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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6시 우리는 이번 탐사의 마지막 여정인 라시트를 향해 달렸다. 이란의 아침 교통체증을 생각해 미명에 테헤란을 빠져나간 것이다. 라시트는 테헤란에서 북쪽으로 약 3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카스피해 연안의 도시로 길란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한양대학교 문화재 연구소의 고고학팀이 지난 2년간 이 구석기 시대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곳을 이번 탐사에 넣은 것은 구석기 시대 유적을 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우선은 카스피해를 보기 위함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 바다이자 호수로 한반도의 2배에 가까운 이곳을 보지 않고 이란을 떠나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카스피해, 바다인가 호수인가

망망대해 보통의 바다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카스피해.
 망망대해 보통의 바다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카스피해.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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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나왔으니 카스피해가 바다인지 호수인지는 아직 답이 없다. 원래 바다란 염수이면서 대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고전적 정의이다. 이에 반해 호수는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여야 하며 물은 담수여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카스피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카스피해는 사면이 육지로는 둘러싸여 있지만 그 물은 염수이며, 그 크기는 보통의 호수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다. 이곳은 원래 지질학적으로 지중해나 흑해와 같이 모두 바다였던 것이 수백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인해 아프리카 판넬이 유라시아의 판넬을 미는 과정에서 생긴 단절된 바다이다.

그리고 카스피해는 주변 국가 간 이해관계의 집적지다. 현재 카스피해와 관련이 있는 나라는 모두 5개국(러시아,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인데 이곳에 묻혀 있는 다량의 석유자원을 비롯한 광물자원으로 인해 양보 없는 경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곳을 바다로 보느냐 호수로 보느냐에 따라 국가적 이익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그런 이유로 관련국들은 현재 카스피해 협력기구(Caspian Cooperation Organization)를 만들었지만 아직 그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카스피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탐사의 의미는 있으리라.

카스피해를 가는 또 다른 의미는 이곳이 알브로즈 산맥 이남의 이란 내륙 문명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직접 느껴보는 데 있다. 불과 산 하나의 차이로 문명권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곳을 통해서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를 실은 차는 테헤란 북방 15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고도 카즈빈을 통과하자 엘브로즈 산맥을 본격적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지세는 과연 이란 고원에서 바로 카스피해로 내려가는 국면이다. 이란 고원이 기본적으로 해발 1500여 미터라면 라시트는 해발 0에 가깝다. 그리고 이곳은 바다 근처라 연중 비가 많이 내린다.

이란고원의 고온건조 기후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가는 2월 8일도 한겨울의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스피해가 가까울수록 주변의 산세와 지형은 우리의 산천과 다르지 않았다. 주변의 논밭과 집들의 모양마저도 비슷하여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라시트 시내에 들어서자 우선 보이는 것이 자메모스크다. 그런데 이 모스크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두 개의 미나렛이 있고 돔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언뜻 보아도 이곳이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 아님은 알 수 있다.

그저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에 불과하다는 인상이 든다. 게다가 이 모스크 주변에는 특별히 바자르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특별히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늘이 많고 연중 비가 많이 내리는데 모스크와 바자를 통해 그늘을 만들 필요가 없을 터이니 이란 고원의 그 많은 모스크와는 다른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이어 우리는 몇 곳을 둘러보았다. 라시트 시내에서 30여 분 떨어진 카스피해의 항구도시인 반다르 안잘리에서는 이슬람 혁명 후 군사박물관으로 변해 버린 팔레비 왕조의 첫 왕이었던 레자 팔레비의 여름 휴양 궁전을 관람하였다. 제대로 관리가 안 되어 궁전은 많이 쇠락하였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란의 근현대사에서 쓰였던 각종 무기가 진열되었고 군인 시절 레자 팔레비의 군복도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팔레비 왕가의 사치에 대해 여러 번 들어 온 우리로서는 의외의 검박한 궁전 풍경에 오히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테헤란의 팔레비 궁전에서도 예상 외의 검소함에 놀랐는데 여기에서도 그러니 팔레비 왕가의 사치스러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듯하다. 군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우리는 근처 해안가로 나가 대망의 카스피해를 눈으로 확인하였다. 궂은 날씨라 저 멀리 수평선은 선명하지 못했지만 그저 큰 바다를 보는 듯했다. 바다는 그저 바다였다. 카스피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양곰"을 외치다

안잘리의 7일장, 옷을 파는 아저씨의 모습은 우리나라 장터에서 보는 아저씨, 그 모습이다.
 안잘리의 7일장, 옷을 파는 아저씨의 모습은 우리나라 장터에서 보는 아저씨, 그 모습이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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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으며 7일장이 선다는 안잘리 시장에 가 보았다. 마치 우리나라의 재래식 시장을 보는 듯하였다. 우리가 지나가자 신기한 듯 대뜸 '야폰'을 외친다. 일본에서 왔느냐이다. 이에 우리는 '양곰'이라 답했다. 이는 최근 인기리에 상영된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장금'의 이곳 발음이다. 곧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뜻이다. 당시 대장금은 이곳에서 무려 시청률 90%의 초유의 인기를 누린 드라마라고 한다. 한류의 열풍이 이곳 이란에도 강하게 불어 닥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란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대장금> 아랍 현지 홍보용 브로슈어.
 이란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대장금> 아랍 현지 홍보용 브로슈어.

하나의 문화 상품이 이렇게 강렬하게 전혀 다른 이질의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양곰'의 주인공인 이영애를 한 번 보는 것이 이들의 꿈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이들의 꿈을 아는지, 한 번쯤 이들의 소원을 적극 고려하는 것이 어떨는지.

한 가지 라시트 지역을 들면서 의문이 들었다. 어디를 가보아도 이란 고원에서 보아온 대형의 역사적 기념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이곳이 여러 나라와의 각축장이었을 터이니 그런 역사적 유적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를 곧 바꾸고 말았다. 그것은 문명사적으로 살펴야 답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곳은 페르시아 문명에서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변방 중의 변방이다. 페르시아의 문명은 건조한 사막기후에서 나오는 진흙의 문명이고, 그 문명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자연환경은 그 주류적 문명권과는 전혀 다르다. 이곳은 진흙이 필요 없다. 아니 진흙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습하다. 그러니 페르시아의 주류 문명권에서 갈고 닦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 리가 없다.

이곳은 페르시아의 서자에 불과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은 이란 사회에서 현대에도 강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란인들에게 라시트는 그저 휴양 도시는 될 수 있을지언정 페르시아의 문명이나 문화와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곳 라시트에는 이란을 대표할 만한 역사적 기념물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쿠축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1920년대에 사회주의 혁명 노선에 따라 이곳에서 사회주의 이란공화국을 선언하고 게릴라 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팔레비 왕가에 의해 무참히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운동이 이곳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주류의 이란고원 문명과 변방의 카스피해 문명과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건조한 사막 기후, 페르시아 문명을 결정하다

이제 이번 탐사의 스케치를 끝내면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일주일 동안 페르시아 문명 탐사를 하면서 느낀 종합적 소감이다. 우선 이번 여행은 자연이 인간의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페르시아 문명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건조한 사막 기후이다. 이 기후를 현명하게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지난 3천여 년간 페르시아인들이 만들어온 페르시아 문명이다.

엘브로즈와 자그로스 산맥에 의해 감싸지는 페르시아 대부분의 문명은 진흙의 문명이다. 사람들의 주거환경이 진흙으로 만들어졌고 모스크나 대형 건축물도 진흙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진흙이 건축의 자재로 쓰이기 위해서는 거기에 물을 넣어야 하고 때로는 그것을 불로 구워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천 년이 가도 끄덕없는 사막지대의 최고의 건축자재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건조한 사막지대가 아니라면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

사막의 건조한 자연환경은 모스크를 만듦에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기 위한 각종 설계를 하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모스크 주변의 바자르도 이러한 건조한 사막기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건조한 사막 기후만 없었다면 굳이 이런 식의 바자르를 신성한 모스크 근처에 만들 리도 없다. 이러한 내 생각은 우리 탐사단이 라시트를 방문하였을 때 절감했다.

우리 탐사단이 엘브로즈 산맥을 넘어 카스피해로 접어들자 기후는 일시에 바뀌었다. 그리고 주변 환경은 마치 우리의 시골을 보는 것 같은 포근함이 다가왔다. 시장도 우리의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7일장이 서고 있었고 모스크의 기능은 그저 동네 교회와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기후에서 비롯되는 자연환경은 인류의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물론 자연환경만이 문명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아니다. 다른 요소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문명의 기원에서 자연환경이 주는 영향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환경에 도전하면서 그에 적절히 응전하는 방식으로 문명을 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과 응전에 제대로 적응하면 우수한 문명을 일으킨 반면 그렇지 못한 경우는 결정적으로 자연의 역습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나는 이미 문명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에서 생생하게 보았던 바다. 뱅갈보리수(스펑나무)가 사원의 심장부를 짓누르고 있었던 타 프롬 유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이 이야기는 후에 앙코르 문명기행에서 할 테니 기대하시라).

사막, 알라신을 만들다

페르시아 문명 기행에서 느낄 수 있었던 두 번째 문제의식은 종교다. 종교가 인간의 생활과 문명에 끼친 영향이다. 페르시아에서 이것 또한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동과 페르시아의 이슬람 종교가 이들의 문명에 끼친 영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슬람 종교는 적어도 이 지역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 사람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규범이자 사회의 모든 시스템의 원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종교가 사람을 위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사막 한가운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는 종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절대적 존재이다. 그것이 알라신이다. 그래서 그들은 알라라는 유일신을 만들었고 그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이에 비해 자연환경이 좋은 지역에서 나온 종교는 대체로 다신교다. 삼라만상에 신이 다 있다는 사상은 좋은 환경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곳에는 나무도, 물도, 바위도, 숲 속의 짐승도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에 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막에서 뜨거운 태양 아래 있다 보면 그곳에는 태양과 이를 지배하는 절대신 밖에는 없다). 이것이 자연과 결합하여 인간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양식으로 나타났다. 소통과 화합의 장소로서의 모스크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페르시아 문명은 이렇게 자연환경과 이슬람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선명하게 세계사에 나타났다. 물론 어느 문명이든 이런 요소가 없지 않겠지만 이란의 사막지대를 일주일 동안 근 3천 킬로미터를 돌면서 느낀 결론은 이런 보편적 요소가 어느 지역보다 잘 맞아떨어지는 곳이 페르시아라는 사실이다. 이번 탐사 여행의 소중한 결론이다.

영원한 숙제, 페르시아에는 왜 부처가 없을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을 풀지 못한 것이 있다. 불교문화의 서진에 관한 것이다. 이번 페르시아 탐사 중 어디에서도 페르시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서역에서 시작한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만 전파되었을 리는 없는데 어찌하여 페르시아의 고대 유물에서는 불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가.

의문이다(이 의문은 방문단의 일원이었던 민화 전문가 윤열수 선생님의 의문이기도 하였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 같은 탐사 여행을 좀 더 해야 할 모양이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며 문명의 전파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아마도 나의 다음 탐사 일정이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세계문명기행II : 페르시아 문명편]을 애독해주신 독자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어서 [세계문명기행Ⅲ-실크로드편]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태그:#세계문명기행, #페르시아, #라시트, #카스피해,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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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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