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울고 네가 웃는 절망 공장, 이겨서 다시 함께 웃자."유성기업 정문 앞에 내걸린 현수막 글귀가 눈에 쏙 들어왔다. 9일 오후, 정문 안 공장 풍경은 평온해 보였다. 경비실 쪽에서 간간히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선을 정문 앞 도로 쪽으로 돌렸다.
"노조파괴..." "부당노동행위..." "공장을 되찾자..." "투쟁..." 길게 늘어선 현수막이 붉은 깃발과 함께 어지럽게 휘날렸다. 정문을 사이로 풍경은 그렇게 갈렸다.
바람결이 칼칼하다. 깃발을 따라 가던 시선이 마지막 머문 곳은 굴다리 위 난간이다. 농사용 폐비닐과 폐자재를 쌓아놓은 듯 흉흉해 보이는, 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이다.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홍종인 유성기업 지회장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다. 밝은 표정과는 달리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얼굴... 목에는 굵은 밧줄이 무겁게 걸려 있다.
김순석 유성기업 아산부지회장이 밧줄 목걸이에 얽힌 사연을 설명했다.
"용역회사들의 노조파괴 공작으로 여기저기에서 민주노조가 깨졌나갔습니다. 홍 위원장이 목에 건 밧줄은 민주노조를 지키는 마지막 남은 끈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목에 매고 있어요."가장 하고 싶은 일 "걷고 싶다"
7m 위에서 홍 지회장의 몸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한 팔 길이 철재 몇 개에 얹어 있는 나무합판이다. 그 위에 비닐과 하우스용 거적을 덮어 비바람을 피하고 있다. 건물 난간에 얼기설기 지어 놓은 까치집이 연상됐다. 언뜻 보아도 초등학생 한 명이 눕기도 벅찬 공간이다. 다리나 펼 수 있을까?
"구부리고 살아요. 누워서 허공에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만 다리를 펼 수 있어요. 허공에 다리 뻗고, 윗몸 일으키기 하는 게 여기서 할 수 있는 운동이죠."그는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묻는 질문에도 거침없이 "걷고 싶다"고 말했다. 움직이라고 있는 발로 허공만을 딛고 있다. 프랑스 모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몸은 좀 어때요?"처음에는 변비로 고생했는데 지금은 설사를 좀 하고, 소화가 잘 안되네요.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인지 무릎 관절하고 허리가 안 좋아요."
굴다리 난간, 소음-진동-먼지에 비행기까지 연결 상태가 좋지 않은 휴대폰처럼 대화가 중간 중간 끊겼다. 소음 때문이었다. 인근 군비행장으로 헬기와 군수송기가 쉴 새 없이 오갔다. 굴다리 위, 아래를 오가는 대형트럭의 엔진음과 진동도 대화흐름을 끊어 놓았다.
"소음과 진동이 장난 아녜요. 그나마 오늘은 휴일이라 덜한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먼지도 많아요. 날씨 좋은 날은 먼지 터는 게 일이에요."그 사이 적십자 마크를 새긴 군 헬기 한 대가 다시 요동을 치며 지나갔다.
50일 전인 지난 10월 21일. 그는 아내(윤현미·42)에게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며 집을 나섰다. 그 길로 곧장 굴다리 난간 위에 올라갔다. 물론 계획된 일이었다. "붙들고 놔주지 않을 것 같아", "걱정할 까봐"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난해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밤에 잠 좀 자게해 달라며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을 요구했다. 사측은 노사합의를 깨고 공격적 직장폐쇄, 용역을 동원한 폭력, 노조원 구속, 27명의 노동자 해고, 어용노조 설립으로 대응했다.
지난 10월 국회청문회를 통해 이 모든 과정이 사측과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용역업체와 노조파괴를 위한 사전 시나리오에 따른 것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용역업체에게 가해진 제재는 설립인가 취소와 벌금 몇십만 원이 전부였다.
조합원 17명이 구속돼 그 중 2명은 여전히 투옥 중이다. 반면 사용자 측은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대전지법 천안지원과 중앙노동위원회가 최근 각각 '해고는 부당하다'고 판결했지만 복직되지 않고 있다.
현장방문 안 한 박근혜-문재인 후보... "찾아와서 현장 목소리 들어야"농성장을 지키던 한 유성기업 노조원은 "지회장이 유성기업 문제가 대선국면에 파묻히는 걸 막으려 올라갔는데 여전히 언론에는 대선 후보들 얘기만 나오고 후보들도 우리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며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농성현장을 찾은 대선 후보는 이정희, 김순자, 김소연 후보와 심상정 전 예비후보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한 번도 현장에 오지 않았다. 문 후보 측은 그나마 캠프 관계자가 한 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다시 홍 지회장에게 물었다.
- 오늘이 꼭 50일째인데 난간 농성을 하기 전과 달라진 게 있나요?"회사 측, 경찰과 검찰, 고용노동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요. 검찰은 불법노동행위가 명백히 밝혀졌는 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요. 고용노동부는 11월 말까지 사측에 대한 행정제재 등 방안을 밝히겠다고 하더니 눈치만 보고 있어요. 반면 현장 조합원들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현장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 유성기업 문제가 왜 이렇게 악화됐다고 생각하는지요?"MB 정부의 친 자본주의, 친 재벌 정책 때문입니다. MB 정부 성향을 믿고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여기에 경찰과 고용노동부 등 유관기관이 죄다 움직인 겁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단 얘기죠. 지금도 고용노동부가 대선결과를 놓고 움직이려고 눈치만 보고 있다고 봅니다."
- 대선 후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말로만 떠드는 정치공약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해결' 하겠다고 하는데 막연한 얘기는 지금 힘들어 하는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해결책이 안 됩니다. 찾아와서 현장의 고민을 들어야 하고 현장의 요구를 정책으로 담아 발표해야죠. 현안 파악이 급선무라고 생각해요."
- 새해 소망은요?"싸움에서 승리해서 굴다리 아래에서 모두 모여 막걸리 건배를 하고 싶습니다."
농성 전 후 달라진 것은? "현장 조합원... 고용노동부, 검-경은 그대로"농성기간 홍 위원장이 가장 힘들었던 일은 조합원의 자살소식이었다. 지난 5일 유성기업에서 일해오던 50대 노동자가 1년 넘게 우울증을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진 노동자의 현장일기를 보면 업무 복귀 이후 사측이 쇠파이프를 들게 하는 등 구사대 역할을 하도록 강요했다. 노조 관계자들은 '동료들과 맞서야 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너무 가슴이 아파 처음으로 소주 한 병만 올려달라고 했어요. 많이 마시면 안 된다며 반병만 올려주더군요. 힘들었어요. 지금도..." 목소리가 젖어드는가 싶더니 잦아들었다. 그는 "사측 책임자 처벌이 가시화되고 해고자 복직, 어용노조 해산요구가 받아들여지면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인은 기다려온 휴일을 맞아 남편을 위해 손수 음식을 장만해왔다.
"옷가지를 싸달라고 할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마음은 아프지만 워낙 의지가 강한 분이니까 큰 걱정은 안 해요." 굴다리 아래 마련된 농성장에서 남편에게 올려줄 간식꺼리를 챙기며 부인 윤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남편보다는 아들 녀석(13살, 초등학교 6학년) 때문에 짠해요. '아빠를 만나면 울기만 할 것 같다' '그러면 아빠가 약해지지 않겠냐'며 아직까지 보고 싶은 걸 꾹 참고 농성장에 한 번도 안 왔어요."'아빠가 약해질까봐..' 속 깊은 13살 아들
굴다리 아래 천막에는 조합원들이 교대로 대기 중이다. 폭압적인 사측의 탄압과 회유에도 50% 가까운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고 현장과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조합원들의 마음은 충청권 노동자들의 마음까지 하나로 모았다. 충청권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오는 14일 일제히 유성기업 농성노동자를 위한 연대파업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30년 동안 유성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조합원은 "예전에는 생산직과 사무직이 유니폼은 물론 먹는 음식까지 다를 만큼 차별과 모욕이 심했다"며 "하나씩 문제를 풀어오는 동안 조합원들이 단결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선배 노동자들의 희생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14일 검찰과 노동부는 사건 발생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유성기업 사측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압수수색한 자료 속에는 창조컨설팅 관계자와 사측이 인근 염작리 OOO-O 번지에서 수시로 만나 모의를 해왔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자료가 들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네비게이션을 이용해 찾은 모의현장은 과수원 인근 작은 언덕이었다. 먼발치로 유성기업이 내려다 보였다. 그들은 유성기업 현장을 내려다보며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을까.
홍 지회장은 굴다리 위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공장을 내려다 보고 있다. 그가 시민들과 조합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한결같다.
"올라와서 느낀 것은 고마움뿐입니다.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찾아와주시고, 문자를 보내주시고, 전화해주시는 응원이야말로 힘입니다.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