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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포구를 낀 한적한 읍내였으나 조정래(70)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배경이 되면서 국민적 관광지로 떠오른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다녀왔다. 처음 방문이었지만 사람도, 거리도 낯설지 않았다. 외지에서 흔히 느끼는 소슬함 보다는 50~60년대 고향동네처럼 정겨움이 묻어났다. 어딘가에서 반가운 사람이 나타나 줄 것 같은 기대감이 솟기도.

전북 군산을 출발, 두 시간쯤 달려 주암휴게소에 도착, 자판기 커피로 입을 축이고 낙안읍성으로 방향을 잡으려다 마음을 바꿔 직진했다. 서순천 IC를 빠져나와 우회전. 국도를 타고 20분쯤 달리니 벌교 읍민이 진산으로 여긴다는 제석산(563m)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함께 꼭 방문하고 싶었던 벌교(筏橋). 읍내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1930년 12월 20일 일제에 의해 개통되었다는 경전선 철도와 벌교읍 입구 건널목. 제석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1930년 12월 20일 일제에 의해 개통되었다는 경전선 철도와 벌교읍 입구 건널목. 제석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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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란 고향동네에는 질펀하게 펼쳐지는 갯벌과 갈대밭, 일제가 개설한 어시장(째보선창), 재래시장(구시장), 하얀 거품을 내품는 기차가 오가는 기차역과 건널목, 채석장이 있는 돌산(石山), 일제가 개간한 들녘도 있었다. 모두 집에서 한 마장 거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눈쌓인 건널목, 비좁은 시장통, 비릿한 갯내음 등이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인구 1만 5천 남짓의 작은 읍소재지 벌교는 탄생 배경부터 수난의 역사까지 군산과 흡사한 면이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낙안군에 속했으나 1908년 일제에 의해 보성군으로 편입되었고. 수탈을 목적으로 철도를 개설하여 고흥·순천 등으로 빠지는 육·해상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간척사업을 벌이면서 식민지 포구로 개발한 점 등에서 잘 나타난다.

태백산맥 문학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현부자네 집(우측). 아래는 길고도 아픈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화네 집(제각)
 태백산맥 문학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현부자네 집(우측). 아래는 길고도 아픈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화네 집(제각)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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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태백산맥>은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던 1948년 10월 하순 어느 날 달빛 어둠이 희끄무레하게 내리깔린 새벽, 상부로부터 밀명을 받고 벌교에 잠입한 빨치산 중견간부 정하섭이 질펀하게 펼쳐지는 중도들녘이 내려다보이는 현 부자네집 제각(소화네 집)으로 숨어들어 처녀무당 소화(素花)와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긍께····좌, 좌익······"
"그렇소, 제대로 맞췄소, 내가 바로 빨갱이요."

소설 머리 부분에서 소화와 정하섭이 나누는 대화이다. 열일곱 살에 무당의 삶을 대물림받은 소화와 술도가집 아들 정하섭은 학창시절부터 좋아했으나 말을 못하고 지내다가 이날 사모의 정을 뜨겁게 불태우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이후 소화는 정하섭의 아이를 갖게 된다. 또한, 그녀는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감옥살이를 했음에도 좌익 활동에 동조한다.

좌우익의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는 해방정국에서 휴전회담이 성사되는 1953년까지 혼란기를 그려내는 <태백산맥>은 소설임에도 등장인물과 크고 작은 사건, 장소 등이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먼 동네가 아닌 이웃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져 더욱 애틋하다. 그처럼 피부로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네 부모들이 경험했던 아픔이요, 반세기가 넘도록 치유되지 않은 생채기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군산의 '아흔아홉 다리'와 형제처럼 닮은 벌교의 '철다리'

염상진 동생 염상구가 깡패 왕초 ‘땅벌’과 담력을 겨루는 철다리.
 염상진 동생 염상구가 깡패 왕초 ‘땅벌’과 담력을 겨루는 철다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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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교를 건너며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니 녹슨 '철다리'(鐵橋) 하나가 벌교천 위에 환자처럼 누워있다. 선창에서 물건을 훔치다 들킨 염상구가 일본 선원을 찔러 죽이고 도망쳤다가 해방이 되자 돌아와 '살인'을 '독립운동'으로 바꿔치기하고 청년단 감찰부장이 되어 깡패 왕초 '땅벌'과 담력을 겨루는 철교이다. 그 찰나, 흉측스러운 염상구 형상이 그려지면서 군산의 '아흔아홉 다리', '꺼먹다리' 등과 형제처럼 닮았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순천에서 광주로 뻗어 나간 철로의 벌교포구를 잇는 철교 중앙에 땅벌과 그동안 쌍칼이란 별명이 붙은 염상구가 서로 등진 채 수영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중략) 철교의 교각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그들은 중앙 교각 위에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 기적을 울리며 검은 괴물처럼 철교로 진입했다. 그 순간 기차와 그들과의 거리는 교각 네 개의 간격으로 좁혀졌다." (<태백산백> 1권 194쪽)

위 대목은 읽을 때마다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달려오는 열차와 맞서 두 팔을 쳐들고 절규하는 설경구 모습이다. 영화 장면은 몸이 움찔해질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면서 땅벌과 염상구의 결투가 오버랩 된다. 그러나 석탄, 고구마 등 물자 수송차량을 생활수단으로 여겼던 50~60년대 군산 철길마을 주변 소년들은 재미삼아 하면서 스릴을 만끽했다.

또 하나는 '어깨'로 불리던 동네 형들이 염상구와 땅벌처럼 군산선(군산-익산)이 지나는 '아흔아홉 다리'에서 내기를 하던 모습이다. 가슴을 조이며 지켜보던 우리는 지금의 '페이퍼코리아선'(고려제지선)이 지나는 '꺼벅다리'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기적 소리가 들리면 교량에 올라 손을 흔들다 가까워지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기반시설이 열악했던 당시에는 기차도 시속 20km~30km의 서행구간이 많아 그처럼 위험한 놀이도 가능했다. 

조선의 노동력까지 수탈했던 일제 만행을 그려낸 '중도방죽'

일제의 물자 수탈과 노동력 착취 상징으로 각인되는 중도방죽.
 일제의 물자 수탈과 노동력 착취 상징으로 각인되는 중도방죽.
ⓒ 조정래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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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평양, 해주, 인천, 군산, 목포, 마산, 부산 등 조선의 서남해안 포구에 유달리 눈독을 들이고 개발을 서둘렀던 이유는 해안에 침략 거점을 확보하고 도로와 철도를 내륙과 연결해서 자원 수탈은 물론, 어업이민을 정착시켜 항구도시와 도서(섬)지방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해상을 일거에 장악하기 위한 모략이요 술책이었다.   

소설에 나오는 '중도방죽'은 일본인 중도(中島-나카시마)의 이름을 따다 붙인 간척지 방죽의 이름이다. 중도라는 사람은 일제강점기 실존했던 인물로 철다리 옆에 있는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조정래는 소설에서 방죽을 쌓는 공사장에 동원된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워따 말도 마씨요.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허고 가난헌 개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힘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중략) 골 빠지게 일얼 혔음스롱도 고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웂소. 그 애롭고 피맺히는 일얼 가난허고 배곯은 조선 사람들이 손으로 혔다는 것만 확실허제. 근디 기맥히게도, 방죽을 다 쌓고 본께 배불리는 놈덜언 일본놈덜이었다 그것이요." (<태백산맥> 4권 313쪽)

소화를 만나고 나온 교사 이지숙이 중도들판을 걸으며 방 노인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는 대목이다. 현대식 장비로도 수삼 년이 소요될 간척공사를 지게와 삽으로만 이뤄낸 사람들의 고초를 어찌 말로 형언하겠는가. 목숨을 걸고 일한 사람들은 한 뼘의 농지도 없이 소작농으로 전락했으며 그나마 7할~8할을 소작료로 주었다니, 당시 농민들의 힘들고 어려웠던 삶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선의 비옥한 농지와 갯벌에 눈독을 들이던 일제는 사탕발림 식 광고로 순진한 조선 농민을 수천 명씩 모집하여 저수지와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농지를 바둑판처럼 정리하여 수확을 높여갔다. 그러나 농민의 궁핍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었고, 일인 농장주들은 식민권력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노동력까지 수탈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했던 것이다.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벌교역 광장

벌교읍 상가 밀집지역에 자리한 벌교역. 1987년 새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벌교읍 상가 밀집지역에 자리한 벌교역. 1987년 새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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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를 굽어보며 들어선 벌교역 앞에서 잠시 멈췄다. 슬프고 가슴 아픈 회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볼을 스치는 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벌교역 광장은 소설에서 지역 유지들이 도열하여 국회의원을 전송하고, 신임 계엄사령관을 환영하는 등 각종 행사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로 그려진다. 특히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이란 글씨와 함께 그의 목이 내걸린 현장을 묘사한 대목은 소설의 대미를 장식한다.

1953년 9월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지리산 비트에 있던 염상진은 토벌대와 격전을 벌이다 실탄이 떨어지자 수류탄으로 부하들과 자폭한다.

"이틀이 지난 벌교역 앞마당에는 사람의 목 하나가 내걸렸다. 폭이 60센티 정도고, 길이가 2미터 정도 되는 나무판이 받침목으로 비스듬하게 세워졌고, 그 꼭대기에 머리카락을 위로 모아 묶은 목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로 붙은 종이에는 큼직큼직한 글씨들이 씌어있었다.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태백산맥> 10권 341쪽)

소문을 듣고 달려온 염상진의 어머니 호산댁과 아내 죽산댁은 포효하는 짐승처럼 오열한다. 급기야 경찰과 몸싸움이 벌어지고, 뒤늦게 도착한 빨갱이 사냥꾼 염상구가 포악했던 평소 모습과 다른 언행으로 찐한 형제애를 보여주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가 경찰의 어깻죽지를 치면서 "요런 개좆겉은 새끼덜아,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여! 당장에 못 띠내리겄어!"라며 호통치는 대목은 전율을 일으킨다.

소설 <태백산맥>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의 내사를 받았고, 저자 조정래는 우익 세력에게 고발을 당했다. 1994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전국의 600여 개 극장이 협박 편지를 받았으며, 저자는 협박전화에 시달렸다고 한다. 개인에게 주어진 이념과 양심의 자유를 권력연장의 도구로 이용했던 일부 권력자들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2012년 12월 28일~29일에 다녀왔습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벌교, #태백산맥,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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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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