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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놈 오면 줄라고 넉 달 동안이나 시렁에 매달아 놓았는디, 손주놈은 안 오고 돈도 아쉽고 해서 장에 갖고 나왔는디 맛 좀 보시랑게잉, 맛있제이?" - 구례 오일장터에서 만난 곶감 파는 할머니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가 여행을 하다 곡성시장, 구례시장, 화개장터, 하동시장을 연이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읍이나 작은 도시에서 재래시장을 마주칠 때면 겨울에도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이런 시장들 사진을 모아 전시회도 하고 책도 내는 '장터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1987년부터 올해까지 이십 오년간이나 강화도에서 제주도까지 한국의 장터를 찍고 기록해온 사람이 사진집 <한국의 장터>를 냈다. 역시 '인생도처유상수'라더니 먼저 실행하고 앞서가는 고수가 꼭 있다. 아무튼 전국의 전통 재래시장터에 매달려 이십여 년을 찾아가 지속적으로 사진을 찍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저자의 애정과 열정이 대단하다. 이런 일에 남녀를 구분하고 싶진 않지만 저자가 여성이란 점도 책속의 사진들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저자는 처음에 장에 가면 소설의 소재와 주인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87년 본격적으로 장터를 찾게 됐다고 한다. 기 싸움 하듯 흥정하는 상인과 손님, 놀라운 입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아저씨 같은 장터를 지키는 사람들을 만나 친해지면서 그곳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그렇게 전국 각지의 장터를 찾아다닌 지 벌써 25년. 그동안 가본 장터만 300여 곳이고, 장터의 사람과 풍경을 기록한 사진은 줄잡아 4000여장에 달한단다. 사진집 <한국의 장터>엔 그중 추려낸 82곳의 오일장터와 400여 장의 사진들이 등장한다. 소설가라는 또 다른 직업을 가진 여성 작가다운 생생하고 세밀한 장터 묘사도 사진과 더불어 돋보이는 훌륭한 포토에세이집이다.

장터에 관한 최초의 인문학적 보고서

<한국의 장터> 정영신 글·사진, 눈빛아카이브 펴냄
 <한국의 장터> 정영신 글·사진, 눈빛아카이브 펴냄
ⓒ 눈빛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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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라는 공간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그 지역의 생활문화를 꽃피우는 무대요, 전국에 흩어진 장터들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야할 생활문화 박물관이다. (본문 가운데)

저자가 25년 동안 찍어온 장터 사진에는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마수걸이(맨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를 잘 했다며 기뻐하는 아주머니, 혹시라도 장터에서 사돈을 만날까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온 할아버지, 힘든 일을 마치고 시장 구석에서 담배를 태우고, 목을 축이는 사람들 등 그의 사진에는 우리네 서민들의 눈물과 웃음이 함께 한다. 탐욕스런 자본주의의 물결이 잠시 멈춘 곳이기도 하지만 대형 할인 마트에 아이들과 젊은 사람들을 뺏겨 버린 침체된 장터의 면면도 볼 수 있다.

전국 82곳의 오일장터에서 찍은 400여 장의 사진들과 글을 감상하다보면 장바구니 사이로 목을 내민 강아지의 눈과 마주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어리기도 하고, 호박 몇 개 채소 몇 단이나마 팔러 나온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를 보며 애잔한 심정이 들기도 하고, 사라져 가는 우리만의 아름다움과 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에 책장을 못 넘기고 사진 속에 눈길이 멈추는 순간들이 많아 사진집이지만 쉬이 다 읽기 어려운 책이다.

사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의미는 이런 데 있다.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에만 묶이지 않고 진정성이 담긴 기록에 충실할 때 다큐멘터리 사진은 감동과 공감을 얻는다. 그리고 사진의 예술성은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형성된다. 모든 예술이 인간의 삶과 유리되어서는 별 의미가 없지만, 특히 인간과 그 삶의 기록에서 벗어나서는 의미를 얻기 어려운 게 사진일 게다.

이 책은 오일장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여행 안내서이기도 하다. 전국 오일장을 총 9개 도별로 분류하고, 다시 가나다순의 군 단위로 나누어 정리했으며, 각 장마다 오일장이 열리는 장날과 지역특산물, 저자의 에피소드와 사람들의 사연, 전래 이야기 등을 같이 넣어 독자들이 장터 정보를 쉽고 흥미롭게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크게는 강원도 동해 북평장에서 전라도 보성강가의 시골 석곡장, 배추를 팔면서 점도 봐준다는 제주 서귀포 고성장터 할머니까지 가보고 싶은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저자가 알려준 장터 구경하기 팁 중의 하나로 오일장터는 파장 무렵이 가장 재미있다니 참고할 만하다.

삶과 죽음, 즐거움과 애잔함이 모두 공존하는 우리네 장터
 삶과 죽음, 즐거움과 애잔함이 모두 공존하는 우리네 장터
ⓒ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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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장터 사진에서 느끼는 삶의 속살 

장터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다양한 삶을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제주 할망들은 또 다른 우리 엄마들을 이야기한다. 물질을 하고, 밭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에는 장터에 나와 온갖 것을 팔아 가정경제를 살리고 자식을 교육시킨다. 이 땅의 엄마들이 있기에 산업이 발전해 가고 경제가 살아나고 농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고향을 찾아가듯이 오일장을 찾았다면 고향과 같은 색깔을 만날 것이다. (본문 가운데)

책 속 사진들과 글에서 저자는 장터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외형적으로만 관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애환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사진들이 모두 흑백이라는데 있었다. 촬영 초기 1987년의 사진은 물론 2010년대의 장터 사진도 모두 흑백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흑백사진으로 찍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건 무슨 이유일까?

칼라색감을 배제한 흑백사진은 뭔가 본질적이면서도 직관적인 힘을 지녔다. 풍경사진도 그렇고 특히나 인물이 들어간 사진은 그 사람의 겉모습보다는 표정 속에 숨은 내면에 대해 잠시 생각에 빠지게 한다. 풍경은 풍경대로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느끼게 되고. 사진을 찍은 후 시간이 한참 흘러도 느낌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사진 누리기' 하기에 제격이다. 디지털 카메라에 흑백사진기능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사진집이다.

여름이면 따가운 햇살에 양산을 받쳐 들고 겨울이면 손난로에 의지해 떨면서도 떠들썩한 장터 바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흑백사진은 정겨우면서도 눈물겹다. 힘든 일을 마치고 장터 구석의 선술집에서 목을 축이는 사람들, 자기 몸집보다 더 큰 봇짐을 머리에 얹고 집을 향해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봄에는 분무기를 고치고 여름엔 장화를 수선하며 30년 넘게 장터를 지킨 '맥가이버' 할아버지, 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의 흑백사진은 내 뇌리에 오래도록 잔영으로 남을 것 같다.

그런 흑백의 사진들 중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무척 힘들게 찍었을 장터에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 무척 인상적이다.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요, 한 권의 책"이라며 인간의 표정에서 삶을 읽으며 많은 글을 썼던 발자크의 말마따나, 여러 표정과 삶의 흔적 주름이 담긴 얼굴사진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나름대로 상상하는 것도 즐겁고 내 삶을 성찰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장터에 가면 내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그립고 마음 짠하게 된다.
 장터에 가면 내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그립고 마음 짠하게 된다.
ⓒ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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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통 재래시장들이 지역은 물론 나라의 내수 경제 활성화와 도시와 마을의 공동체 붕괴 방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잘 아는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도시에 대형마트가 마구 들어서는 것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 유명 관광지를 제외하곤 기존의 대형마트나 백화점들도 주말과 공휴일에는 개점을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어떤가. 책을 읽다보니 동네에서 가까운 서울 망원동 월드컵시장 상인들이 떠오른다.

수년 전 생겨났던 대형할인마트가 인근에 또 들어서려 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재래시장이 타격을 받을 것이 자명하자, 이에 맞서 시장 상인들이 저항하고 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2003년 이후 7년 사이에 전통 재래시장은 178곳이 문들 닫았고, 기업형 수퍼마켓이 695곳 늘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14년 일본은 우리나라 각 면소재지에 시장을 1개씩 개설하라는 시장 규칙을 공포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역 경제를 살려 물산을 착취할 목적이었다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사회적 약자인 서민들을 보호하고 지역경제와 마을 공동체를 살리는데 있어 일제 강점기시대만도 못한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한국의 장터> (정영신 글·그림 | 눈빛 아카이브 | 2012. 08 | 2만 9,000원)



한국의 장터 - 발로 뛰며 기록한 전국의 오일장

정영신 글.사진, 눈빛(2012)


태그:#한국의 장터 , #오일장 ,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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