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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뚫을 듯이 쭉쭉 뻗어오른 도시의 전면
 하늘을 뚫을 듯이 쭉쭉 뻗어오른 도시의 전면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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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보기 싫은 인간은 안 보고 살자. 이런 정책을 꽤나 오랫동안 유지해 온 내가, 정말정말 보고 싶지 않았던 인간을 만나고 말았다. 서울 하고도 신사동에서였다. 서울이 싫다고, 서울시민 노릇 그만한다고 시골로 내려와서 촌놈을 자임하고 다녔던 내가 왜 느닷없이 서울을 갔던가는, 말이 길어질 테니 생략하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자면, 그는 나보다 여섯 살이 아래였다.

내가 아직 이십대 청춘이던 시절에, 나를 형, 형, 하던 그 녀석이 어느 하루 웬 여인을 내 자취방으로 데려왔다. 자신의 먼 친척 누나라고 했다. 자기가 생각해보니 그 누나와 내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그래서 그 누나라는 여인을 설득해서 데려왔다는 거였다. 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인가 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글쎄, 뭐랄까, 이게 웬 자다가 얻은 떡이냐 하는 뭐 그런 심사인 채로 그녀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니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다. 요컨대 내 마음이 그녀에게로 쏙 빠져든 경우까지는 아니라 해도, 어쨌든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던 무렵에 폭탄을 맞은 것처럼 알아버렸다. 중간 과정 생략하고 바로 얘기를 하자면, 여자가 연상인 커플이 매우 드물던 시절이 낳은 시금텁털한 풍경화였다.

내 뒤통수를 때려도 너무 때린 놈

그랬다. 그녀는 자기가 곧 결혼을 한다는 발언으로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기보다는 나를 완전히 시궁창에 빠뜨려 버렸다. 시궁창에 빠진 나는 그로부터 일 년여가 지난 뒤에 그 내막을 알았다. 그녀를 내 자취방으로 데려왔던 '그놈', '그놈'이 그녀의 남편으로 공식 등록이 되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알았을 때, 그때 나는 아하 그래서 그랬었구나 하고 그동안 있었던 석연찮은 일들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다는 마음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놈'과 더불어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녀와 만날 때면 꼭 '그놈'이 나타나곤 했었다. 그러고는 둘이서만 소곤소곤 열심히 이야기꽃을 피워대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극심한 소외감으로 괴로워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 둘이서 이심전심으로 나를 들러리로 이용해 왔던 것이다. 나를 만난다는 핑계로 둘이서 만나 정을 쌓다가 마침내 만리장성까지 쌓아버렸다는 얘기였다. 내가 어찌 그런 인간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에 이 우주 공간 어딘가에 신이 계시다면 '그놈'과 내가 얼굴을 마주하는 불행만은 제발 피하게 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세월이었다고 해도 뭐 그리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나의 그런 염원 덕분이었는지, 다행히도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부딪히지는 않았다. 그랬는데 그날 신사동 그 거리에서 이상한 기시감에 뒤를 돌아보고, 그러고는 어? 어? '그놈'도 어? 나도 어? 그렇게 어 소리만 몇 번을 반복하다가 어쩔 수 없이 악수를 하고 말았다.

침을 뱉지는 않았다. 나쁜놈,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구나 어쩌고 그런 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아무도 사진을 찍어주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나나 저나 웃음 아닌 웃음을 만면에 흘린 채로 지나가는 옆엣 사람이나 괜히 쳐다보며 어서 빨리 헤어지는 구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놈'이 느닷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근데 형, 아무래도 유신이 부활할 것 같은 조짐이지 않아요?"
"유신?"
"만약에 부활한다면 엠비의 경험도 있고 하니 훨씬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굴일 텐데 말이에요. 천막당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단 말이거든. 온 몸을 명품으로 처바른 사람이 면도날로 한 군데 짝 찢어놓고 쭈그리고 앉아서 추워요, 하는 뭐 그런 꼴이었잖아. 응?"

녀석의 그 한마디가 내 감정을 확 바꿔놓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얘가 지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머릿속으로는 그런 힐문을 하면서도 내 가슴은 이미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그랬다. 어서 빨리 헤어질 생각만 하고 있었던 나는 순간적으로 기막힌 제안을 하고 말았다.

"야, 너 보니까 교보 옆의 삼치구이 백반이 생각난다. 피맛골의 막걸리도."
"아이 형, 형은 지금도 피마를 피맛이라고 하는구나?"
"피마(避馬)가 있었기에 피맛이 있는 거지 뭘. 어쨌든 그쪽에 삼치구이 백반이나 먹으러 가지?"

시간은 오후 두 시 즈음이었다. 그때까지 점심을 안 먹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나는 아직 안 먹고 있었고, 녀석도 당연히 안 먹었거나 설령 먹었다 해도 나를 따라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앞장을 섰다.

나도 모르게 던진 기막힌 제안

왕조 시대에 말탄 세도가들이 지나가면 백성들은 모조리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나. 그래서 그것이 싫은 사람들이 뒷골목으로 피해 다녔는데 그 골목이 번성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왕조 시대에 말탄 세도가들이 지나가면 백성들은 모조리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나. 그래서 그것이 싫은 사람들이 뒷골목으로 피해 다녔는데 그 골목이 번성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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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돈이 흔하게 돌아다니는데도 돈이 없다고 야단들이지만, 그때는 정말로 돈이 귀해서 마음고생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책을 한 권 사는데도 신중에 아주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때문에 책을 돈 주고 사기보다는 책방에 선 채로 한 권을 다 읽어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종로서적에서 절반을 읽고, 나머지 절반은 교보문고에서 읽는 식이었다.

그렇게 너댓 시간 정도를 탁한 공기 속에서 의식을 집중하다가 밖으로 나오면 머리가 핑핑 돌고 뱃속에서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골목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연탄가스 냄새, 연탄가스 냄새보다 더 짙은 삼치나 혹은 고등어가 익어가는 냄새. 그 냄새를 어찌 그냥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살 돈은 없어도, 삼치구이 백반 하나 먹을 정도의 돈은 주머니 어딘가에 반드시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허기를 채우고 나면, 신기하게도 발걸음이 저절로 피맛골로 향하곤 했다.

가격이 너무나도 싸서 장사를 한다기보다는 차라리 빈민구제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드는 그 골목의 막걸리와, 서툰 노랫소리와, 온갖 내용의 낙서와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풍성한 수다를 기억하고 있는 내 몸이 자동적으로 그 골목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 골목에는 유난히도 글쟁이들이 많았다. 신문사 기자들이거나 소설가 혹은 시인들, 그들의 비분강개하는 소리를 귀동냥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을 읽었다. 그리고 약간의 세월이 흘러, 불법이란 이름으로도 막을 수 없는 데모의 시절이 왔을 때 그 미로와도 같은 골목은 백골단이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그 시절의 그런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새기는 방식으로 우리는 서로가 변죽을 울리며 전철 안에서의 어색함을 견뎌내고 있었다. 잘 사냐? 아이는 몇이나? 넌 지금도 그녀를 누나로 모시냐, 아니면 아내로 학대하냐? 등등 오만 잡동사니 질문이 입안을 맴돌고 있었지만 한 마디도 꺼내지는 못했다. 아 그래, 이런 질문은 역시 밥상 앞에서 하는 게 좋겠다, 하는 식으로 핑곗거리를 찾는 데나 몰두하고 있었다. 삼치구이나 고등어구이를 앞에 놓고, 연기나 혹은 김이 솔솔 피어나는 밥상 앞에서 옛날 얘기를 늘어놓다 보면 그 얘기도 자동적으로 솔솔 나와 주겠지, 하는 믿음이었달까, 하여튼 뭐 그랬다.

어, 골목이 사라졌다

종로의 환전소 간판
 종로의 환전소 간판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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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삼치구이가 없었다. 고등어구이도 없었다. 연탄화덕도 없었다. 골목 자체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뭔가 엄청난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표식으로서의 펜스가 도처에 설치돼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종로거리에 발을 디뎌본 지도 벌써 칠팔 년 전이었다. 나는 촌놈이 되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 녀석은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종로 뒷골목이 확 변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아이 형, 난 서울 사람 아니에요. 수원 시민이라니깐."
"아, 그러냐. 그래도 그렇지, 수원이나 서울이나 뭐."

어쨌든 삼치구이백반 집을 찾아야 했다. 어딘가에 하나쯤은 남아 있을 거라는 믿음마저 포기해야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골목을 돌고, 또 돌고, 다시 돌고 하다가 왔던 대로 다시 나오기를 몇 번이나 했다. 그러다가 결국 피맛골로 들어서고 말았다. 삼치구이는 아직 냄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막걸리부터 마셔야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피맛골도 예전의 그 피맛골이 아니었다. 태반이 사라지고 없었고, 있다 해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곳 역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육중한 펜스가 하늘 높이 버티고 서서 접근금지, 하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내  다리를 치료해 주었던 아줌마의 얼굴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보상금을 받아서 그 돈으로 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재개발로 정든 곳을 떠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지금쯤 돈을 다 까먹고 빈민이 되었을까.

최루탄 직격탄을 맞아서 다리가 피로 흥건이 젖었는데도 나는 그때 병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병원 근처에는 이미 사복이 쫙 깔렸다는, 몸에서 최루탄 냄새가 풍기는 환자는 무조건 연행해 간다는 소문이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병원에 납부해야 할 비용이 무서워서였다. 공사장 잡부의 하루 일당이 이천삼백 원이었다. 병원은 일단 들어갔다 하면 몇천 원이 기본이었다.

지금이야 물론 그런 터무니없는 임금체계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지만, 어쨌든 그 무렵에 내 청춘을 하루 이천삼백 원씩에 매입해 간 자본가들은 지금 재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재벌들이 삼치구이백반 집을 없애고 또 하나의 새로운 사업체를 벌이고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빗방울이 돋고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 우산을 준비했는지 일제히 우산을 펴 들고 있었다. 우리는 빗방울 속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은 죄(?)가 많은 후배 녀석은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올 뿐 그만 돌아가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안부를 묻지 못했다. 삼치구이 냄새를 느끼기 전에는 아무 말도 묻지 않겠다는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종로를 벗어나 인사동으로

'도우미 항상 대기'라는 내용의 부제가 훨씬 크게 부각된 노래방 간판을 배경으로 그가 담배를 꺼내 들었다. 나도 하나 줘, 중얼거리며 나는 라이터를 꺼냈다. 불이 켜지지 않았다. 어린 번갯불처럼 틱틱 몇 번 섬광을 내다가 그마저도 그만두고 있었다. 라이터돌이 빠져버린 것이다.

 "라이터는 옛날의 불티나가 좋았는데 말이에요."
 "이것도 불티나여, 그런데 옛날의 그 불티나는 아니겠제?"

우리는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를 손에 든 채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수많은 간판 중에서도 유난히 낯선, 새로운 내용의 간판들이 가끔 내 시선을 끌었다. 옛날 명동에서 보았던, 아주 작은 판자대기에 '달러 삽니다'하고 써서 골목에 마치 수줍다는 듯이 붙여놓았던 환전 간판과는 완전히 다른 환전소 간판들이 도처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 서울은 바야흐로 국제도시가 되었구나.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우리는 종로를 벗어나서 인사동으로 들어섰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는 삼치구이를 포기하고 있었다. '짜장면 전문'이라는 간판을 보는 순간 후배 녀석이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삼치구이가 아닌 짜장면으로 일단 허기를 채우고 말았다. 돌아서기도 어려울 정도로 비좁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밖으로 나오는데 녀석이 정색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형, 저기 미안한데 있지. 오늘이 사실은 케이크를 사 들고 들어가야 하는 날이거든."
"케이크? 아, 케이크."

누구의 생일이었구나. 지가 지 생일을 축하한다고 할 녀석은 아니겠고, 아내? 아이들? 아내는 그때의 그녀가 맞냐? 어쩌고 등등 의문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지만 한마디도 묻지는 못했다. 녀석의 표정으로 짐작컨대 내 의문이 결국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나 가슴에 얹어둔 채로 나는 녀석과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콧등을 거쳐 턱으로 내려갔다. 그때 문득 꼼장어가 생각났다.

꼼장어 아닌 사주, 궁합에서 희망 찾는 서울사람들

화려한 도시의 남루한 뒷골목. 예전에는 그나마 서민들이 즐겨 찾았지만, 이제는 그런 발길조차도 끊어졌나보다.
 화려한 도시의 남루한 뒷골목. 예전에는 그나마 서민들이 즐겨 찾았지만, 이제는 그런 발길조차도 끊어졌나보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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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장어가 있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자. 이 문장이 무슨 지상의 명령처럼 엄숙하게 나를 휘어잡았다. 평소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다가도 연탄불에 올려놓으면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꼼장어. 이 꼼장어를 대단한 이미지로 내게 각인시켜 준 사람이 아마 김승옥이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었던가? 어쨌든 꼼장어가 있는 포장마차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인지, 내 코와 눈이 기능을 정지해 버린 까닭인지 알 수는 없지만 꼼장어가 있는 포장마차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수, 사주, 궁합, 그런 등등이 적힌 점집은 도처에 있었다. 아, 요즘의 서울 사람들은 꼼장어가 아닌 신수와 사주, 궁합에서 희망을 찾는가보구나, 그런 생각이나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서 있는데 문득 내가 버림받은 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꼼장어도 그만 잊고 돌아가기로 했다.

술 한잔 걸치지 못한, 더할나위 없이 맹숭맹숭한 기분인 채로 전차에 올랐다. 도대체 내가 오늘 몇 시간을 걸어다닌 거야? 피곤했다. 피곤한 눈을 가물가물하며 스마트폰에 취해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을 보았다.

검찰은 당신을 지켜드립니다.

어? 저게 뭐지? 글자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마치 기러기들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글자가 사라진 화면이 파란 채로 한참을 있더니 검찰, 이 두 글자가 새로이 떴다. 뜬 채로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라져 갔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 뜻을 이해했다. 아, 검찰도 광고를 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뭔가 자신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켕기는 데가 많아서? 어쨌든 서울에 와서 이것을 알았으니 큰 소득이랄 수 있겠다.


태그:#서울구경, #촌놈, #피마골, #삼치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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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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