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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TV수신료 인상 긴급 기자회견에 참석한 길환영 KBS 부사장. 그는 지난 9일 사장에 선임됐다.
 지난 2월 TV수신료 인상 긴급 기자회견에 참석한 길환영 KBS 부사장. 그는 지난 9일 사장에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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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KBS에 또 다시 부적격 사장이 선임됐다. 국민의 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하게 국민의 뜻과 가장 동떨어진 사장이 선택된 것이다. 부적격 사장 선임을 결정한 기형적인 여야 7:4 구조의 이사회는 현재 특정인 몰아주기 논쟁에 휘말려 있다. 누군가의 의도를 반영해 이길영 이사장이 여당 이사들의 표를 결집시켰다는 야당추천 이사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공영방송 이사회의 구성과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인규 사장 치하 불공정 방송을 진두지휘한 길환영은 이사회의 결정대로 오는 26일 부사장실에서 사장실로 사무실을 옮기게 된다.

KBS 내부에서는 벌써 "정권의 알박기 인사, 대못 인사"라는 평이 나온다. 새 사장 내정자의 공식 취임일인 이달 26일 KBS 본관 앞은 몇 년 전처럼 전쟁같은 을씨년스런 모습이 재현될지도 모른다. 반대를 외치는 구성원들은 결국 들려나가고 짓밟힐 것이고 그 틈을 타 또 한명의 부적격 사장은 청경들에 휩싸여 취임사를 읽어 나갈 것이다.

정권을 향한 KBS 출신 사장들의 충성

불순한 언론관에 있어서 박정희, 전두환을 능가하는 MB정부 아래서 4번째 사장을 맞는 KBS구성원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2008년 정연주 전 사장을 축출할 당시 MB의 혀로 불렸던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KBS 사장은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적극 구현하려는 사람이 돼야 한다(2008년 신동아 8월호)"고 밝혀 논란을 자초했지만 이후 이병순, 김인규 등 KBS 출신 두 사장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증명했다.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프로그램인 <미디어포커스>, <시사투나잇> 등은 막을 내렸고 시사프로그램과 뉴스는 급격히 연성화의 길을 갔다. 그리고 공영방송을 외쳤던 직원들은 다른 부서로 그리고 지역으로 사라져갔다.

이병순 사장이 스토퍼 역할을 했다면 김인규 사장은 철저하게 KBS 프로그램을 관제화 시켰다. 김인규 사장 취임 이후 MB를 비롯한 여당 정치인이 공영방송 KBS 프로그램에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했고, 발열조끼 모금 방송, 이병철 기념 열린음악회 등 방송을 정치와 권력에 예속시켰다. 임기 말기까지 박정희 미화 논란을 불러온 드라마 <강철왕(가제)> 은 선거 개입용이라는 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논란 끝에 2011년 전파를 탄 백선엽을 다룬 다큐 <전쟁과 군인>은 현재 새누리당과 우파 진영의 국가관 검증에 주요한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 주자, 길환영

2011년 2월에 발행된 KBS 새노조 노보. 지난 11월 9일 사장으로 선임된 길환영씨는 콘텐츠본부장시절 KBS새노조가 실시한 신임투표에서 87.9%(재적대비 79.3%)라는 불신임을 받기도 했다.
 2011년 2월에 발행된 KBS 새노조 노보. 지난 11월 9일 사장으로 선임된 길환영씨는 콘텐츠본부장시절 KBS새노조가 실시한 신임투표에서 87.9%(재적대비 79.3%)라는 불신임을 받기도 했다.
ⓒ KBS 새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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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공영방송의 암흑기. 두 사장에 걸쳐 사내 핵심 보직인 기획제작국장, TV제작본부장, 그리고 부사장까지 승승장구의 길을 걸어오며 공영방송을 파탄낸 장본인이 바로 다음 사장으로 내정된 길환영이다. 그는 21세기에 전파가 어떻게 정권의 홍보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했다. 노사가 뉴스와 프로그램의 공정성을 논의하는 공정방송추진위원회(사측대표 : 부사장, 노측대표 : 노조 부위원장)에서 보여준 그의 화려한 수사는 이미 전설이다. 백선엽, 이승만 특집이 논란이 되자 제작자율성을 운운하며 위기를 넘겼다. "이미 제작에 들어갔다", "이승만 하고 김구 하면 되는 거 아니냐"란 말장난으로 본질 흐리기와 시간끌기로 기어이 전파를 낭비하는 데 앞장섰다.

이미 <심與(여)토론>으로 변질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KBS 대표 토론프로그램인 <생방송 심야토론>의 배후 역시 길환영이 지목되고 있다. 아이템과 편파적인 패널 선정, 교묘한 제목 달기 등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제기하자 간부에게 전화를 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외압사실은 완강히 부인하면서도 진위여부를 가리자는 제안은 거부했다.

전반적으로 비정치적이어야 할 교양 프로그램들이 이른바 '선전 도구화' 돼 버린 시기는 그의 재임시기와 일치한다. 교양의 자존심이었던 <추적60분>을 게이트키핑을 이유로 보도본부로 쫓아낸 이도 바로 길환영이다.

언론노조 KBS본부(이하 새노조)의 95일 파업기간 중 그의 활약상은 당연 발군이었다. 노조 집행부들에 대한 징계는 물론이고 대선 공정방송 합의서를 쓰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몽니를 부렸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는 변명과 함께.

KBS 내부에 길환영을 환영하는 사람들  

김인규 KBS사장이 2009년 11월 24일 오후 취임식이 열리는 여의도 KBS본관에 도착하는 가운데 양복차림을 한 수십명의 간부들이 도열해 있다.
 김인규 KBS사장이 2009년 11월 24일 오후 취임식이 열리는 여의도 KBS본관에 도착하는 가운데 양복차림을 한 수십명의 간부들이 도열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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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장 선임에 있어 주목해야 할 점은 KBS 사내에 존재하는 권력 지향층, 혹은 정치지향적 인사들의 움직임이다. 앞서 두 번의 낙하산 사장 선임시기에 늘 원포인트로 등장했던 이른바 사내 구악세력들은 KBS출신 사장의 당위성, 훌륭한 선배를 영접해야 한다며 낙하산 논리를 흐리기에 바빴다. 실제로 이들은 김인규 사장의 첫 출근날 물리적으로 사장을 호위하고 나서 구성원들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의 입장에서 이런 KBS내부 호위세력의 존재는 낙하산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했다. 사장 후보자들의 정권 충성도의 질적 수준도 중요하지만 KBS 내부의 충격을 줄이는 '내부 아군'의 움직임과 크기는 중요 체크 포인트였다. KBS 출신이 사장이 되기 시작하면서 KBS 사장은 정권의 낙점이기도 하지만 내부 세력에 의한 옹립이기도 하다는 평가가 등장하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길환영 현 부사장은 여러 가지로 적합한 카드였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충성은 이미 여러 프로그램으로 증명한 상태다. 더군다나 KBS 사내의 역학구도, 즉 사내 기득권층이 길환영을 감싸고 나섰다면 임명자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부담도 줄어든다.

새노조가 125일 파업을 진행한 이유

KBS 새노조의 탄생은 슬픈 KBS 사장 선임의 역사에 비롯된 바 크다. 당시 기존 단일노조가 벌였던 행태들과 구성원들이 보여주던 실망감이 역설적 동력이 된 것이다.

정권의 낙하산만은 저지하겠다며 머리띠를 맸다가 이병순 사장이 선임되자 '낙하산은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다'며 슬며시 주먹을 내려놓던 사람들. 대통령의 특보를 사장으로 받는 것은 노동조합 간판을 내리는 일이라 외쳤던 노조위원장이 김인규 사장 입성 후 불과 보름여 만에 나란히 시무식 장소에서 축하 떡케이크를 썰던 모습들. 사장 선임 시 마다 사내 게시판에 등장해 용비어천가를 외쳤던 사람들. 그들은 그 대가로 인사로 포장된 직위를 보장받으며 전쟁도 치르지 않고 전리품을 나눠가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잔인한 보복들은 공영방송의 시계를 50년 전으로 되돌렸다.

KBS 새노조가 파업 93일 만에 사측과의 협상에서 잠정합의를 도출했다고 밝힌 가운데, 지난 6월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공원 희망캠프촌 단식농성장에서 김현석 전국언론노동조합 KBS 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김 본부장은 사측과의 협상을 통해 "새노조 위원장과 사장을 대표로 하는 대선 공정방송위원회 설치와 탐사보도팀 부활 등 공정방송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KBS 새노조가 파업 93일 만에 사측과의 협상에서 잠정합의를 도출했다고 밝힌 가운데, 지난 6월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공원 희망캠프촌 단식농성장에서 김현석 전국언론노동조합 KBS 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김 본부장은 사측과의 협상을 통해 "새노조 위원장과 사장을 대표로 하는 대선 공정방송위원회 설치와 탐사보도팀 부활 등 공정방송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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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이런 정도의 이들에게 우리의 프로그램과 뉴스가 재단 당한다는 것이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정식 조합 설립 후 2년 반의 짧은 기간에도 두 번에 걸쳐 125일을 파업으로 지새고 1백 수십 명이 징계회의에 오르내렸고 20여명이 중징계를 받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싸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길환영이란 또 다른 공영방송의 적이 우리 앞에 섰다. 그리고 새노조는 새로운 투쟁을 준비한다. 새노조의 배후는 바로 국민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유효한 지난 95일 파업의 구호를 새기며.

Reset!(리셋), 국민만이 주인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언론노조 KBS본부 사무처장입니다.



태그:#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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