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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들의 피사(PISA,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 성적이 우수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의 학습 효율성이나 학업 흥미도가 낮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교육 당국이나 언론에서 이 사실을 굳이 크게 부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도 그저 그러려니 한다. 공부는 무작정 많이 하는 게 좋다는 둥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둥 하면서 말이다.

피사의 대표 선두 주자인 핀란드는 하루 평균 4시간 정도를 공부한다. 반면에 우리 나라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8시간 이상을 공부에 매달린다. 공·사교육비가 거의 없는 핀란드와 교육 비용을 견주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렇게 핀란드보다 몇 배 이상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공부하면서도 피사 성적은 그들보다 낮거나 비슷한 경우가 많다. 피사 성적이 절대적인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하지만 고비용 비효율 시스템도 이 정도면 올림픽 금메달 감이다.

필자의 둘째 아이(올해 다섯 살)다. 올해 녀석의 주요 관심 대상은 '앵그리버드'와 '토이스토리'였다. 하지만 이들을 뛰어넘어 요 몇 년째 녀석을 가장 압도하고 있는 것은 자동차다. 녀석은 자동차들을 의인화하여 그들에게 인성을 부여하는 식으로 관심과 흥미를 나타내고 있다.
 필자의 둘째 아이(올해 다섯 살)다. 올해 녀석의 주요 관심 대상은 '앵그리버드'와 '토이스토리'였다. 하지만 이들을 뛰어넘어 요 몇 년째 녀석을 가장 압도하고 있는 것은 자동차다. 녀석은 자동차들을 의인화하여 그들에게 인성을 부여하는 식으로 관심과 흥미를 나타내고 있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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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학생들의 학업 흥미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바닥권에 있다는 사실이다. 실상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거기에서 흥미를 느끼고 스스로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공부를 여덟 시간이 아니라 열 시간이나 스무 시간을 하더라도 원칙적으로는 문제 될 게 없다. 오히려 권장하고 자극하여 높은 학업 성취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 아이들은 학업 성취도도 그저 그렇고(가령 위에서 언급한 투자 대비 결과를 핀란드와 견주어 보라), 학업에 대한 재미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1997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가 주창한 '데세코(Definition and Selection of Key Competences)' 프로젝트가 있다. '데세코'는 미래 사회에서 개인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3대 핵심 역량 범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는 '도구의 지적 활용(Use tools interactively)', '사회적 상호작용(Interact in heterogeneous groups)', '자율적 행동 (Act autonomously)' 등이 포함된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갖고 있는, 도구의 지적 활용 역량은 탁월하다. 2010년 9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수행한 '청소년기 핵심 역량 국제 비교' 결과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언어적 소양과 수학적 소양은 조사 대상국 22개 국가 중 각각 1위와 2위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도구의 지적 활용 역량 부문에서 한국 학생들은 종합 2위를 차지하였다. 실생활에 필요한 도구(말하기, 셈하기 등)를 활용하는 능력이 그만큼 탁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개의 역량은 형편 없었다. 이질적인 집단 안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은 종합 21위로 최하위권이었다. 타인과 소통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감하고 토론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집단 지성에 기여하는 공동체성도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자질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셈이다.

그나마 자율적 행동 역량은 18개 국가 중 종합 7위에 머물렀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순위다. '자율적 행동'은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역량이 그나마 중위권에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닥공(닥치고 공부)'을 강요하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나름대로 스스로 성찰한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게 아닐까. 좋게 해석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둘째 아이의 '자율적 행동 역량'을 보여주는 '앵그리버드' 활강 구도. 처음에 철쟁반의 가장자리를 따라 배치한 나의 획일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이렇게 해 놓았다. 이러한 '자율성'은 놀이를 즐기는 모든 아이에게 잠재되어 있는 역량이다. 대한민국 학교 교육의 맹점은 학교급과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에게서 '자율성'을 박탈한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초중고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는 순간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율성'을 다시 부여한다는 것이다.
 둘째 아이의 '자율적 행동 역량'을 보여주는 '앵그리버드' 활강 구도. 처음에 철쟁반의 가장자리를 따라 배치한 나의 획일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이렇게 해 놓았다. 이러한 '자율성'은 놀이를 즐기는 모든 아이에게 잠재되어 있는 역량이다. 대한민국 학교 교육의 맹점은 학교급과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에게서 '자율성'을 박탈한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초중고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는 순간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율성'을 다시 부여한다는 것이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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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나 데세코 프로젝트는 모두 세계 선진국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보수적인 OECD가 관장하고 있다. 우리가 그 결과에 일희일비하거나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절대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기존의 획일적인 공부(학업)만으로는 미래 사회를 살아가기 힘들다고 인식하는 점에는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데세코 프로젝트에서 제시하는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이나 자율적 행동 역량 등에는 특별히 더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공부에 대한 고민도 바로 이런 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아이 혼자서만 하는 공부로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화'를 이루기 어렵다. 누가 억지로 떠먹여주는 지식만을 놓고 하는 공부로는 낯선 문제 상황에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여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 힘들어진다. 스스로 하되 함께 하는 공부가 필요한 까닭이다.

우리나라에서 '학업(學業)의 유의어처럼 널리 쓰이는 '공부(工夫)'라는 말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어의가 '학습'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를 학습으로 보는 한,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이때 그 '배우고 익힘'의 대상은 획일적으로 정해진다. 교과서에 실린 지식과 교사의 설명 따위가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여럿이 같은 교실에 함께 있어도 각자 개별적으로 열심히 그 지식과 설명만 받아들이면 된다. 동료 학생, 심지어는 교사마저도 협력자나 조력자가 아니라 방해자가 될 때가 많다. 혼자서 하는 그 학습 과정에 아이들은 그들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또는 선생님이 수업을 하거나 말거나 들입다 자기 '공부'만 하는 아이들, 반 친구가 폭행을 당해도 모른 체하며 문제집만 보는 아이들을, 나는 그래서 제일 '무서워한다'.

그런데 이렇게 획일적이고 일제식으로 이루어지는 개별화 공부는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사회가 대량 생산 체제로 작동되던 과거의 산업화 시기에는 어느 정도 유용한 면이 있었다. 일사분란한 대량 생산 체제 하의 사회에서는 아이들조차도 표준적이고 규격화한 지식을 갖춘 인력으로 길러내는 것이 효율적이다. 학교가 '인력 생산 공장'으로서 인간 자원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일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이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은 '교육과학기술부'로 바뀐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을 상기해 보자. 이 둘은 명칭은 서로 다르지만 인간을 '자원'으로 보는 철학적(?) 기조는 똑같다. 자원은 '개발'되는 것이지 '계발'되는 게 아니다. 아이들 내면의 진지함과 합리성을 닦기보다는(계발하기보다는) 국가와 사회가 사용하기 쉽도록 그들을 매끄럽게 손질해야 하는(개발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상 '인적 자원'의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의 상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구매자는 당연히 국가(정부)와 사회(기업)다. 상품은 그 고유한 본질과 무관하게 상품성(구매 매력)만 있으면 된다. 인간이 인간성을 잃게 되면서 그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소외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런 점에서 교육이 인간을 자원, 곧 상품으로 길러내는 시스템은 교육 그 자체의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다.

지난해, 필자가 맡고 있는 2학년 중 한 반으로 막 수업을 들어갔을 때의 풍경. 고작 오전 3교시째임에도 아이들은 벌써 '좀비'가 되어 있다. 자율성과 자발성이 없는 '재미 없는' 공부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풍경이다.
 지난해, 필자가 맡고 있는 2학년 중 한 반으로 막 수업을 들어갔을 때의 풍경. 고작 오전 3교시째임에도 아이들은 벌써 '좀비'가 되어 있다. 자율성과 자발성이 없는 '재미 없는' 공부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풍경이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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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정보 사회다. 이제는 누가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느냐보다 그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종합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하는가 하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과거와 같이 혼자 교과서만 보면서 하는 공부만으로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 낼 수 없다. 눈앞의 사태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이는 안목 또한 기를 수 없다. 공부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시작하되 친구와 더불어 함께 마무리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실상 진정한 공부의 조건과 방법은 '학습(學習)'이라는 두 음절의 한자어 속에 이미 담겨 있다. 이 '평범한' 단어의 한자 낱낱을 자세히 따져 봄으로써 학습, 곧 공부의 '비범한' 의미를 알아보자.

'學習'의 '學'에는 배움의 주체와 조건이 담겨 있다. 배움의 주체는 당연히 아이들이다. 글자 아래쪽의 '子'가 그것이다. 주체와 관련되는 또다른 요소로 '冖' 위쪽에 있는 '爻'가 있다. 이 글자는 아이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요컨대 배움은 나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해 나가는 것이다. '學'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로 바로 그런 데 있다.

'學'에 담긴 배움 배경 조건은 두 가지다. 먼저 배울 수 있는 적정한 공간[중간의 '冖'는 '집'이라는 의미가 있는 '宀'에서 위쪽의 한 획이 생략된 것이다.]이 필요하다. 그 공간이 반드시 획일적인 25평의 사각형 공간이어야 함은 물론 아니다. 아이들이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침해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게 숨쉭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곳이 설령 맨땅이어도 상관이 없다.

두 번째 배움의 조건은 '爻' 좌우에 있는 글자다. 사람이 두 팔을 앞으로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의 이 글자 부위는 실상 서로 손을 맞잡은 아이들('爻')을 그 양편에서 보호하는 어른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 어른이 학교에서는 교사요, 집과 사회에서는 부모와 이웃 어른들임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는 학교 교육이 학교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사회가 함께 해 나가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학습의 '습(習)'은 배움의 방법을 함축하고 있다. '習'은 새가 날갯짓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깃털[羽(깃털 우)]을 수없이[百(일백 백)] 파닥거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회의 문자다. 어린 새가 날갯짓을 배우기 위해 깃을 움직거리는 모습을 상기해 보기 바란다. 그들은 끊임없이 날개를 퍼덕인다. 날기 연습을 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나뭇가지에 날개가 걸려 다칠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날갯짓 또한 단순히 깃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그야말로 온 몸으로 날개를 퍼덕인다. 그 과정에서 약한 깃털이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고통도 뒤따른다. 그러나 그 고통이 있어야 창공을 무사히 날 수 있는 강한 깃털들을 만날 수 있다. 성숙을 위한 고통의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 모든 과정에서 어미 새는 새끼 새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끼니 때가 되어서야 수없는 날갯짓으로 허기진 자식에게 먹이를 가져다 준다. 날개를 잡고(입으로 물고?) 이렇게 날아야 한다느니, 부리로 깃털 겨드랑이를 콕콕 찍으면서 왜 저렇게 하지 않느냐느니 하면서 간섭하지 않는다. 어미 새가 하는 일은 든든한 둥지 지킴이와 먹이 제공자의 구실뿐이다.

'學習'을 통해 알아본 공부의 조건과 방법은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진리를 담고 있다. 아이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따뜻한 공간과 주변 어른들의 배려 속에서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을 서로 떼어놓고 25평의 교실이라는 공간에 몰아넣은 채 혼자서만 공부하라고 강요한다. 그런 아이들이 자신밖에 모르는 괴물로 성장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수없이 시도하고 실수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여린 내면을 좀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지 어른들은 이것저것 간섭하고 통제한다. 아이들이 날갯짓(자발성)을 잃어버린 것은 결코 그들 잘못만이 아니다.

필자의 둘째 녀석이 배치한 가상의 주차 공간. 무질서해 보이지만 녀석만의 원칙이 있다. 녀석이 말한 것을 종합하여 내린 결과, 각 자동차의 전후 연결 관계와 배열 방향은 그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차들 고유의 특성들로부터 결정된 것이다. 둘째 스스로 온몸으로 부딪친 결과가 그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부모인 나는 녀석의 조력자 구실만 하면 된다.
 필자의 둘째 녀석이 배치한 가상의 주차 공간. 무질서해 보이지만 녀석만의 원칙이 있다. 녀석이 말한 것을 종합하여 내린 결과, 각 자동차의 전후 연결 관계와 배열 방향은 그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차들 고유의 특성들로부터 결정된 것이다. 둘째 스스로 온몸으로 부딪친 결과가 그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부모인 나는 녀석의 조력자 구실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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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학업 역량을 높이려면 아이가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짜 공부가 주는 심각한 폐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가짜 공부는 나 혼자서, 다른 누가 시켜서(현실의 필요에 따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진짜 공부는 더불어 함께, 스스로(자신의 의지에 따라) 하는 것이다.

나 혼자 하는 가짜 공부는 실상 나 자신조차도 살리지 못한다. 나 혼자 공부해서 나 혼자 잘 사는 삶을 과연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누구의 지시에 따라, 그리고 현실의 필요에 따라 하는 것이니 재미도 없다. 이는 분명 극명한 폐해다.

하지만 함께 하는 공부는 나와 너 모두를 살린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함께 살린다. 이 진짜 공부에서는 재미와 흥이 모두 함께 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서로 어깨를 겯고 하는 진짜 공부의 위력이 여기에 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공부에는 때가 없다. 만약 이 말이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공부로써 통제하려는 때뿐이다. 공부에는 때가 없으니 늘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인적 자원'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상품성을 키우는 것이 경쟁력을 높이는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공부가 즐거워야 한다.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아야 한다. 함께 하고 스스로 하는 공부가 절실히 필요한 까닭이다. 제발 우리 모두 진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공부, #학업, #학습, #진짜 공부, #가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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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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