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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 후에도 달밤 산책하기 좋은 몇 안 되는 도시 경주
 해가 진 후에도 달밤 산책하기 좋은 몇 안 되는 도시 경주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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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10월 20일) 가을맞이 경주 여행을 떠난 것은 경주 남산의 달빛 기행, '신라의 달밤'이 보고 싶어서였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경주가 해가 진 후에도 달밤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한국의 몇 안 되는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경주남산연구소'의 누리집에서 남산 달빛 기행 외에도 자전거를 타고 산자락을 달릴 수 있다는 정보를 발견했다.

'지붕 없는 박물관' 남산의 문화재도 보고 남산 자락의 정겨운 시골마을도 지나가는 일종의 남산 둘레길이다. 그렇다고 따로 만든 길은 아니고 이미 있는 도로, 마을길, 오솔길, 솔숲 사이길을 달리는 자전거로 여행하기 딱 좋은 코스. 경주의 문화 유적지와 왕릉, 박물관을 지나는 자전거 여행 코스는 이미 여러 가지가 나와 있지만 이런 자전거 코스는 처음 본다. 600여 점이 넘는 문화재를 보유한 노천 박물관 남산을 연구하는 곳답다.

경주는 자전거 타고 여행하기 참 좋은 도시다. 경주버스터미널에 내리면 명물 경주빵 가게만큼이나 흔한 게 자전거 대여소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조금만 달려도 언덕길이 나오는 다른 도시와 달리 평탄한 길에 벚나무 가득한 너른 호수 보문호가 있고, 낮에는 계림, 불국사에, 저녁엔 멋들어진 야경에 입이 떡 벌어지는 명소 안압지, 첨성대 등 조상들의 선물이 널려 있으니 말이다.

천 년 세월 속에 언덕이 된 무덤

낮은 집들과 오래된 자전거 가게가 정답다
 낮은 집들과 오래된 자전거 가게가 정답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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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이 넘은 무덤 옆에서 익어가는 가을 들녘이 무척 이채롭다
 천 년이 넘은 무덤 옆에서 익어가는 가을 들녘이 무척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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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미널 앞 관광안내소에서 경주 여행지도도 받고 단팥 외에 고구마도 들어간 달콤 말랑한 경주빵을 한 입 베어 물며 애마 자전거 안장에 올라탔다. 얼굴에 와닿는 가을볕이 참 좋다. 같은 가을볕인데 내가 사는 동네와 느낌이 왠지 달라 고개를 들어보았다. 이유는 금방 알게 된다. 경주엔 청명한 가을 하늘을 가리는 높고 위압적인 빌딩들이 없다. 귀한 문화재들이 도시 곳곳에 있다 보니 그런 빌딩들이 들어서질 못했을 거다.

20대의 젊은 여성들, 벽안의 서양인 여행자들이 자전거 대여소에서 빌린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선다. 경주엔 수많은 문화재만큼이나 여행 코스가 다양하여 자전거 탄 여행객들이 각자 알아낸 여행지로 뿔뿔이 흩어져 달리는 모습이 재미있다. 나는 '신라 오릉' 방면의 동네, 황남동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신묘한 점집임을 강조하는 '만정 할배', 자전거가 실은 교통법상 차임을 알게 해주는 '시민자전차상회' 등 정겨움이 잔뜩 묻어나는 동네 황남동은 내 어릴 적 고향 동네와 참 닮아 달리던 애마를 자주 멈추게 한다. 일부러 지도를 보지 않고 천천히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 또는 자전거 탄 할아버지에게 오릉 가는 길을 물어 보았다. 자식들한테 알려주듯 세심하고도 어찌나 진지한 표정으로 알려주시는지 얘기 중에 새어 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겨우 참았다.

단팥 외에 고구마도 들어간 말랑말랑 맛있는 명물 경주빵
 단팥 외에 고구마도 들어간 말랑말랑 맛있는 명물 경주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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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우뚝 솟아 있는 어느 고분은 오랜 세월 속에 언덕이 되어가고 있다
 길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우뚝 솟아 있는 어느 고분은 오랜 세월 속에 언덕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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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벼가 고슬고슬 맛나게 익어가는 논도 있어 한 바퀴 돌다가 저 앞에 왠 커다란 언덕솟아 있어 눈길을 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제주의 오름 같아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보니 다름 아닌 거대한 무덤들. 무덤을 둘러싼 담장도 없는 노천 무덤이다.

가까이 걸어들어가 확인한 것은 무덤 주인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이름 지은 '황남동 고분'으로, 그 크기는 웬만한 왕릉을 넘어선다. 동네 아이들이 놀이 삼아 오르내리기 딱 좋을 언덕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곳에 올라가지 말라는 나무 팻말이 무덤 사면에 뉘여 있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은 무덤을 동네 언덕으로 변하게 했고, 둥글둥글 완만하고 부드러운 생김새는 죽음이란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공포의 대상인 것만은 아니구나 깨닫게도 된다.

고분 옆에 서 있는 버스정류장 팻말 아래 주저앉은 할머니가 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주민 아저씨가 작은 수레를 끌고 지나간다. 경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역사 속을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을 살아도 어제를 사는 사람들, 무덤들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림처럼 현실 같지가 않다.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명소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우물터 나정. 구불구불 소나무들도 인상적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우물터 나정. 구불구불 소나무들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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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마을
 남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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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마을 사는 할머니! 참말로 맛있게 잘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남간마을 사는 할머니! 참말로 맛있게 잘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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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오릉을 지나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우물터 나정(蘿井)을 지나간다. 본격적으로 남산 자락을 에둘러 가는 길이지만 야트막한 오르막길이라 바퀴 작은 애마 자전거도 가뿐하게 달려간다. 구불구불한 소나무 숲이 무성한 언덕위에 있는 나정(蘿井)은 남산이 문화재뿐만 아니라 멋진 소나무들의 경연장임을 알게 해준다. 

이렇듯 경주 남산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적 명소다. 산 주변으로 나라의 시조가 탄생한 나정, 여섯 성씨의 촌장들이 모여 처음 나라(신라)를 건국했던 마을과 초기 왕궁, 왕릉이 다양하며, 곧 마주칠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가 있어 실로 신라 천 년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나정 다음으로 만나는 사당 '양산재'와 '남간마을'도 그런 유서 깊은 문화재요 마을이다.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 여섯 성씨를 가진 부락이 살고 있었는데 각 촌장들이 모여 나라를 세우면서 추대한 이가 박혁거세이고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 년(기원전 57년)이 되었다. 남간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도 이 오래된 성씨를 가진 후손이었다.

특유의 진한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을 하게 하는 들깨며 쌀 등 추수를 한 각종 곡식을 집 마당에 널어놓고 있던 마을 할머니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신화를 나름대로 연륜을 섞어 현실적으로 이야기해주셔서 참 재미있게 들었다. 자전거 타고 '운동'하느라 고생한다며 솥에서 꺼내 주신 조그마한 옥수수와 고구마의 구수한 맛은 아직도 코끝에 맴돈다.   

남산 자락을 에둘러 가는 길은 문화재 외에도 감과 벼가 익는 정겨운 마을들이 있어 좋다
 남산 자락을 에둘러 가는 길은 문화재 외에도 감과 벼가 익는 정겨운 마을들이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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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었던 포석정의 명물 '유상곡수'
 신라인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었던 포석정의 명물 '유상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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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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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쪽에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독특한 모양의 기둥 '남간사지 당간지주'를 지나 포석정까지의 길은 추수를 기다리는 가을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푸근한 마을길이다.

경주의 소나무들처럼 구불구불 나 있는 정다운 마을길을 천천히 달리다보면 낮은 담장 너머로 주렁주렁 매달린 주홍빛 감들이 마을을 밝히는 작은 등 같다. 감나무 밑에 서서 탐스런 감들을 사진으로 담는 내가 감을 따려는 사람으로 보였는지, 지나가던 동네 할아버지는 가을 첫 서리가 내리고 나서 따야 감이 떫지 않고 맛있다며 말을 건네신다.      

그렇게 감과 벼가 익어가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다보면 어느 새 포석정이 나타난다. 입장료 500원을 내고 들어가려니 마침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한창이다. 무리에 들어가 992년간 이어졌던 신라의 종말을 고한 포석정과 그 역사 이야기를 잘 들었다. 망국의 슬픈 사연이 깃든 곳이지만 등 굽은 할머니가 신명나게 춤추는 듯 한 소나무들도 인상적이고, 술잔을 흘려보내며 유희를 즐겼다는 명물 유상곡수를 보니 당시 신라인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었다.

유물 반, 나무 반의 산

삼릉 가는 오솔길
 삼릉 가는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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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무덤. 왕릉마다 호위병처럼 지키고 서 있는 소나무들.
 경주의 무덤. 왕릉마다 호위병처럼 지키고 서 있는 소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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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 옆 지마왕릉에서 이번 여행의 종착지 삼릉까지 가는 길은 아늑한 기분이 드는 솔숲 사이 오솔길이다. 왕릉은 물론 이름 없는 무덤들에도 그 앞에 소나무들이 천 년 고도의 호위병처럼 든든하게 지키고 서있다. 게다가 생김새가 같은 나무가 없을 정도로 소나무들의 자태가 저마다 개성적이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들로 빼곡하다. 가히 유물 반, 나무 반의 산이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을 만하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한 배병우 사진작가의 소나무도 이곳 경주에서 찍은 거란다.

그의 사진을 보아도 그렇고 삼릉 주변의 솔숲에서 만난 소나무들을 보노라면 '왜 경주에 사는 소나무들은 유독 이렇게 구불구불 이무기가 하늘로 승천하듯 자랄까?' 하는 궁금증이 솟는다. 삼릉 주차장 입구에서 남산을 향해 오르는 사람들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포석정에서 일하는 문화해설사님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다시 찾아갔다.

신라시대 17만 호를 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엄청난 양의 목재가 필요했다. 곧게 자라난 소나무들을 죄다 베어내다 보니 휘어진 소나무만 남았고, 그들이 자손을 퍼뜨려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그럴 듯하다.

구불구불 자라는 까닭에 목재로는 쓰일 수 없는 소나무는 이제 '성스러운 숲'의 상징이 돼 세계인의 칭송을 받고 있으며 소나무 그늘에는 향기로운 송이가 자라고 있다. 구르는 돌 하나도 문화재급이라는 산이라 그런지 소나무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게 보인다. 

혹시 애국가에 나오는 가사 중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의 남산은 서울에 있는 남산이 아니라 경주에 있는 남산이 아닐까!

연못 태연지 노랑 창포꽃이 귀엽고 참 예쁘다
 연못 태연지 노랑 창포꽃이 귀엽고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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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자전거 여행 코스 요약 : 경주 버스터미널-황남동·황남동 고분-신라오릉-나정-양산재-창림사지-남간마을·남간사지 당간지주-포석정-지마왕릉-삼릉



태그:#자전거여행, #경주, #남산, #남간마을, #포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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