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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 쌀바위 앞 전망대에서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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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 초사흗날 이른 아침. 모처럼 옆지기랑 함께 둘만의 오붓한 산행 데이트에 나섰다. 가을도 단풍도 지쳐 거의 다 졌겠다 싶은데 어떤 표정일까 사뭇 궁금한 마음으로 늦가을 산을 만나러 간다. 집 앞 길 건너편 버스정류소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남부시장 앞에서 내렸다. 고맙게도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울산 언양 가는 63번 버스가 곧 도착했고 우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양산 시내를 벗어나 약 50여 분 만에 언양에 도착했고 언양에 내리자마자 석남사 가는 버스에 올랐다. 석남사로 향한 길에 차창 밖 풍경은 추수를 끝낸 텅 빈 논밭의 여백이 평화롭고 적요하게 느껴졌다. 추수를 끝낸 논엔 벼 그루터기만 남아있어 그 텅 빈 충만이 마음을 끌었다. 얼마쯤 달린 버스는 석남사 맞은편에 섰다. 주변은 온통 늦가을 정취가 물씬했다. 언양 석남사를 기점으로 해서 가지산을 만나러 가는 것은 처음이다.

가을도 절정. 타오르듯 붉은 단풍
▲ 석남사의 단풍 가을도 절정. 타오르듯 붉은 단풍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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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길 건너 석남사로 들어섰다. 주말을 맞아 가을 정취를 느끼기 위해 온 사람들로 석남사 일대는 아침부터 제법 붐볐다. 우리는 석남사 경내로 들어섰다. 보고싶은 사람 때문에 물드는 단풍이라던 단풍도 절정이고 나뭇잎 지쳐 떨어진 호젓한 길을 걸으며 등산 진입로를 찾았다.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듯 한없이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단풍나무는 제 온몸을 붉게 붉게 태우고 있었다. 문득 시 한구절이 떠올랐다.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고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던 시가.

졸졸 계곡물 흐르는 소리 들리는 청운교를 건너 오른쪽 숲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걷다보니 가지산 등산로 표시판이 나왔다. 석남사에서 가지산까지는 5.5km라고 적혀 있다. 등산로 팻말이 있는 고에서 좁은 등산로로 접어들자 숲길을 얼마 걷지 않아서 갈림길이 나왔다. 몇 개의 갈림길 앞에서 어리둥절하게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가지산 가는 길이라고 적힌 작은 표시판이 붙어 있긴 했지만 표시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이 애매모호했다. 올라온 길에서 거의 직진으로 보이는 길과 오른쪽으로 굽어 도는 길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곧바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쨍 하고 맑은 가을 날
▲ 가지산 가는 길 쨍 하고 맑은 가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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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임도를 만나
▲ 가지산 가는 길 드디어 임도를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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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 처음 가보는 길인데다가 갈림길도 많고 이정표는 거의 없고 하나 있긴 한데 애매모호하고 약간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길은 선명해서 당연히 그 길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갔을까. 흐르는 물도 없는 마른 계곡이 나왔다. 낙엽은 어느새 수북수북 쌓여 있었고 길은 점점 희미해지면서 비탈로 이어졌다. 척 봐도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점점 길은 희미해지고 고도는 갈수록 높아졌다. 길은 어디쯤에서부턴가 끊겼고 길 없는 산비탈을 우리는 계속 올랐다. 어딘가 제대로 된 길이 있겠지, 곧 나오겠지 생각하면서.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낸 길은 보이지 않고 지워진 길, 가지 않은 길 아닌 산비탈을 오르고 또 올랐다. 얼마쯤 올라가다보면 산비탈도 끝나고 탁 트인 조망이 드러나리라 생각했건만 계속되는 산비탈만 이어졌다. 끝나기는커녕 점점 더 험해지고 높아져서 눈앞에도 고개 들어 올려다보는 곳에도 우리 앞에 엎드려 있는 산비탈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북수북 쌓인 낙엽 길과 돌무더기 위를 걸으면서 미끄러질 뻔했고 끙끙거렸다. 한 발 한 발이 조심스러웠다. 도대체 끝이 어딘지 내가 어디메쯤 가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가을도 절정 겨울 채비를 하고
▲ 가지산 가는 길 가을도 절정 겨울 채비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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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잔병처럼 한참을 걸음 옮기면서 올라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산비탈에서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래도 끝은 있으리라 믿으면서. 가파른 산비탈이라도 희미하게나마 먼저 낸 실낱같은 길이라도 있다면 이처럼 힘들진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밟지 않은 길 없는 비탈은 미끄럽고 험했다. 쌀바위 쪽으로 가는 넓은 임도가 나타가기 전쯤, 산비탈이 거의 끝나갈 쯤에 겨우 발견한 희미한 길 흔적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험한 산비탈을, 길 없는 길을 오르면서 비로소 어떤 일이든 개척자요 선구자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새삼 실감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낸다는 것,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먼저 앞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이고 고독한 일이며 버거운 일인지를.

멀찍이서 바라본 가지산 정상
 멀찍이서 바라본 가지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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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어떤 길이든지 그 누군가가 한 번이라도 가본 길은 그래도 쉽지만 사람들이 무수히 가고 가서 낸 길은 쉽고 편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다는 것은 몇 배 몇 십배 아니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렵고 암담하고 답답한 지를 몸으로 체험하고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길 없는 길, 높고 험하고 먼 산비탈을 오르고 오르면서. 또한 영남알프스의 위용을 새삼 실감했다.

가지산 가는 길
 가지산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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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멀고 깜깜하게 느껴졌던 길도 끝이 나고 임도에 닿았다. 힘들게 올라온 우리는 임도에 올라서자마자 쓰러지듯 두 다리를 뻗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기진맥진했다. 아직도 갈 길은 까마득히 멀기만 한데, 올라오는 길에서 우린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다. 그 어느 산행보다 힘든 등정이었던 것 같다. 넓은 임도를 걷는 길에 바라보는 산 빛은 산 낮은 쪽은 단풍이요 위쪽은 앙상한 나무들이었다. 오랜만에 하늘을 만난 것처럼 일별했다. 바람은 상쾌하고 하늘은 맑았다.

넓고 호젓한 임도를 따라 쌀바위에 도착했다. 쌀바위는 옛날에 이 바위아래서 한 스님이 수도에 정진하다가 바위틈에서 쌀이 나왔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쌀바위 대피소에도 쌀바위 주변에도 늦가을 가지산을 만나러 온 산인들로 제법 붐볐다. 석남사에서 임도까지 그리고 쌀바위까지 올라오는 길에 힘도 시간도 많이 소진한 까닭에 가지산 정상을 멀찍이 바라만 볼 뿐 정상까지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거기까지 갔다 오면 이미 어둠이 내릴 것 같았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가기로 했다.

가지산의 가을
 가지산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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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의 가을
 가지산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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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바위 앞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늦가을 산야를 바라보다가 왔던 길 따라 걸었다. 임도 중간쯤에 오른쪽 가파른 내리막길이 있어 접어들었다. 석남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하산 길도 꽤 길게 오래 이어졌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다가 석남사가 그리 멀지 않은 숲에서 낙엽이 수북수북 쌓여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이런 곳은 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발이 닿을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를 내는 낙엽 위에 잠시 앉아 쉬었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단풍 빛깔도 고왔지만 떨어져 흙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낙엽들이 소복소복 쌓여 있는 숲은 고요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늦가을 숲의 나무들은 그렇게 제 자신을 수식하던 잎들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놓고 있었다. 잎은 떨어져 뒹굴다 그렇게 쌓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또 천천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석남사에 도착했을 땐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고요한 저녁의 산사를 나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낯선 길을 헤매다 많이 지친 탓인지 버스에 올라앉자마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하산길
▲ 가지산 하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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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행수첩

1. 일시: 2012. 11. 3(토) 맑음
2. 산행기점: 언양 석남사
3. 산행시간: 7시간 20분
4. 진행: 석남사 매표소(10:20)-석남사 내 청운교(10:35)-너덜지대(12;00)-임도(12;50)-
귀바위밑(1;10)-전망대(1;15)-쌀바위대피소(1;40)-점심식사 후 하산(2;25)-
전망대(2;45)-석남사. 임도 갈림길(3;45)-청운교(5;10)-석남사 매표소(5;40)



태그:#가지산 쌀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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