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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가을 오후, 어머니가 경로잔치 간 후, 마당에 늘어놓은 쌀을 그 녀석이 마구 흩어놓아 어머니는 화가 났다. 한 대 맞고 침묵하고 있는 그 녀석과 어머니
▲ 그 녀석과 어머니는 불편한 관계? 따사로운 가을 오후, 어머니가 경로잔치 간 후, 마당에 늘어놓은 쌀을 그 녀석이 마구 흩어놓아 어머니는 화가 났다. 한 대 맞고 침묵하고 있는 그 녀석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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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끝난 들녘. 바람만이 휑하니 불고 갈 뿐입니다. 거둬들이는 가을 수확물들이 하나둘 집으로 들어오고 겨울나기를 위한 준비가 한창인 지금, 모내기 철이 시작되면서 고향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 '녀석' 하나 있습니다. 사전에 강아지인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습니다. 오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른 가족들은 다들 의아해하며 그 녀석을 주목하고 있었고, 그 녀석과 함께 살아야 할 어머니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지 고향집을 방문할 때마다 녀석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지요.

사는 게 바쁘고 자주 찾아봬야지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어쩌다 예고 없이 들르게 되면 어머니는 녀석에 대한 깐깐한 이유를 들어 녀석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과 태도를 차단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집안에 동물을 키우는 일이 몇 년간 없다 보니 혼자 사는 게 아마 익숙해서, 좀 귀찮아서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녀석이 있으므로 해서 좋은 점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여름을 지내면서 마을에 안 좋은 일도 많았지요. 혼자 사는 어르신들의 집만 골라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을 하나씩 훔쳐가는 그야말로 좀도둑이 나돌았습니다. 고추 모종 살 돈 받아둔 것을 훔쳐간 것, 한푼 두푼 모아 만든 금반지, 자식들이 준 용돈을 아껴 꼬깃꼬깃 숨겨둔 금쪽같은 물건이나 돈을 훔쳐 간 좀도둑이 한동안 마을 전체를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지요.

어머니는 고추 모종 사려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받아뒀던 모종값을 고스란히 잃어버렸지요. 뿐만 아니라 좀도둑은 한 번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서너 차례 마을을 돌아다니며 저금통까지 훔쳐갔습니다. 손자 주려고 애써 모아둔 저금통은 물론 여름 내내 힘들게 부추농사 지어 시장에 갖다 팔아 모아 둔 쌈짓돈까지 다 잃어버렸는데 듣기만 해도 화가 나고 애잔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오빠가 속상해 하는 어머니를 위해 그 녀석을 데려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 고향집에 들렀습니다. 물론 집으로 가봐야 어머니는 계시지 않을 것이고 부랴부랴 논으로 향했습니다. 어머니는 밭에서 깨 모종을 옮기고 계셨는데, 감기에 걸려 제대로 먹지 못했다며 이것저것 하소연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밭에서 모종을 옮기는 동안 전 제가 가져갈 채소들을 챙기고 있었고, 어머니의 일이 끝나길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깨 밭에 모종을 거의 다 해갈 무렵 어머니는 서둘러 집으로 가자며 재촉하셨습니다. 천하장사 같이 쌀자루 거뜬히 들어올리고, 아버지 대신 논일은 물론 밭일까지 척척 하시던 어머니는 이제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르지 않음에 씁쓸해 하시곤 하십니다. 그런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저로서는 아직도 쌀자루 거뜬히 들어 올리는 그 때의 어머니를 생각하건만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여러 차례 쉬었다 가시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마음의 무게만 더해갈 뿐입니다.

"단디 매 놨는데 우짜꼬, 우짜고"

어머니가 밭에 나간 후, 녀석은 말없이 가출을 했다. 도대체 왜?
▲ 녀석은 어디로 가출을 했을까? 어머니가 밭에 나간 후, 녀석은 말없이 가출을 했다. 도대체 왜?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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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상으로만 전해 듣던 그 녀석을 오늘에야 제대로 보겠구나 싶어 잔뜩 기대하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집안 전체에서 느껴지는 싸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문 앞에 주인 없는 커다란 개집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마당 여기저기엔 녀석의 흔적이 있고, 집안 구석구석엔 얼마나 헤집고 다녔는지 으레 짐작할 수 있었지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녀석. 어머니는 갑자기 불안해하시더니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쯤 되자 집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전화상으로 전해진 그 녀석의 행실로 봐서는 이참에 잘 됐다고 단념할 것 같았던 어머니의 태도는 순간 180도 변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우리에게 했던 그 녀석에 대한 나쁜 보고의 실상은 어디 가고 없었습니다. 어머니 집에 들어온 지도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그냥 '메리'라고 불렀습니다.

어머니와 남편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찾는 동안 저는 어머니의 저녁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녀석이 남기고 간 흔적을 지우기 위해 청소를 하려는데 다급한 이장님의 목소리가 마을 확성기를 타고 흘러나왔습니다.

"아, 아, 알립니더, 아랫마을 청송댁 개가 없어지심더. 혹시나 반 사람이 있으믄 꼬옥 청송댁으로 연락주이소. 다시 한 번 알림더. 청송댁 개가 없어졌다고 합니더. 본 사람 있으믄 청송댁으로 연락주이소. 알겠는교? 이상임더."

급하게 마을 이장님한테 방송을 부탁했는지 녀석을 찾는 방송까지 나왔습니다. 목격자 아주머니의 제보가 있어 그 집으로 가봤지만, 거기에는 가출한 다른 집 개가 있었습니다. 허탈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한참을 그 녀석의 집 앞에 앉아 멍하니 주인 없는 빈 집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우짜꼬. 자를 우짜꼬. 단디 매 놨는데, 우째 풀고 나간는고. 모르겠다. 아이고, 우짜믄 좋노."
"엄마, 그렇게 찾았는데 없는데 우짜겠노. 마 인연이 아닌가보다, 생각하자. 그라고 내일 다시 한 번 더 찾아보믄 안 되겠나. 힘 좋은 녀석이라 아마 멀리 갔는가 보다. 그러니까 있을 때 좀 잘 해주지. 그라믄 녀석도 그놈의 정 때문이라도 어디 갈 생각은 안 했을 거 아이가. 밥도 잘 못 묵고 그랬는데, 일단 밥부터 우선 묵자. 으응"
"내가 무신 밥이 넘어가겠노. 아이고 얄궂다. 단디 맸는디 풀고 갔는가베."

해는 넘어가고 어둑해진 저녁이 되자 어머니는 더 안절부절이었습니다. 차려놓은 밥상을 한 번 쳐다볼 뿐 나중에 먹겠다고 서둘러 그만 가라고만 하셨지요. 틀니를 다시 하느라 어머니는 한 달 가까이 잇몸으로 식사를 하고 계시는데, 그런 어머니가 제대로 끼니를 하지 못하고 있어서 시간 날 때마다 들러 죽이나 국을 끓여놓고 가곤 했습니다. 그날도 어머니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해놨지만, 녀석의 가출이 충격적이었는지 어머니는 저녁 먹는 걸 잊고 하염없이 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고향집을 나와야 하는 마음도 그다지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알아서 먹겠다는 다짐을 재차 받고 텅 빈 녀석의 집을 한 번 더 챙겨보고는 떠나온 고향집.

"아이고, 지도 내를 보고 꼬리 흔들고 그러더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혹시나 길가에 서성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주위를 살펴보기도 했지만 날이 어두워 더 이상 녀석을 찾기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날 하루 보내고, 다음날 출근했습니다. 뜻하지 않는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야야, 막내야, 메리 찾았데이."
"아, 어디서 찾았노?"
"아이고, 내가 밤새 잠을 못 잤다 아이가. 새벽 동 터기 전에 어제 봤다는 아줌마가 일러 준대로 다시 차분히 따라가 봤다 아이가. 와아, 마을 입구에 흉가된 공장 있제. 그기 가가 보니 흙 판 흔적도 있고, 가만히 있으이 소리가 나서 따라가 봤더마는 공장 뒤쪽에 나무에 줄이 걸려 낑낑대고 안 있더나. 아이고, 지도 내를 보고 꼬리 흔들고 그러더마."
"천만 다행이네. 엄마, 밤새 잠도 못자고 우짜노. 눈 좀 부치라. 이제 단디 매놓지"
"안 그래도 단디 매났다. 찾았다고 전화했다. 그래 알고 있어래이"

말도 잘 안 듣고 힘만 세다고 저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늘 하소연을 하시던 어머니는 녀석이 집을 나간 후,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밤잠을 설쳐가며 이른 새벽 녀석을 다시 찾아 나섰다는 얘기는 그간 어머니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음을 전해줬습니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에게 가장 가까운 벗 하나 생긴 셈이어서 좋아했던 나의 마음과는 달리 유난히 녀석을 싫어했던 어머니. 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미운 정도 정이 돼 버린 것일까요. 달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두 지붕 두 마음으로 지내온 며칠 동안 새로운 마음의 확신을 갖게 해 준 것 같아 녀석의 가출이 효과가 있었긴 했나 봅니다. 말 못하는 짐승도 가슴이 있고 눈물이 있다며 어릴 적, 종종 얘기 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릴 적, 누렁이 소를 키워 왔던 저희 집엔 어머니의 옆에는 항상 누렁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몇십 년이나 함께해 온 누렁이를 어머니 손으로 떠나보내고 난 후, 어머니는 그 어떤 가축을 집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아마 극도로 싫어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녀석이 어머니 집에 처음 왔을 때도 어머니는 그런 생각하기 싫은 옛일이 떠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워도 친구잖아"라는 말

힘이 천하장사다. 이런 녀석을 견뎌내지 못하는 어머니는 늘 힘겨워하신다.
▲ 가출 후, 의젓해지길 바랬는데 글쎄... 힘이 천하장사다. 이런 녀석을 견뎌내지 못하는 어머니는 늘 힘겨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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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처럼 함께 했지만 그 헤어짐의 상처가 너무 오래여서 힘들었을 것이고, 녀석이 가출을 하고 다시 돌아온 뒤 어머니는 녀석에 대한 미움을 토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녀석을 좋아한다는 말이나 '그놈 괜찮은 녀석이다'라는 말조차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미워도 이제 한번 들어온 이상 어머니와 함께 가야 할 친구라 여기며 살면 안 되겠냐는 나의 말에 수긍을 한 것인지 아무튼 어머니는 녀석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혼자가 아니라 녀석이 어머니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든든합니다. 이런저런 이유야 어찌 됐든 온종일 한 마디도 않고 계셨을 어머니가 녀석을 쳐다보며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녀석의 가출 후, 몇 번의 가족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젠 그 어디에도 어머니의 허락 없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돼 버린 녀석. 그리고 그 녀석에게는 '장군'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습니다. 장군이가 앞으로 더 성장하고 더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고, 그런 장군이와 함께 어머니의 삶에도 약간의 활력소가 돼 아주 오랫동안 어머니를 보리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올해, 고향집에서 일어난 어머니와 녀석의 사소한 일이 새로운 의미로 우리 가족 모두에게 깊이 남을 것 같습니다.


태그:#어머니, #고향, #장군이, #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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