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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금요일

Seattle, Wa

버스 차창 밖으로 사람과 건물이 번뜩번뜩 스쳐지나간다. 중천의 햇볕이 따사로운 가운데 차내는 한산했고 설핏 나른함마저 감돌았다. 며칠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해 자전거 여행을 접어야 했던 좌절의 순간이 뇌리를 스쳤다.

윌슨 아저씨와 작별인사를 하고 만 하루를 달려 시애틀 인근 머킬티오(mukilteo)에 위치한 사촌형 집에 도착한 게 나흘 전이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몸을 이끌고 나는 시애틀 교내로 향하고 있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샘(Sam Baldwin: 톰 행크스)과 그의 아들 조나(Jonah Baldwin: 로스 맬링거 분)가 외롭게 부대끼던 수상가옥이 관심을 잡아 끈 것은 아니었다. 도시의 명물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에 발 도장을 찍으려 함도 아니었다.

한 때 세상을 풍미했던 한 사나이의 흔적을 찾으러 가는 중이었다. 같은 시간을 한 번도 공유한 적은 없지만 이제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일념이 노곤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 멀리 홍콩에서 태평양을 건너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아니 이뤘던 그의 이름은 이소룡.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낯선 이방인은 이소룡을 만나러 간다.
▲ 버스는 달린다.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낯선 이방인은 이소룡을 만나러 간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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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대형을 시작으로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까지 단 5개의 필모그래피만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무술의 아이콘이다.

1959년 4월 29일 이소룡은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쿵푸를 배우면서 말썽이 잦아지자 그의 부모는 시민권이 상실되기 전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고 아들을 종용했던 것이다. 시애틀에서 에디슨 기술 고등학교(Edison Technical School)를 졸업한 그는 1961년 워싱턴 대학교 (University of Washington)에 진학하여 철학, 연극, 심리학 등을 공부한다.

용돈벌이로 시작했던 쿵푸교습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형식에 집착한 전통 쿵푸를 지양했던 그는 보다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자신만의 체계를 만든다. 쿵푸를 바탕으로 권투, 펜싱, 태극권, 유도, 레슬링, 가라테, 무에타이, 사바트, 태권도 등의 요소를 절충시킨 실전 무술이다. 이른바 '절권도'의 시작이었다.

부단한 노력 끝에 전 세계적인 영화스타로 발돋움한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친구이자 대만 여배우였던 베티 팅 페이 (Betty Ting Pei)의 아파트에 들렀다가 두통을 호소한 그에게 팅 페이는 아스피린과 근이완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쿠아제식(Equagesic)이라는 진통제를 건네줬다.

잠이 든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녀는 구급차가 아닌 영화사 대표 레이몬드 초우를 불렀다. 30-40분이 지나 도착한 그가 의사를 불러 10분간 소생을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했고 그제서야 이소룡은 구급차에 실려 퀸 엘리자베스 병원(Queen Elizabeth Hospital)으로 후송된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외상은 전혀 없었다. 이소룡의 나이 겨우 33살이었다. 공식 사인은 이쿠아제식(Equagesic)에 포함된 성분에 대한 과민 반응으로 인한 뇌부종이지만 워낙 건강한 몸이었던 만큼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73년 7월 25일 홍콩에서 장례식이 끝나고 미국으로 옮겨진 그는 7월 31일 시애틀로 돌아와 레이크 뷰 공원묘지 (Lakeview Cemetery) 276번에 안장되었다.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이방인에게 그를 찾아가는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사촌형 집을 나와 113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Ashway park & ride에서 내렸다. 위성도시와 시애틀을 이어주는 노선인 511번으로 환승. 시애틀 downtown에 도착해서 파인 스트리트(pine street)에 하차.

다운타운에서도 묘지까지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경찰관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노란 셔츠 입은 교통 안내원을 기어코 찾아내 길을 물어보니 그 또한 갸우뚱거리며 본부로 연락을 취했다. 결국 capitol hill로 향하는 10번 버스의 종점이 lakeview cemetery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활짝 열린 입구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 레이브뷰 공원묘지 활짝 열린 입구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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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워있는 묘지가 가까워지자 마음은 이상스레 차분해졌다. 버스는 나를 내려주고 반환점을 돌아 사라졌다. 입구에서 숨을 살짝 가다듬었다. 흥분하고 달뜬 마음으로 망자를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닌 듯 했다. 이소룡 키드가 아닌 나를 태평양을 건너 여기까지 오게 만든 뜨거운 열망이 실현될 순간이 다가왔다.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돌바닥으로 된 길 좌우로 수많은 묘비가 즐비했다. 사람들은 이소룡의 묘지 찾기가 쉽다고 했다. 찾는 이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아 싱싱한 꽃들이 마르지 않는다는 그의 안식처.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행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이 오던 방향으로 쭉 따라가 보았다. 오른편으로 몇 명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사내가 다큐멘터리라도 제작하는 양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브루스 리를 잘 아세요?"
"그는 전설이죠.(He's a legend)"

짤막한 대답 하나로 이소룡의 위상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브루스 리(Bruce lee)의 묘비 옆으로는 그의 아들 브랜든 리(Brandon Lee)의 무덤도 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화배우의 길을 걷던 브랜든 리는 1993년 3월 31일 노스캐롤라이나의 세트장에서 영화 <크로우(The Crow)>를 찍던 중 권총 오발 사고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부자의 안타까운 죽음은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이소룡과 그의 아들 브랜든 리의 무덤. 부자의 죽음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
▲ 두 개의 묘비 이소룡과 그의 아들 브랜든 리의 무덤. 부자의 죽음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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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권도의 창시자'라는 짤막한 문구 아래로 또 다른 글귀가 보였다. 당신이 불어넣어준 영감은 우리를 개인적 해방으로 끝없이 이끌어줍니다(Your inspiration continues to guide us toward personal liberation). 이소룡은 틀에 얽매이지 않도록 매번 끝없는 혁신을 강조했었다. 그의 이러한 무도관은 무형(無形)의 형(形)이라는 절권도로 대변된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무술실력보다도 철학적 사유에 기반한다. 이소룡만큼 철학적 깊이를 겸비한 무도가는 흔치 않다.

뒤에 놓인 돌 벤치에는 '남편이자 아버지, 아들이자 오빠. 당신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 린다와 섀넌(Linda and Shannon)'이란 글귀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들의 애달픈 가족사를 잠시 생각해보다가 두 손을 그러모아 합장을 했다. 영화배우보다도 철학자이자 한 명의 무도가였던 사나이에게 바치는 헌사.

서쪽으로 찬찬히 기우는 해를 온 몸으로 맞으며 밖으로 다시 걸어 나갔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는 사람들의 발길이 브루스 리에게로 이어졌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앞으로 좀 더 나아가니 전망이 탁 트인 공터가 나타났다. 아래를 굽어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해진 형체는 없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물을 유난히 좋아했던 이소룡은 항구에 자주 나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다.

내가 도착한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띄엄띄엄, 그러나 끝없이 사람들의 방문은 이어졌다. 이소룡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무술의 아이콘이다.
▲ 사람들의 참배 행렬 내가 도착한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띄엄띄엄, 그러나 끝없이 사람들의 방문은 이어졌다. 이소룡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무술의 아이콘이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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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복무를 마치고 훌쩍 떠난 3개월간의 여행이 끝나간다. 내가 버릴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남길 것은 무엇인지. 이소룡의 인터뷰를 회상하며 난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Empty your mind. Be formless. Shapeless. Like water.
Now, You put water into a cup, it becomes the cup.
You put water into a bottle, it becomes the bottle.
You put in a teapot, it becomes the teapot.
Now, Water can flow, or it can crash. Be water my friend.

마음을 비우게. 형체를 버리게, 물처럼.
물을 컵에 넣으면 컵이 되고,
물을 병에 담으면 병이 되며,
찻주전자에 담으면 또한 그것이 되잖나.
자. 물은 흐를 수도 있지만, 부술 수도 있지.
친구여, 물이 되게!


태그:#미국, #자전거,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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