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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에 의해 반파된 차량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
 허리케인에 의해 반파된 차량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
ⓒ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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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전쟁이 아니라 포기와 허탈 그 자체였다.

허리케인 '샌디'가 할퀴고 간 상처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아서 다소 안도하던 뉴욕 시민들마저도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초유의 사태로 모두 멘붕(멘탈 붕괴)의 패닉 상태로 빠지고 있다.

바로 '가스(휘발유)'가 다 떨어진 것이다.

필자는 2일(이하 미국 현지시각) 저녁, 기름도 다 떨어진 주유소에서 마냥 기다리던 차들을 보면서 그래도 내일이면 해결이 되겠지 하고 안심했다. 다음 날인 3일 필자는 떨어져 가는 기름을 차에 넣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집 앞에는 허리케인으로 쓰러지는 나무에 부딪혀 반파된 차량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골목에서만 서너 대가 저런 피해를 입었으나, 허리케인에 의한 화재로 마을 자체가 없어진 곳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이웃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허리케인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기름 전쟁'

필자 역시 7년간 미국에 살면서 가끔 허리케인으로 인해 쓰러지는 나무를 보아 왔기에 조금 한적한 곳으로 차를 옮겼다. 그런데 이마저도 이웃 공사장 건물에서 날아온 공사 자재 때문에 차의 보닛이 찌그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 피해는 어디에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이번 샌디의 파괴력은 심각했다.

블룸버그 뉴욕 시장이 조금 전 TV에서 기름 공급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터라 그래도 희망을 안고 인근 주유소로 바로 달려갔다. 눈앞에 끝도 보이지 않는 차량의 행렬에 그래도 기름이 왔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에 차를 대면서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붙였다.

차량 행렬. 기름이 다 떨어진 주유소 앞을 차랑들이 마냥 기다리고 있다.
 차량 행렬. 기름이 다 떨어진 주유소 앞을 차랑들이 마냥 기다리고 있다.
ⓒ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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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기다렸어요? 지금 주유소 가동되나요?"

"한 3시간 넘게요. 아니요." 
"네? 그럼 왜 줄을 서고 있죠?"

"다른 주유소도 기름이 없는데 그냥 기다려봐야죠."

순간 허탈감이 밀려왔고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동네 인근 주유소들은 다 이미 기름이 떨어져 영업을 못한 지 6일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플러싱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수소문 끝에 막 기름 공급을 시작했다는 주유소를 찾아내어 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문닫은 주유소. 기름이 다 떨어진 주유소들은 이미 개점휴업 상태였다.
 문닫은 주유소. 기름이 다 떨어진 주유소들은 이미 개점휴업 상태였다.
ⓒ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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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해서 기름이 도착했다는 주유소를 찾아내기는 하였으나, 끝을 알 수 없는 긴 차량 행렬에 줄을 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주유소도 확보한 기름이 부족해 아직 차량에는 팔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기가 막혀 왔다.

차량 장사진. 기름을 팔고 있다는 소식에 몰려든 차량들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차량 장사진. 기름을 팔고 있다는 소식에 몰려든 차량들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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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서는 것을 포기하고 인근에 차를 주차한 다음 주유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 주유소에는 조금의 기름이라도 확보하려는 운전자들이 차 대신에 기름통을 들고 대기하는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기름통 한 개를 들고 주유소로 달려오는 70대의 할아버지는 자기 평생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이거 원, 전쟁 때보다 더 심하다"고 한탄하며 이내 줄에 합류했다.

기름통 들고 달려오는 70대 노인 "전쟁 때보다 더 심하다"

사람 행렬. 한 통의 기름이라도 확보하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 모습
 사람 행렬. 한 통의 기름이라도 확보하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 모습
ⓒ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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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4시간을 넘게 기다린 끝에 겨우 기름 한 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뉴욕 자메이카에 산다는 스테파니(29)씨는 "(지금 사태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이 엄청난(crazy) 상황이 언제 해결될지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기름으로는 부족해 다시 줄을 서야겠다며 다시 주유소로 향했다.

어렵게 확보한 기름 한 통을 차에 주유하고 있는 스테파니씨 모습
 어렵게 확보한 기름 한 통을 차에 주유하고 있는 스테파니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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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 관계자는 차례대로 한 사람당 20달러까지 배분하고 있다고 했으나 현장에서는 한 통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다 보니 기름 공급이 재개되어 영업을 시작하는 주유소에는 어김없이 경찰관이 배치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기름 공급이 재개된 주유소에는 전부 경찰관이 배치되었다.
 기름 공급이 재개된 주유소에는 전부 경찰관이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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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현장에선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기름통 한두 개씩을 들고 줄을 서서 한정된 기름을 먼저 받으려 해 전쟁처럼 살벌한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다소의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순서와 배정량을 둘러싸고 시민들 간에 마찰이 일어난 것이다.

서로 먼저 기름을 확보하려고 하자 잠시 소란이 일고 있는 모습
 서로 먼저 기름을 확보하려고 하자 잠시 소란이 일고 있는 모습
ⓒ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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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큰 마찰은 아니었으나, 이내 경비를 담당한 경찰차 두 대가 추가로 배치됐다. 출동한 경찰관들이 제지하려고 다가가자 소란은 자동적으로 해결되었다. 출동한 경찰에게 관내에 영업하는 주유소가 몇 개나 되냐고 물어봤지만 "자신들은 잘 모른다, 아마 거의(little)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추가로 신속히 배치된 두 대의 경찰차 뒤편으로 주유를 기다리는 차량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추가로 신속히 배치된 두 대의 경찰차 뒤편으로 주유를 기다리는 차량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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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란의 틈바구니에서 그래도 운 좋게 기름 두 통을 먼저 확보한 폴(33)씨는 얼마 동안 기다렸느냐는 질문에 "오늘 아침부터다, 시간도 모르겠다"며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unbelievable)"는 말을 연발했다. 자랑삼아 기름을 확보했다고 전화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필자 또한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주유 전쟁. 운 좋게 두 통의 기름을 먼저 확보한 폴이 전화하고 있는 모습
 주유 전쟁. 운 좋게 두 통의 기름을 먼저 확보한 폴이 전화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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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초유의 사태에 대해 미 연방 재난담당청은 뉴욕과 뉴저지 주에 많은 양의 기름을 수송했다고는 발표하고 있으나, 뉴욕의 기름 두절 사태는 일주일째를 향해 가고 있다. 이번 주유 대란은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주요 항만 시설이 파괴되었고 파이프 라인이 작동을 멈추어 발생하고 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파이프 라인이 정상화되어 곧 기름 공급이 정상화될 것이라고 블룸버그 시장은 밝히고 있다. 하지만, 언론들은 완전 정상화까지는 앞으로 일 주일이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스런 전망을 보도하고 있다.

주유 대란 사태는 뉴욕주뿐만 아니라 이번에 허리케인 샌디의 치명타를 입은 뉴저지 주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급기야 주유 대란을 막기 위해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3일 오후부터 차량 번호 홀짝제 급유를 실시한다는 특단의 조치까지 발표했다.

일 주일 이상 휴교한 학교가 다음 주부터 개교할 예정이고 지하철과 버스가 부분적으로 다시 개통되면서 뉴욕은 일상으로 회복해 가고 있다. 하지만 기름이 공급되지 않아 주유 대란이 이어지자 이번 허리케인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던 시민들마저도 허리케인 샌디의 가공할 파괴력을 실감하고 있다.

지금까지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뉴욕에서만 최소 42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체 피해액도 애초 예상했던 100억 달러를 훨씬 넘어 5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원식 기자는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으며, 주로 민족, 국제면에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는 시민기자입니다.



태그:#주유 전쟁, #허리케인, #뉴욕, #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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