈타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쓰시마(對馬島)를 여행했다. 오전에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니 어머니 손길 같은 봄볕 아래 잔잔한 바다가 평화롭기 그지없다. 터미널은 국제적 터미널답지 않게 한가하고 조용했다. 출항시간이 가까워지자 예약된 승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어 출항하는 일본선적 비틀(BEETLE)호에는 200여명의 승객이 만선하여 항구를 빠져나간다. 딱정벌레라는 어원에 어울리지 않게 우람한 여객선이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바닷물결을 가르며 달린다.

쓰시마는 부산에서 약 50㎞ 밖에 되지 않으며, 소요시간은 1시간 10분이란다. 여수에서 거문도까지가 114.7㎞이고, 포항에서 울릉도까지 3시간이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가까운 섬이다. 섬 전체면적이 695.9㎢이니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진도(珍島)의 2배 정도 되는 크기인데도 상주 인구는 진도보다 더 적은 3만 여명에 불과하단다.

잠깐 사색에 잠긴 사이 배는 히타카츠항에 도착했다. 쓰시마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인데도 고기잡이배가 몇 척 정박해 있을 뿐 항구는 한적하다. 배에서 내린 여행객들은 그룹을 지어 버스를 타고 투어를 시작하거나 자전거여행 또는 낚시를 즐기기 위해 제각기 발길을 옮긴다. 20여명 되는 우리 팀에는 부부, 가족, 친구 등 다양한 형태의 여행객들이 한 그룹이 되어 버스를 타고 함께 움직였다.

섬들이 어깨를 붙이고 옹기종기 앉아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아소만 섬들이 어깨를 붙이고 옹기종기 앉아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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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른 곳은 히타카츠항 인근의 미우다 해수욕장이다. 손바닥만한 작은 해수욕장이 깨끗한 백사장과 투명한 물을 품고 있다. 톳, 모자반, 파래, 미역 등 우리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조류들이 지천이다. 스티로폼, 플라스틱, 나무조각 등 우리나라 해변에 널려 있는 쓰레기가 없는 것이 신기하다. 여름이면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는데 지금은 비수기라 한 가족만이 찾아와 두 아이와 모래톱에서 소꿉놀이를 즐기고 있다.

쓰시마 최북단 와니우라의 해안단구 높은 지형에 위치한 한국전망대는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 있는 정자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부산까지는 49.5㎞라고 하지만 부산을 조망할 수 있는 날은 1년에 20여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전망대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전망대 바로 옆에는 1703년 한국의 역관사(통역관) 등 108명을 태운 배 3척이 쓰시마 인근에서 풍랑에 좌초되어 목숨을 잃은 영혼을 기리기 위해 조선국역관사순난비가 세워져 있다. 이국의 바다에서 해난사고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조상들을 생각하며 추모비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여 묵념했다.

수선사 경내에 세워진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최익현선생 순국비 수선사 경내에 세워진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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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여정은 에보시다케 전망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도로가 대부분 비탈진 산길로 이어지는 1차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계곡이 험준하다. 버스는 교행하는 차를 피해 매번 멈춰섰다가 느리게 그리고 안전하게 움직인다. 도로변의 숲은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편백과 삼나무,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기분마저 상쾌하게 한다.

에보시다케 전망대는 쓰시마 중간지점 아소만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고도 200~300m 내외의 산지가 89%를 차지하는 쓰시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발아래 그림같이 펼쳐진 110여개의 섬들이 우리나라 다도해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겹다. 농경지가 총면적의 4%에 불과해 늘 굶주려야 했음에도, 우리 같으면 이미 간척사업으로 농경지를 만들었을 여건이 좋은 리아스식 해안이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아소만의 진주조개 양식장 부표들이 바둑판처럼 정갈하다. 전망대 주변에는 벌써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아소만을 경계로 상대마도와 하대마도 두 섬 사이에 인공적으로 만든 만제키 수로를 건너 이즈하라로 이동하니 바다 너머로 오렌지빛 석양이 내린다. 이즈하라는 시청 소재지답게 제법 번화한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변두리 식당에서 쓰시마 청정해역에서 잡을 횟감에 사케를 곁들어 저녁식사를 마치고 늦은 저녁에 호텔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기념비 제단에 꽃을 올려놓은 이의 마음이 갸륵하다
▲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기념비 제단에 꽃을 올려놓은 이의 마음이 갸륵하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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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이즈하라 시내 투어다. 호텔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밤새 요란하던 바람은 잦아들고 대신 봄비가 흩뿌린다. 어제와는 달리 사뭇 춥다. 골목을 거슬러 올라 시내 외곽의 수선사(修善寺)를 방문했다. 골목을 따라 작고 예쁜 집들이 잘 꾸며진 정원을 품에 안고 나란히 서있다. 뉘 집 담장 너머 홍매화 잎이 바람에 날린다.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는 아담한 일본풍의 사찰 수선사에는 납골이 많이 안치되어 있다. 납골당 옆에는 74세의 늦은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민족혼을 일깨운 조선말기의 애국지사 '大韓人 崔益鉉 先生 殉國之碑'가 세워져있다. 비석 옆에는 1986년에 한국과 일본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는 안내판이 있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금석성에 들어서니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12년 고종(高宗)의 고명딸로 태어나 13살의 어린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와 1931년 쓰시마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다케시(宗武志) 백작과 강제 결혼한 후 비운의 세월을 살다간 그녀를 생각하면 기념할 일도 아니건만, 우리나라 관광객이 늘어나자 2001년에 복원해 놓은 것이란다.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는 조선통신사비와 고려문이 있다. 이렇듯 쓰시마 곳곳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으며, 부산까지는 50㎞에 불과한 반면, 후쿠오카까지는 132㎞나 되는 쓰시마를 우리선조들은 왜 우리 영토로 관리하지 않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시내 구경을 마치고 짬이 나 이즈하라마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에 들렀다. 도로에서 공원으로 연결되는 구름다리에 올라서니 원시림의 화강암 계곡을 타고 쏟아지는 물이 수정처럼 맑고 투명하다. 세강을 이루는 물줄기 하구에는 지금도 아유모도시 이름 그대로 많은 연어가 회귀한다고 한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방갈로, 산책로, 캠프장 등이 잘 갖춰져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후박, 붉가시, 동백 등 상록활엽수들이 울울창창하다. 나무들이 내품는 청량한 공기를 듬뿍 들이켜 마시고 시간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즈하라에서 잠깐 쇼핑을 즐기고 첫날 입국했던 히타카츠항으로 이동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여독에 지친 일행들은 잠을 청한다. 간간히 스치는 마을에는 노인들이 산책을 하거나 농사준비를 한다. 이곳도 고령화가 심각해 65세 이상 노인이 3분의 1을 차지한단다.

끝없이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1시간을 넘게 달려 히타카츠항에 도착하니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행객들로 북새통이다. 어업 이외에는 별다른 소득원이 없는 쓰시마에서 관광업은 매우 중요하며 한국인 관광객들이 쓰시마 경제를 살려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후 4시에 출항하는 배에 몸을 실으니 1박2일의 짧은 여행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태그:#쓰시마, #대마도, #히타카츠, #이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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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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