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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편지'를 입안에 맴돌게 한 딸아이 슬비. 영광 백수해안도로 나무데크 길을 걷다가 문들 돌아서 본 모습입니다.
 '가을편지'를 입안에 맴돌게 한 딸아이 슬비. 영광 백수해안도로 나무데크 길을 걷다가 문들 돌아서 본 모습입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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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딸아이가 손으로 직접 쓴 것이었습니다. 놀랐습니다.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학교에서 보내는 안내문일까. 아니면 성적표. 성적에 얽매이고 성적을 감추는 아이가 아닌데. 그러면….

궁금했습니다. 봉투를 들고 속을 들여다봤습니다. 분홍빛 감도는 종이가 보였습니다. 성적표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습니다. 안내문도 성적표도 아니었습니다. 손으로 직접 쓴 편지였습니다.

며칠 전 딸아이의 문자가 생각났습니다. 휴대전화 문자로 회사 주소를 찍어달라는…. 이 편지를 보내려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분홍색 종이에 작은 글씨가 빼곡했습니다. 깨알 같았습니다. 노안이 찾아 온 제 눈으로는 읽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기뻤습니다. 손으로 쓴 편지를 받고서. 우표까지 붙은 편지를 받아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했습니다. 펜으로 쓴 편지를 받은 건 신선한 기쁨이었습니다.

슬비가 편지지에 그린 그림. 밝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같았습니다.
 슬비가 편지지에 그린 그림. 밝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같았습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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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꼈습니다.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딸아이가 편지를 쓰게 된 배경도 알게 됐습니다. 학교(광주문정여고) 수업시간인데, 부모님께 편지 쓰는 시간이었답니다. 다른 친구들은 한 통을 쓰는데, 자기는 엄마와 아빠한테 따로따로 편지를 쓰고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 편지는 집으로, 아빠 것은 회사로 보낸 것이라고.

글은 그다지 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딸아이가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은 다 들어 있었습니다. 동안 보살펴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자신이 부모였으면 이해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일도 이해해줘서 감사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자신의 진로와 장래에 대한 얘기도 들어있었습니다. 부모의 현재 관심사가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현재 즐기고 있는 취미생활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기 싫다고 했습니다.

묵묵히 지켜봐달라는…. 은근한 압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빠에 대한 개인적인 당부도 잊지 않았습니다.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를 조금 줄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간접흡연이 더 좋지 않다며 그 피해를 고스란히 두 딸이 입고 있다며, 은근한 협박까지 했습니다.

생각도 행동도 어른스런 딸아이 슬비. 영광 백수해안도로에 있는 한 펜션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입니다.
 생각도 행동도 어른스런 딸아이 슬비. 영광 백수해안도로에 있는 한 펜션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입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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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딸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싶었습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때가 눈에 선한데…. 벌써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생이 돼 있었습니다. 그것도 여고생활 3분의 2를 보내고 있는 고2라니.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습니다. 세월 참 빠르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딸아이에 대한 믿음도 더 강해졌습니다. 지금의 생활은 물론 앞으로 진로에 대해서도 현명하게 대처할 것으로 생각됐습니다. 속이 깊은 아이니까요. 성격도 밝고 친교성도 좋으니까요. 생각과 행동도 어른스럽고.

딸아이가 고마웠습니다. 사랑스러웠습니다. 이게 다 손으로 쓴 편지 덕분이었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펜을 잡고 편지를 써볼까 합니다. 딸아이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고은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편지>가 입안에 맴도는 가을밤입니다.


태그:#가을편지, #문정여고, #이슬비, #백수해안도로,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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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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