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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작가의 작품
 최민식 작가의 작품
ⓒ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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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위대하다. 거기에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고 억압과 거짓의 신전을 무너뜨리는 강한 힘이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피폐한 우리의 농촌과 도시빈민, 시들어가는 어촌, 공해 등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나의 사진 작업은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쉼 없이 계속될 것이다."  - <동아일보> 칼럼 '민중의 넋 담는 렌즈의 시학'(1990.11.4) 중에서

그의 카메라 렌즈는 주인의 다짐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소외된 곳을 향했다. 12일 세상을 떠난 사진작가 최민식은 사진이 주는 진실의 힘을 신앙처럼 소중히 여겼다. 그는 향년 8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55년 동안을 사진과 함께했다. 대한민국의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라는 수식어가 붙기까지 그의 사진 앵글 밖 인생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1928년 황해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해방과 한국전쟁 참전으로 이어진 격변기 속에서 화가가 되기 위한 꿈을 이어나갔다. 그랬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 중앙미술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의 사진집 <인간 가족(THE FAMILY OF MAN)>을 접하고 본격적으로 사진의 세계에 뛰어든다.

최민식 작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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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사진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민중과 같이하는 데 있다. 우리의 삶과 진실한 이야기의 메시지를 민중들에게 전하는 사명과 필요성, 이것이 나의 사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동아일보> 칼럼 '민중의 넋 담는 렌즈의 시학'(1990.11.4) 중에서

고인의 말처럼 그의 사진 속에는 우리 사회가 주목하지 않았던 빈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2일 저녁,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부산 용호동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장남 최유도(60)씨는 생전의 아버지를 "말없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주목했고, 그런 사람들을 보며 마음 아파했던 분이었다"고 추억했다.

그의 사진 세계 속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조명을 받았고, 억울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1962년 대만 국제사진전 입선을 시작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공모전에서 입상한 그의 사진은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독재권력 만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최민식 작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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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 새마을 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주도하던 정부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죠. 독일, 프랑스 등 7개국에서 20회에 가까운 사진전시회를 열어 극찬을 받았는데, 정작 저는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참석할 수가 없었어요. 정보부에도 수차례 불려가고, 심지어는 삼청교육대도 갈 뻔하고, 간첩신고도 많이 당했어요. 50년간 100번 이상 신고를 당했으니까 말도 못하죠."- <인사이트 오브 지에스칼텍스 insight of gscaltex> 인터뷰 (2012.6.29)에서

독재권력은 그를 옥죄어왔지만 그의 사진은 거짓을 찍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민의 가난과 고통은 정부를 비롯한 사회 전체의 책임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사진으로 이를 기록에 남기는 것이 자신의 숙명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꾀죄죄한 나의 옷차림과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촬영 때문에 간첩으로 몰리는 수난을 당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 이런 꼴이 지구 어느 곳에 또 있을까"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사진 만큼 부산을 사랑했던 '자갈치 아저씨'

최민식 작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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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진만큼이나 부산을 사랑했다. 부산 남구 대연동 자택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는 자갈치 시장을 그리워했다. 그런 그를 어떤 사람들은 '자갈치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만큼 자갈치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고인은 그 이유를 "비린내 물씬나고 투박한 사투리가 뒤엉키는 그곳이 우리들 생활의 현장이요, 이웃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고인은 자갈치시장과 더불어 부산에서 후배들을 길러내는데 마지막 힘을 쏟아 부었다. 지난 학기까지 지역 대학에서 사진학과 학생들을 가르쳤고 지역 중견 사진작가들에게는 버팀목이 돼주었다. "사진은 사상이다"는 한마디에 끌려 고인의 곁을 지킨 이수길(52) 사진작가는 고인을 "부산에 있는 모든 사진작가들의 스승"이라 표현했다. 

고인은 후배 사진작가들에게 입버릇처럼 "있는 그대로를 찍어라"라고 주문했다. 화려한 기교를 부리고 컴퓨터의 사진 보정 프로그램으로 찍어내는 그럴싸한 사진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사진을 그는 최고로 쳤다.

한국의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꼽히는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씨가 향년 85세의 나이로 12일 부산 대연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빈소는 부산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한국의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꼽히는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씨가 향년 85세의 나이로 12일 부산 대연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빈소는 부산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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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길 작가는 고인을 기리며 "후배들과 본인을 위해서도 하실 일이 많았는데 이렇게 가신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비통해했다. 고인은 자신의 생에서 남은 시간을 예견이라도 한 듯 지난해 말 그동안 펴낸 14권의 작품집을 한 권으로 추린 <휴먼선집>을 펴냈다. 그 뒤로도 15번째 작품집 펴내기를 누구보다 바랐던 고인의 투혼은 이제 멈춰선 상태다.

그의 제자들은 고인의 마지막 작품이 세상에 선을 보이도록 노력할 참이다. 고인을 추모하는 박물관도 세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예술작품으로 후세에 남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는 고인의 말을 따르기 위해서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편에 섰던 고인의 발인은 15일 오전 5시 30분, 장지는 경북 영천에 위치한 국립영천호국원이다.


태그:#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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