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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설이 남아 있는 방장산 정상 풍경
 잔설이 남아 있는 방장산 정상 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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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무래도 날을 잘 못 잡은 것 같은 걸."
"이렇게 추운 날씨에 비까지 맞으면 감기 걸릴 텐데."

11월 26일 아침, 성남시 분당에서 만난 일행들이 걱정을 한다. 일기예보도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 것이라 했는데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보슬비가 내리고는 있었지만 많은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들은 간편한 비옷을 준비하여 일행의 승용차를 타고 분당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성의 경계지역에 있는 방장산, 지난 몇 년 동안 해마다 몇 개씩의 산림청 지정 전국 100대 명산을 찾았는데 올해 들어 처음으로 시도하는 63번째 명산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날씨는 비가 조금씩 내리거나 개었다 흐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천안을 지나면서 천안 논산 간 고속도로로 옮겨 달렸다. 이어서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백양사 나들목을 빠져 나왔다. 고창방향으로 잠깐 달리자 곧 구불구불 산길이 이어진다.

등산로에 세워져 있는 방장산 등산안내도
 등산로에 세워져 있는 방장산 등산안내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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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굽이를 깊숙이 돌아가는 곳에 방장산 휴양림 입구가 나타났다. 그곳을 지나 다시 조금 더 올라가자 나지막한 고갯마루가 나타났다. 방장산 산행 기점 중의 하나인 '양고살재'로 도로 오른편에 등산 안내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오른편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승용차를 몰고 온 일행은 휴양림에서 산책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산길은 전날 내린 비에 흙과 낙엽이 촉촉이 젖어 있어서 걷는 느낌이 부드럽고 좋았다. 날씨는 흐렸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조금 더 걷자 길가 오른편에 무덤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반월영성정씨지묘(半月靈城丁氏之墓)라 새겨져 있는 비석의 비문이 특이하여 눈길을 붙잡는다. 정씨 중에 반월영성 정씨가 있었던가?

초겨울 산행 낙엽 밑의 얼음판에 미끄러지다

30여분 쯤 오르자 흐리던 날씨가 맑아지며 청명한 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고도가 높아지면서 발바닥의 감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직 햇볕이 들지 않아 응달진 산길의 낙엽 밑에 살얼음이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뒤따르는 일행에게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당탕 사고가 터졌다. 일행 한 사람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어이쿠~ 엉덩이야, 좋던 길이 왜 갑자기 미끄럽게 변한 거야?"

넘어졌던 일행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어설프게 웃는다. 흙바닥에 넘어졌지만 엉덩이가 많이 아픈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다행히 흙길이어서 많이 다친 곳은 없었다. 초겨울 싸늘해진 날씨에 어젯밤 내린 빗물이 살짝 얼어 있어서 산길은 곳곳이 미끄럽고 위험했다.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었다.

비문 내용이 특이한 무덤
 비문 내용이 특이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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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봉에서 바라본 서북쪽 골짜기 풍경
 억새봉에서 바라본 서북쪽 골짜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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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산행에 큰 문제는 없었다. 산그늘이 드리워진 응달지대를 지나 능선길에 접어들자 낙엽밑에 숨어 있던 살얼음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능선길에서 첫 번째 만난 봉우리는 갈미봉으로 특별한 느낌이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다시 조금 더 걷자 문너머재 삼거리다.

문너머재에서 왼쪽 길로 빠지면 고창 공설운동장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앞쪽으로 이어진 길 저 앞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바라보인다. 해발 640미터 벽오봉이다. 약간의 내리막길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선 벽오봉은 사방이 툭 트인 전망 좋은 봉우리였다. 오른편 골짜기는 방장산 휴양림이고 왼편 아래 골짜기 제법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는 작은 시가지가 고창읍이다.

봉우리마다 전망이 끝내주는 아름다운 산

그런데 벽오봉 가까이에 조금 낮지만 더 멋진 봉우리가 있었다. 행글라이더 활공장으로도 이용되는 억새봉이다. 억새봉은 그 이름처럼 주변이 온통 억새밭이었는데 잔디와 억새가 초겨울바람에 색이 변하여 온통 연노랑색이었다. 억새봉이라 쓰여 있는 표지 말뚝 옆에 서있는 주먹을 불끈 쥔 은빛 팔뚝모형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억새봉에서 바라본 전망도 일품이었다. 산 아래 그리 넓지 않은 평야에 펼쳐져 있는 짙푸른 작은 호수, 정겨운 들녘풍경과 함께 비 그친 하늘에 두둥실 흘러가는 겨울 뭉게구름이 한 폭의 멋진 그림처럼 아름답다.

"어~ 춥다 추워, 바람이 굉장히 거세졌는 걸!"

거센 바람에 벗겨져 휙 날려간 모자를 주우며 일행이 어깨를 움츠린다. 정말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낙엽이 져버려 앙상한 나무숲을 할퀴는 초겨울 바람소리가 악마의 절규처럼 소름이 돋게 한다. 능선을 타고 약간 내려섰다가 522봉에 올랐다.

억새봉에 오른 일행들과 주먹을 불끈 쥔 특이한 모양의 조형물
 억새봉에 오른 일행들과 주먹을 불끈 쥔 특이한 모양의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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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바라보이는 산이 방장산
 저 멀리 바라보이는 산이 방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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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부터는 내리막길이 고창고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능선길은 여전히 바람소리가 스산했다. 고창고개는 장성군지역인 휴양림에서 고창군지역인 용추폭포로 연결되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다. 고갯마루엔 텅 빈 벤치에 낙엽 몇 개가 나뒹굴 뿐 역시 쓸쓸한 풍경이다. 서북쪽에 방장산이 솟아 있고 쓰리봉과 갈재로 능선길이 이어지고 있다.

고창고개에서 잠깐 쉬었다가 정상을 향하여 다시 길을 나섰다. 계속 오르막길이다. 경사가 완만한 능선길에 접어들자 커다란 장애물 하나가 길을 가로막는다. 나무줄기 중간이 뚝 부러진 거목이 산길을 가로질러 길게 누워 있었다. 이곳에 언제 이렇게 세찬 바람이 몰아쳤을까? 나뭇가지 끝엔 아직 푸른색의 잎이 몇 개인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정상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거센 바람에 줄기가 뚝 꺾여 길을 가로막고 쓰러진 커다란 나무들을 몇 그루나 더 만났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고도가 다시 높아지자 중간에 여기저기 하얀 잔설이 남아 있다. 길바닥 낙엽 밑에 숨어 있던 살얼음도 발길을 더디게 했다. 우리 일행들이 지나쳐온 동쪽을 향해 만들어 놓은 전망대를 지나 급경사 길을 조금 오르자 정상이다.

줄기가 뚝 부러져 산길을 가로막은 나무
 줄기가 뚝 부러져 산길을 가로막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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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가 부러진 편백나무 두 그루가 산길을 막고 있다
 줄기가 부러진 편백나무 두 그루가 산길을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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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이래야 해발 743미터, 그리 크지 않은 바위 몇 개가 모여 있는 곳에 정상 표지석 하나가 덜렁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주변에는 아직 하얀 잔설이 남아 있었다. 하늘은 더욱 맑아지고 바람은 여전히 쌩쌩 몰아치고 있었다.

"저어기 드넓은 들녘 건너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들이 아마 부안의 변산이겠지?"

그럴 것이다. 일행의 손 끝 방향으로 하늘과 맞닿은 산들의 연봉이 바로 서해의 바람을 막아 병풍처럼 둘러선 변산이 분명한 것 같았다. 서쪽 방향으로 능선이 이어져 가까이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봉수대, 그 다음 멀리 바라보이는 봉우리가 아주 특이한 이름의 쓰리봉일 것이다.

방장산은 전남 장성군읍지에 "반등산은 북이면에 있고 노령에서 유래하며 고창과의 경계를 이룬다. 일명 방장산이라고 한다. 고부의 두승산(영주산), 부안의 변산(봉래산)과 더불어 삼신산이라 한다. 산줄기는 남으로 영광의 불갑사와 무안의 승달산까지 달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남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을 독점 산행하다

방장산의 본래 이름은 반등산이었다. 그래서 해동지도에도 '반등산'이 노령과 함께 나타난다. 대동여지도에도 반등산으로 표기되었고 1872년에 편찬된 지방지도에도 반등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제 가요 '방등산가'의 무대이기도 하며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조선 시대까지의 이름은 방등산이었다. '방정하고 평등하다'라는 뜻을 가진 '방등'이라는 불교 용어다. 조선 인조 때 중국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과 닮았다하여 현재 지명으로 바뀌었다.

저 봉우리가 봉수대와 쓰리봉
 저 봉우리가 봉수대와 쓰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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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림의 편백나무
 휴양림의 편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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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춥다, 이제 그만 내려가지?"

정말 추웠다. 기온은 그리 낮지 않았지만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이었다. 서둘러 하산길로 나섰다. 목표지점은 장성군 북이면에 있는 방장산 휴양림, 일행 한 사람이 그곳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네, 산에서 다른 등산객을 단 한 사람도 못 만났잖아?"
"어~ 정말 그랬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우리들이 이 방장산을 몽땅 독점했구먼, 그래"

일행들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3시간이 넘도록 산행을 했는데 다른 등산객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다니, 지금까지 십여 년간 매주 한 번씩은 산행을 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정말 이 날은 우리 일행들이 산림청 지정 전국 100대 명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을 독점 산행한 특별한 날이었다.

다시 고창고개로 내려와 휴양림에 이르는 구간에서도 다른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휴양림에는 잎이 져버려 앙상한 대부분의 나무들 중에 푸른 잎이 청청한 편백나무들이 초겨울 휴양림의 삭막한 풍경을 조금은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었다. 휴양림 산책을 하며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일행과 합류한 우리는 다음 날 팔영산 산행을 위해 전남 고흥으로 달렸다.


태그:#방장산, #벽오봉, #억새봉, #고창고개, #휴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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