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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아침 8시 왕의 운구행렬이 왕궁앞에서 잠시 멈춘 사이 12대의 곡사포가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불을 내뿜으며 선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2월 1일 아침 8시 왕의 운구행렬이 왕궁앞에서 잠시 멈춘 사이 12대의 곡사포가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불을 내뿜으며 선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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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발의 조포가 지축을 울릴 만큼 강한 폭발음을 내며 왕궁 앞 메콩강변 아침하늘을 갈랐다. 동남아 정치사의 풍운아이자 캄보디아 독립의 영웅, 고 노로돔 시하누크 전국왕을 위한 최대의 경의표시였다.

왕의 공식장례행사 첫날인 지난 1일은 이른 새벽부터 프놈펜 왕궁주변 메콩강변도로변은 운구행렬준비로 북새통을 이뤘다. 장례준비를 위해 공무원만 1만5천여 명이 동원됐으며, 각종 전통의상을 입은 운구행렬 참가자 수천여 명이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왕궁앞에 설치된 대형스크린TV를 통해 왕궁내 파빌리온에서 진행 중인 장례의식이 생중계되었고, 전국의 시청자들이 이 광경을 지켜봤다. 붉은 카펫이 깔린 왕궁 앞 도로변에서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외신기자들이 쉴 새 없이 카메라셔터를 누르며, 21세기 얼마 남지 않은 군주의 마지막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왕궁앞에 대기중인 왕의 대형초상화를 실은 불사조 모양의 운구행렬
 왕궁앞에 대기중인 왕의 대형초상화를 실은 불사조 모양의 운구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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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메콩강에 붉은 해가 떠오르고, 반사된 햇빛에 황금빛 왕궁이 더욱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던 오전 7시 50분경 고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관을 실은 운구용 차량이 왕궁 정문앞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명이 운집한 왕궁앞 정원은 카메라 셔터소리만 들릴 만큼 장내가 숙연해졌다.

하얀 상복을 입은 시하누크 국왕의 큰아들인 라나리드왕자와 장녀 보파 데위공주가 승리의 문 앞으로 제일 먼저 모습을 보였다. 그 뒤로 전통예복과 왕실깃발을 든 수십여명의 행렬을 앞세운 운구차량이 전통음악에 맞춰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국화꽃으로 장식한 왕의 관은 별도로 준비된 시가행진용 운구차량으로 자동승강설비에 의해 다시 옮겨졌다.

2월 1일 아침 8시경 왕궁을 떠날 차비를 하는 운구행렬을 승려들이 에워싸 호의를 하고 있다. 왼편 먼 발치로 시하누크국왕의 평생의 안식처였던 왕궁이 보인다.
 2월 1일 아침 8시경 왕궁을 떠날 차비를 하는 운구행렬을 승려들이 에워싸 호의를 하고 있다. 왼편 먼 발치로 시하누크국왕의 평생의 안식처였던 왕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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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전통양식의 뾰족한 황금지붕차양과 운구차량 앞뒤로 수 십여 마리의 황금빛 불사조(불교설화에 나오는 금시조)를 형상화해 만든 운구차량이 자리했다. 곧이어 금박이 박힌 흰색 예복을 입은 고승들이 올라탔고, 운구차량 양옆은 주황색 승복을 입은 승려 수 십 여명이 에워 싸 왕의 마지막 길을 호위했다.

운구행렬이 왕궁 앞을 출발하기 바로 전인 오전 정각 8시, 왕립캄보디아군(RCAF) 예하 최정예부대인 911공수여단 부대원들이 지휘관의 수신호에 따라 12대의 곡사포 101발의 조포를 번갈아가며 발사. 자신들이 존경하고 추앙했던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영제국시절부터 국왕이나 국가원수 장례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시작하면서 유래되었다는 조포식 행사는 이날, 이웃국가 베트남이 기증한 공포탄을 사용했다.

그들의 위대한 왕에게 마지막 보내는 최대의 경의가 부대 지휘관의 수신호와 함께 끝나자, 운구차량이 다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하누크 국왕의 대형초상화가 실린 차량을 선두로, 흰색 의장복과 검은색 정장을 입은 참가자들과 육해공군과 경찰, 다양한 전통의상에 전통악기와 연꽃을 든 참가자들, 그리고 VIP를 실은 의전용 차량 등을 앞세운 채, 왕의 운구차량은 국왕의 평생의 안식처였던 정든 왕궁 앞을 지나 메콩강이 흐르는 강변도로로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우로부터 모니크(모니니스)왕비와 아들이자 현 국왕인 시하모니 국왕, 그리고 옆에 캄뵈디아 최고권력자 훈센총리의 부인 분 라니 여사가 보인다.
 우로부터 모니크(모니니스)왕비와 아들이자 현 국왕인 시하모니 국왕, 그리고 옆에 캄뵈디아 최고권력자 훈센총리의 부인 분 라니 여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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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센총리와 영부인 분라니 여사도 상주(喪主)로서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 날 만큼은 무려 28년째 정권을 유지해온 캄보디아의 '최고권력자'로서의 위세나 거만함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허리를 낮게 조아리고, 군주국가의 일개 신하로서의 낮은 자세로 일관했다. 

유가족 대표인 모니크왕비와 시하모니국왕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려는 제스처로 보였다. 1997년 유혈쿠데타 성공 이래 캄보디아의 최고권력자로, 국회에서 무려 5시간 20분 넘게 혼자 연설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등 자신을 드러내기를 무척 좋아하는 그이지만, 이날 만큼은 노련한 정치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는 이 역사적인 장면을 TV로 지켜보는 1천5백만 자국민들의 마음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 싶었다.

훈센총리와 행삼린 국회의장, 마지막까지 시하누크국왕을 모셨던 개인비서 시소왓 토미쪼왕자 등 일부 대신들은 운구차량으로 개조된 황금빛 행렬차량에 승차하여, 왕의 운구행렬을 뒤따랐다. 장례부위원장인 닉 분차이 부총재와 껩 쭉테마 프놈펜 시장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최근 건강이 악화된 찌아 심 상원의장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천여 명에 이르는 추모행렬을 앞세운 운구차량은 역내 400여 킬로미터를 흐르는 '생명의 젖줄' 메콩강변을 따라 수도 프놈펜(Phnom penh)의 어원(語原)이 된 왓프놈(Wat Phnom) 사원에 다다랐다. 해발 30여 미터에 불과한 사원 언덕 주변은 이미 수천여 명의 인파가 연꽃송이를 손에 쥔 채 기다리고 있었고, 국왕의 영정사진을 든채 눈물을 글썽이는 여성들도 보였다.

운구행렬은 사원언덕 주변을 한 바퀴 돈 뒤, 남하하여 전국왕의 증조할아버지 이름을 딴 노로돔 대로(Nordom Blvd)로 들어섰다. 이른 새벽부터 국왕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애타고 기다리던 수 만 여명의 시민들은 왕의 운구행렬 앞에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양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그들의 진정한 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독립의 아버지' 시하누크, '복잡하다'는 수식어 늘 따라다녀

왕궁앞에 걸린 시하누크 전국왕의 대형초상앞에서 예불을 올리는 보살의 모습
 왕궁앞에 걸린 시하누크 전국왕의 대형초상앞에서 예불을 올리는 보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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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정치평론가들에 의해 참으로 복잡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에 관한 기사마다 영어로 '복잡하다'는 의미로 ""Complicated"라는 수식어가 항상 쫓아 다녔다. 그는 캄보디아 '독립의 아버지'로 캄보디아 60년대 근대화와 90년대 이래 평화와 안녕의 시대를 이끈 위대한 업적으로 국민적 추앙과 함께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6~70년대 이해하기 힘든 정치 행보로 인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정치인으로 치부되는 등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했다.

냉전시대 약소국 지도자로 살아남기 위해 중립외교를 표방했지만, 때론 스스로 정치적 균형을 깨뜨리는 정치적 오판을 저질러 캄보디아를 내전의 포염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1987년 망명시절엔 미국성인잡지 '플레이보이紙'에 망명객신분이 된 자신의 삶과 정치인생을 격정적으로 풀어낸 인터뷰를 하는 바람에 스스로 외교정가의 비아냥거리가 되는 일마저도 자처했다.

하지만 외부세계의 평가와 달리 적어도 캄보디아에서 만큼 프랑스로부터의 90년간의 식민역사를 종식시킨 독립의 아버지로 죽는 날까지 국민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또한, 군왕의 자리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1950년대 기네스북에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직업을 가진 고위정치인으로 등재될 만큼 1인 다역의 다양한 삶도 살았다.

영화 감독에 주연과 연출을 직접 맡는 것은 물론, 시나리오 작가, 작곡가로서도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엄청난 여성편력(?)에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미인대회 출신 모니크왕비를 주연으로 내세운 '보꼬산의 장미'(1969)와 '트와일라이트'(1969)같은 영화도 만들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인 나린드라뽕 왕자(1954~2003)( 시하모니 국왕의 친동생)를 아역배우로 키우기까지 했다.

나이 80이 넘어서는 인터넷 블로그를 직접 운영, 노익장을 과시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 만들었던 크메르루즈를 직간접적으로 키운 장본인이기도 했다. 전체 인구 중 4분의 1이 넘는 200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던 그 역사적 책임에서 그는 영원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자신도 폴폿이 이끌던 크메르루즈 정권시절 (1975~1979) 스스로 키운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왕궁에 갇히는 수모를 겪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친자식 5명과 14명의 손주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망명시절엔 중국의 주은라이와 북한의 김일성의 도움으로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다시 거슬러 올라, 그는 또한 1960년대 초 비동맹회의(NAM)의 주요멤버로 참여, 냉전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중립외교'를 표방했었다. 하지만,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은 캄보디아의 중립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친미성향의 우익군대와 갈수록 확산일로에 있던 좌익공산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잃는 순간, 그는 권좌에서 쫒겨 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독재자 수카르노 대통령(1901~1970)과 여러모로 비슷한 길을 걸었다. 두 정치인 모두 프랑스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독립영웅이었고, 중립외교정책을 마치 '전가의 보도'인양 삼아 냉전시대 약소국 지도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나름 노력했다.

하지만, 두 정치인 모두 자신들이 믿었던 충복들에 의해 (시하누크국왕은 론놀에 의해, 수카르노는 수하르토에 의해) 배신을 당했다. 권력을 잃고 가택연금당한 상태로 수카르노 대통령이 1970년 세상을 떠났고, 공교롭게도 같은 해 시하누크 국왕 역시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시하누크 국왕은 마지막 운명만큼은 수카르노와는 전혀 달랐다.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1991년 파리평화협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조국 캄보디아에 돌아와 화려하게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비록 1997년 훈센총리측의 '유혈쿠데타'로 종국엔 이름뿐인 왕으로 되돌아갔지만, 평생 몸에 밴 동물적 수준의 정치 후각과 중재능력, 그리고 능수능란한 협상술을 통해 죽는 날까지 국내정치에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절대권력을 잃은 후에도 훈센정부와 적당한 조율관계를 유지하며 유례없는 평화시대로 캄보디아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과거 5~60년대 경제근대화를 이끈 그이지만, 정작 자신의 조국 캄보디아를 '아시아 최빈국'이라는 오명과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어쩌면 '무관심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전체 인구 1천 5백만여 명중 전기를 공급받는 인구는 불과 1/4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캄보디아 국민들의 척박하고 무기력한 삶은 계속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포스코건설이 짓고 있는 바따낙 금융빌딩이나 현대 엠코건설이 건설한 22층 고층오피스 등 새롭게 들어선 모니봉대로변 대형건물들이 프놈펜 시내의 스카이라인을 하루가 멀게 바꾸어 놓고 있지만, 농촌의 삶은 195~60년대 모습 그대로이다. 한 달 최저임금 65불을 손에 쥐기 위해 도시 공장지대로 몰려드는 농촌젊은이들 때문에 최근엔 일손마저도 모자라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 대한 존경심과 지지도는 농촌지역이 훨씬 높다. 이날 왕궁앞에 몰려든 인파중 상당수는 시골에서 만사 제쳐놓고 버스를 타고 몇날 몇일을 달려온 사람들이다. 과거 '킬링필드'에 대해 시하누크 국왕에 대한 원망 따위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작년에는 중국출신 봉제공장책임자가 국왕사진을 훼손하자, 캄보디아국민들의 분노를 산 바 있으며, 경찰서에 끌려가 억지분향을 한 뒤 결국 추방당한 사건도 있었다.

시하누크 국왕에 대한 평가, 외부시선과 달라

시하누크 국왕에 대한 평가가 외부세계의 시선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놀랍다. 학력이나 소득수준, 나이와 거의 무관하게 캄보디아 전국민들에게 그는 영원불멸의 왕이자, 절대적인 신이다. 한국의 근대사와 비교해보면 정말 아이러니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장례행사 첫날인 지난 1일은 왕궁주변 도로는 전날 저녁부터 차량통행이 통제되기 시작했고, 왕궁 주변 진입도로는 일반인들의 도보 출입마저 완전차단됐다. 왕의 다비식 행렬 시가행진을 직접 눈으로 보고자 전국에서 수만여 명이 몰려들었지만, 운구행렬시가행진로로 확정된 왓프놈사원 앞 노로돔대로와 독립기념탑 부근 일부구간을 제외하고, 왕궁쪽 진입로가 완전 봉쇄되는 바람에, 왕궁앞 광장은 그 넓은 공간에 비해 행사관련자 약 1~2만명과 전 세계에서 온 약 천여 명의 기자들로 다소 북적거리는 수준이었다.

당초 현지 신문들은 정부관계자의 말을 인용, 약 150만 여명이 왕의 장례식 시가행렬을 보기 위해 모여들 것으로 예상했었다. 이 때문에 호주대사관과 UN현지사무국에서는 파견직원들과 가족들에게 일주일치 이상의 예비식료품을 미리 구입해놓을 것을 당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우려에 지나지 않았다. 잘못된 예측이 오히려, 인파가 너무 많이 몰릴 것을 우려한 추모객들의 직접참관을 포기하게 만든 주원인으로 작용했다. 훈센총리 역시 지난 2010년 353명이 압사한 다이아몬드섬 참사를 의식한 듯 신문과 방송을 통해 시민들이 직접 다비행사에 참여하는 대신 방송을 통해 애도의 마음을 표해줄 것을 수 차례 당부한 바 있다.

이런 영향으로 이번 장례운구행렬의 시가지행진 행사는 지난해 10월 왕의 운구가 베이징에서 도착했을 당시 도로변에 운집했던 수십만 인파에 비해 그 수가 훨씬 적어 보였다. 주변식당들도 정부의 영업중지 지시에 따라 장례기간을 포함해 1주일간 문을 닫는 바람에, 프놈펜 시내 전역이 비교적 한산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정부와 현지 언론의 빗나간 예측 덕(?)에 다행히 국왕의 장례행사는 별다른 사고나 잡음없이 차분하면서도 엄숙히 진행되었다. 평소 건강이 나쁜 속 안 부총리겸 관방부장관이 시가행진 직전, 전날 유럽출장의 여파로 갑자기 과로로 쓰러진 사실을 빼고는 말이다. 용케 경찰의 통제라인을 피하거나 또는 묵인(?)하에 뒤늦게 왕궁주변에 들어온 일반인 1천여명이 왕궁앞 도로변에 삼삼오오 앉아 왕의 행렬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경찰은 더 이상 그들을 외곽지역으로 내쫓거나 제지하지는 않았다.

생중계에 나선 현지방송 아나운서는 시하누크 국왕을 "조국근대화를 이끈 영웅", "국가통합의 아버지"로 치켜세우며, 그의 생전 업적을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하하기에 바빴다. 

오전 11시 경 약 3시간 넘게 진행된 왕의 장례운구행렬이 마침내 시가행진을 마치고, 독립기념탑을 돌아 다시 왕궁앞길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왕궁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대기중이던 아들인 시하모니국왕과 미망인 모니크 전왕비가 왕궁정문 앞으로 나와 운구 행렬에 나선 수천여 명의 참가자들에게 두 손을 모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월 1일 왕궁에 안치되어 있던 시하누크국왕의 관이 장례다비식장으로 옮기는 행사에 이어 4일에는 이곳에서 왕의 다비식이 열릴 예정이다.
 2월 1일 왕궁에 안치되어 있던 시하누크국왕의 관이 장례다비식장으로 옮기는 행사에 이어 4일에는 이곳에서 왕의 다비식이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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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이어 이들 로얄 패밀리는 운구행렬을 뒤따라 다비식이 거행될 예정인 국립박물관앞 쁘레아 메루광장 다비식장을 향해 수행원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왕궁 바로 옆 다비식장에 도착한 왕의 관은 다비식장 정중앙에 설치된 크메르전통양식의 다비시설에 무사히 안치됐다. 우리나라 김한수 대사와 부인도 VIP내빈으로 참석했으며, 그밖에 수백여명의 주재외교관들과 왕실가족들을 포함한 귀빈들도 다비식장을 둘러싼 귀빈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곧이어 캄보디아 전통예법에 따라 수십여 명의 불교계 고승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축원예불이 거행됐고, 이것으로 이날의 공식장례행사는 끝났다. 식민지풍 노란색 화려한 사각형 디자인이 매우 인상적인 다비식장 입구는 수십여명의 경호원들과 특수부대출신의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로 초청받은 귀빈들과 극히 제한된 수의 기자들에게만 취재를 허용했다.

지난해 10월 15일 시하누크 국왕은 89세의 나이로 베이징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곧바로 훈센총리 지시하에 국가장례위원회를 구성, 2달간의 장례준비를 통해 국립박물관 앞 정원을 개조, 쁘레아 메루광장으로 새로 명명된 공간에 황금색 크메르 전통양식의 선왕을 위한 다비시설을 설치했다.

동남아 현대사의 풍운아 시하누크 전국왕은 쁘레아 보롬 로따나 꼿(Preah Borun Rattank Kod)라는 최근 공식묘호로 최근 추존되었으며, 다비식장인 메르광장 내에서 3일간 안치된 후 4일 불교식 다비식과 함께 캄보디아 국민들의 마음속에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던 왕으로 남게 될 예정이다.

한편, 시하누크 전국왕의 다비식행사에는 프랑스 쟝 마크 에로 총리, 태국의 익락 친나왓 총리, 라오스의 통싱 탐마웡 총리, 베트남의 응원 떤 중 총리 등 4명의 총리와 중국 에선 자칭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이 참석할 것으로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캄보디아의 요청에 따라 하금열 대통령실장이 특사로 현지로 출발했다.



태그:#캄보디아, #박정연, #시하누크, #메루정원, #캄보디아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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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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