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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일부인 고비사막 트루판 지역.
 실크로드의 일부인 고비사막 트루판 지역.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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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하면 얼핏 고대 중국에서 저 멀리 로마까지 상인들이 비단을 싣고 오간 길로 이해하기 쉽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크로드는 사실 매우 다양한 정의가 가능한 다중적 개념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넓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아시아 및 아프리카를 서로 연결하는 동서 교통로에 대한 총칭적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실크로드는 크게 세 가지 길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우선 전통적인 실크로드 개념으로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말한다. 이것은 100년 전 실크로드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에서 시작한 것인데 처음에는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트란스옥시아나와 서북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 후 점점 확대되어 중국에서 시리아로 확대되었고, 동방에서는 한국과 일본으로, 그리고 서방으로는 로마까지 확대되었다. 이들 길은 주로 동서로 펼쳐진 여러 사막에 점재한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길이므로 일명 오아시스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 번째 실크로드 개념은 고대 유라시아 초원로를 말한다. 이것은 고대 오아시스 실크로드가 생기기 전에 동서양의 문명 통로로서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을 의미한다. 고대 유목민들은 역사시대를 전후로 유럽의 발트해에서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아랄해를 지나 카자흐스탄과 알타이 산맥, 그리고 몽고의 고비사막 더 나아가는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교류를 했는데, 이때 사용된 것이 초원로이다.

세 번째 실크로드 개념은 바닷길로서의 실크로드이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지중해에서 홍해와 아라비아해를 지나 인도양과 서태평양에 이르는 해상에서 교류를 진행해 왔다. 바로 이 길이 또 하나의 해상 실크로드라는 것이다.

오아시스 실크로드의 정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기원후 1세기경의 실크로드, 특히 굵은 붉은 선을 보라. 이것이 오아시스 실크로도다.
 기원후 1세기경의 실크로드, 특히 굵은 붉은 선을 보라. 이것이 오아시스 실크로도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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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글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물론 전통적 개념으로서의 실크로드, 즉 오아시스 실크로드이다. 이것을 위해 나는 열흘간 땀을 뻘뻘 흘리며 2800킬로미터를 차로, 기차로 다녀보았던 것이다.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겉그림.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겉그림.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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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아시스 실크로드의 정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연구를 하였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참고해야 할 것이나 (정수일 교수의 <고대문명교류사>를 참고하시라) 여기에서는 실크로드가 처음 개척된 한나라 시대와 실크로드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당나라 시대를 기준으로 그 경로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 경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한 및 후한 시절, 그리고 당나라의 사서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고 중국의 고대 지명을 연구해야 한다. 정수일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전한 시절에는 돈황을 기준으로 북로와 남로가 개척되어 있었다고 한다. 남도는 돈황의 옥문관이나 양관으로부터 선선을 거쳐 곤륜산맥 북쪽을 따라 서행하여 사차(아르칸드)에 이르는 길이고, 북도는 옥문관이나 양관을 출발하여 투르판을 지나 천산(텐샨)산맥 남쪽 기슭을 따라 소륵(카슈가르)에 이르는 길이었다.

후한 시대에는 이 두 길에 새 길이 나타나는데 이 길은 옥문관으로부터 출발하여 서북행해 횡갱을 지나 삼롱사나 용퇴 지역을 피해 오선의 북쪽으로 빠져서 고창에 도착하는 길로 구자(쿠차)에서 종전의 북도와 만났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후한 시대에 오면 3개의 길이 형성된다. 전한 시대의 남도와 북도는 남도와 중도로, 그리고 위의 새 길은 북도로 명명된다. 이들 세 개의 길은 그 후 7~8세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 그러나 이들 길은 노선 주변의 정세 변화에 따라 노선의 존폐, 단축이나 연장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당대에 이르면 중동과 페르시아에 이슬람 문화권이 형성되고 전례 없는 문화 교류가 일어나면서 동서 교통로도 안정적으로 고착되는 경향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 오아시스로는 대체로 남로와 북로로 대별되는 상황에 이른다. 이때의 북로는 장안(시안)에서 출발하여 돈황으로 연결되고 여기에서 남로와 분기되면서 이오(하미), 고창(투루판), 언기, 구자(쿠차)를 지나 소륵(카슈가르)에 이르러 파미르 고원을 넘어 타슈켄트, 사마르칸드, 부하라, 멜브, 니샤부르, 라가에(테헤란), 에르반, 콘스탄티노플을 지나 로마에 이르는 길이 된다.

남로는 돈황에서 북로와 분기하여 누란, 우기를 지나 피산에서 서남진해 인더스강 상류를 따라 서행하다가 카불, 칸디하르, 케르만, 바그다드, 팔미라, 베이루트에 도착해 지중해 동남안을 따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닿는 길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를 떠나 북경까지 온 여정.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를 떠나 북경까지 온 여정.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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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개념과 관련하여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떻게 이용되었느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것은 주로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부수적으로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즉, 실크로드는 상인들의 교통로로 주로 사용되었고 부수적으로는 승려 등 지식인들의 문화 교통로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실크로드를 여행하였다고 하여 그 모든 이용자들이 서안에서 중앙아시아 혹은 로마로 여행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인의 경우는 점 점의 오아시스를 구간 삼아 한 구간 혹은 두 구간을 간 것이 대부분이었으리라. 먼 구간을 가는 경우 이익은 더 많았을 것이나 그에 비례하여 위험도 더 컸을 것이다.

지식인의 경우 간간이 먼 구간의 실크로드를 여행한 경우가 있었다. 현장이나 혜초 스님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수년간에 걸쳐 실크로드를 이용, 인도 등지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서양 사람으로는 위에서 본 대로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에 도착할 때 실크로드를 타고 온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2800킬로미터 대장정에 나서다

내가 경험한 실크로드는 이 분야 전문가들이 보면 한 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그저 10일 정도의 여행을 하고 나서 실크로드를 밟아 보았다고 말한다는 것이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 나도 그것은 안다. 하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제대로 경험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1-3)> 겉그림. 환갑이 넘은 나이에 베르나르는 1만2천킬로미터 대장정 실크로드를 완주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1-3)> 겉그림. 환갑이 넘은 나이에 베르나르는 1만2천킬로미터 대장정 실크로드를 완주했다.
ⓒ 효형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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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베르나르 올리비에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이 사람이 쓴 <나는 걷는다(1-3>의 책을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사람은 전직 언론인으로서 나이 60이 넘어서 실크로도에 도전한다. 그것도 이스탄불을 기점으로 중국 서안까지 장장 1만2천킬로미터의 대장정에 말이다. 더군다나 그는 이것을 전부 걸어서 가기로 결심한다.

4년간에 걸쳐 구간을 나누어 한 번에 3~4개월간 혼자서 걷는 담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의 이 탐험은 1999년부터 시작되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그 먼 길을 혼자서 묵묵히 걸어갔다.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정을 쌓으면서 마침내 그는 시안에 도착한다. 그가 실크로드 탐험을 하면서 쓴 이 책을 읽다 보면 1300년 전 이 길을 타고 천축국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혜초를 그릴 수 있다. 나도 이 책을 통해 실크로드를 걷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나 같은 범인은 이런 계획도, 실행도 할 수 없다. 그게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한계다. 그럼에도 베르나르가 경험한 그 한 구간만이라도, 그가 느낀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느끼고 싶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나의 실크로드 여행이었다. 독자제현도 충분히 공감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실크로드 여행은 2010년 7월 15일 출발하여 9박 10일간 일정이었다. 7월 15일 서안에 도착하여 대안탑을 돌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 후 천수, 난주, 가욕관, 돈황, 하미, 선선, 트루판, 우루무치에 도달하고 마지막에는 다시 서안으로 복귀하여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이 코스에서 중요한 것은 서안에서 우루무치 구간 2800킬로미터 전 구간을 육로로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열흘간의 일정으로 그 장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예상도 했지만 원래 실크로드를 여행한다는 것이 모험과 땀을 수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 여정을 선택하였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내가 경험한 실크로드 여행의 핵심 포인트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불교문화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제일은 석굴문화이다. 불교문화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인도식 석굴문화도 함께 전파되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중국의 4대 석굴이라고 불리는 돈황 막고굴과 천수의 맥적산 천불동을 둘러보았고, 그 외에도 난주 병령사 석굴, 돈황 근처 과주의 유림석굴,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천불동까지 볼 기회를 가졌다. 석굴 이외에도 몇 개의 불교문화 관련 유적을 돌아보았는데 서안의 대안탑, 난주의 백탑산 공원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둘째는 고대 중국의 찬란한 역사를 짚어보는 것이었다. 서안의 병마용과 화청지, 그리고 서안의 명대성벽이 그것들이었다. 비록 서역의 역사에서 중국의 역사로 편입된 것이기는 하였지만 투루판의 교하고성과 고창고성도 역사 탐방의 주요 항목이었다.

셋째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는 것이었다. 병령사 석굴에서의 황하와 산세 절경, 돈황의 명사산과 월아천, 선선의 투무타크 사막의 일출, 우루무치의 천산천지 등이 그것들이다.

넷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가 있는데, 실크로드의 그 험난함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었다.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육로 2800킬로미터를 직접 접하면서 2천 년 전 실크로드를 여행한 여행자들의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아보는 것이었다. 돈황에서 하미까지 430킬로미터의 고비, 화주라 불리는 투루판의 50도 기온은 안락한 자동차와 시원한 에어컨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극한 체험과 다름이 없었다.


태그:#세계문명기행, #실크로드 문영, #실크로드, #불교문명, #나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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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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