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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4시, 혜화역 인근에 위치한 카페 벙커1의 지하라운지에 100여 명의 많은 인원이 몰려들었다. 모두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장 하종강 교수의 노동인권 강의를 들으러 모인 사람들이었다.

영하 10도의 매섭도록 추운 날씨에도 이 날 강의는 '한국사회, 노동인권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선 '노동' 얘기만 꺼내도 빨갱이 취급... 해외에서는?

카페 벙커1에서 노동인권 강의 중인 하종강 교수
 카페 벙커1에서 노동인권 강의 중인 하종강 교수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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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수배전단에 '노동자풍'이라고 인상착의를 묘사하고, 나이든 청소노동자 옆을 지나가며 부모가 아이에게 "너희도 공부 열심히 안하면 저런 노동자 된다"고 말했다는 일화. 강의는 그렇게 '노동'과 '노동자'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띄고 있을 정도로 비뚤어진 오늘날 한국의 노동현실을 보여주었다.

이렇듯이 '노동'이라는 말의 의미가 왜곡되고, 사람들이 노동에 관심갖지 않게 된 세태에 대해 하 교수는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교육이 노동을 가르치지 않았음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실제로 자신이 성공회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기초에 '노동자를 인터뷰해올 것'이라는 과제를 냈을 때 학생들이 "어디에 가면 노동자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하고 되물어오곤 했다는 것. 이에 하 교수는 "자신의 가정부터 살펴보라"고 대답해주었다고 한다.

하 교수가 소개한 각각의 일화들은 사뭇 재미있는 유머로도 들렸기에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노동'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지니는 가치가 폄하되어 있는 한국의 씁쓸한 모습을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했다.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한 뒤, 하 교수는 해외에서의 노동인권 관련사례들을 소개했다. 가장 먼저 소개된 것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근무중인 다니엘 부대사관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여론이 파업에 대해 이해심을 보이는 편입니다. 파업권이 필수적인 사회 권리라는 신념이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문제삼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럽의 선진국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랑스에서는, 공무원조차도 '파업'이 적지 않은 재정적 손실을 야기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사례는 미국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한 축인 '작가노조'가 파업을 시작하자, 유명배우들이 이에 지지선언을 하고 시상식에 불참하여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취소되기도 했던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 교수는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불리는 미국조차도 노조의 파업에 이렇게 긍정적인 자세를 보인다"고 덧붙였다.

하 교수는 해외에서 경찰·소방관·판사·고위공무원들도 노조를 결성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지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집회를 열기도 했다. 그 중 학력이 높은 박사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학벌의 차이를 넘어서, 사측으로부터 고용된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군인노조가 결성되면, 군대 내의 성폭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하 교수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군인들도 자신의 권리를 찾아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구타 및 각종 사건·사고들에 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군인노조를 두고 '안보가 중요한 분단국가에서 가능한 일인가'라는 반박에 대해 하 교수는 독일과 같이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은 국가를 포함해 많은 선진국들도 군인노조를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초등학교에서 노사 단체협상을 직접 해보게 하고,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을 수 개월간 배운다는 자료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드러나듯 대다수의 국가들이 어릴적부터 교육을 통해 노동과 노동인권을 체험하게 하고 가르친다는 점은 교육과정에서 노동에 대한 충분한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는 한국의 현실과 비교되는 대목이었다.

노동운동 더 강해져야... 사회적 진보는 멈추지 않아

벙커1에서 강의 중인 하종강 교수.
 벙커1에서 강의 중인 하종강 교수.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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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 안팎으로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 한국의 노동자 10명 중 9명은 연봉 등 노동조건을 교섭권없이 주어진 대로 받는 상태.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 1위·10만 명당 산재 사망자수 1위 등 OECD 30개국 중 최하위권에 속할 정도로 열악한 노동환경. 여러 자료를 통해 드러난 한국의 노동환경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또한 최근 몇년 사이에 기형적으로 늘어난 비정규직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하 교수는 지적했다.

"비정규직의 제도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출산휴가 등으로 잠시 생긴 공백, 혹은 몇 개월의 기간동안 필요한 부서에 정규직을 고용해 연금 등을 보장하긴 쉽지 않지요. 하지만 대한민국은 정규직이 필요한 자리에도 비정규직을 고용했고, 그 규모가 지나치게 불어났어요. 한국의 경제를 위해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진보세력이 아니라 보수적인 IMF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수천 명의 정리해고로 인해 23명의 사망자를 낳은 쌍용차 사태와 한겨울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였다. 두 사건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일화들, 그리고 장기간 농성중인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이 밴드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땐 청중들 중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당선 가능성이 낮은데도 왜 노동자 후보들이 대선에 나왔던 걸까요. 누군가는 이걸(노동문제를) 계속 외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과 후보단일화 과정, 길고 길었던 토론회에서 노동 얘기가 얼마나 나왔습니까? 누가 당선되든,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를 봐야합니다.

세계는 노동단축과 노동인권 향상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우리는 식민·분단·독재의 역사 때문에 수십 년간 미루어져 왔지만, 한국사회도 같은 방향으로 변화중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노동인권과 관련된 이야기를 이렇게 웃으면서 할 수 있게 된 것, 불과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역사의 발전과정이 사회정체성을 규정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진보적 변화는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당해고와 개선되지 않는 현실을 비관한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던 한국의 현실과 노동인권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하는 시간이 되었던 이 날의 강의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훈훈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노동운동이 더 강해지고, 노동조합이 더 많아져야 하며, 대중의 정서가 서서히 변화하기를 바란다는 하 교수의 말과 함께.

노동,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편견이 짙은 대한민국의 현실. 한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인식이 많이 뒤쳐진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역사는 느리지만 천천히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30여 년째 노동운동을 이야기하는 하종강 교수, 그리고 27년만의 기록적인 한파에도 저 차가운 철탑 위에 오른 노동자처럼.


태그:#하종강, #노동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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