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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영화 <아티스트>
 영화 <아티스트>

1920년대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이끌던 배우가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멋진 콧수염을 휘날리던 그는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몸짓으로 흑백의 스크린을 누볐다. 그는 '소리 없는' 시대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영화에도 소리가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유성영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를 아끼던 영화 제작자는 그에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자고 말한다. 이것이 영화의 미래라고. 그러나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답한다.

"사람들은 날 보러 오지 들으러 오는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가 놓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관객들이 그를 그저 '보러' 갔던 이유는 그것이 그 시절 관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관객들은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보러' 갔을 뿐, 그것이 관객이 바라는 전부는 아니었다. 관객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영화가 자신들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올해 84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던 영화 <아티스트(The Artist)>(2011) 이야기다. 어느새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지켜보다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대통령 후보 안철수', 누가 불러냈나

사람들이 '대통령 안철수'를 떠올려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엔 그저 소박한 바람이었다. 척박한 '광야'에 서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던 그런 쓸쓸한 기대처럼. 하지만 18대 대통령 선거를 겨우 두 달 앞둔 지금, '대통령 안철수'가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정말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른다.

22일 안철수 무소속 대선 예비후보가 동작구 상도동 희망나눔네트워크를 방문해 날개 벽화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2일 안철수 무소속 대선 예비후보가 동작구 상도동 희망나눔네트워크를 방문해 날개 벽화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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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자 당황하는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당) 조직은 커녕, 정책도 채 마련하지 못한 그가 정말로 대통령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책깨나 읽었다는 이들이 먼저 나서서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이어 그와 자리를 다퉈야 할 이들이 가만히 눈치를 살피다 맞장구를 쳐댔다. 그러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에게 물었다. 그가 우리 정치의 미래가 아니냐고. 그러나 그들은 짐짓 타이르는 투로 이렇게 답했다.

'당신들이 바라는 것은 정당의 혁신이지 몰락이 아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시 곰곰 생각해보니 그들이 놓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사람들이 정당, 혹은 정당 정치를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것이 지금껏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당 정치 너머에, 혹은 그 정당 정치를 이루고 있던 몇몇 큰 정당들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미처 몰랐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늘 비슷한 선택을 되풀이 해왔을 뿐,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벌써 오래 전부터 정당 (정치) 너머의 그 무엇을 꿈꿔왔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귀를 기울이는 그 어떤 정치, 혹은 그 어떤 정치적 연대(결사)를. 나는 그것이 '대통령 안철수'를 밀어올리고 있는 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요 며칠 사이 조금 주춤해지긴 했지만,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로 그들은 그래서 줄곧 단일화에 목을 매왔다. 실은 자신들과 똑같아지길 바라는 단일화.

그가 오랜 고민 끝에 결심을 굳히고 사람들 앞에 서던 날, 그들은 "기존 정치가 보였던 모습과는 다른, 좋은 경쟁, 아름다운 경쟁을 하겠다"(진선미 대변인)는 말로 인사를 건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당 혁신과 새로운 정치는 결국 정당 위에서만 현실적으로 실현이 가능하다"(문재인 후보)며 속내를 드러냈다. 자신들 너머를 절대 넘보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결국 "무소속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불가능한 이야기"(이해찬 대표)라며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들은 지금 국민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제껏 해왔던 것과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그들은 이런 말도 했다.

"70여일 만에 할 수 있는 혁신이 얼마나 있겠느냐."(이해찬 대표, YTN 뉴스인, 2012.10.4)

현실을 모르는 정치 풋내기의 순진한 투정을 대하는 투다. 70여일 밖에 안 남도록 그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묻고 싶다. 아무튼 반응이 신통치 않자 열흘 뒤에는 말을 바꿨다.

"안철수 후보가 출마선언을 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안 후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이해찬 대표, 한겨레, 2012.10.17)

투정 부릴 시간을 조금 더 주면 곧 제 풀에 지쳐서 자신들에게 올 것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렇다. 아무리 말을 바꾸고, 또 누군가를 내보낸다 해도 그들 수뇌의 속내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쯤에서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다. 지금까지 단일화를 거부해온 것은 민주통합당이다.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한 카페에서 열린 '문재인펀드 선한출자자와의 만남'에 참석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한 어린아이에게 돼지저금통과 뽀뽀를 선물받고 있다.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한 카페에서 열린 '문재인펀드 선한출자자와의 만남'에 참석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한 어린아이에게 돼지저금통과 뽀뽀를 선물받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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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화보다 우선해야 할 게 있다

돌아보면 이른바 '안철수 현상'을 두고 지난 1년간 숱한 분석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묻겠다. 그 '안철수 현상'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대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 흐름인가? 혹시 답을 알고 있다면 속 시원하게 답해보기 바란다.

나는 물론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나에게 있어 '안철수 현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시작했는지는 그나마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만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글깨나 읽었다는 이들은 마치 세상을 꿰뚫고 있는 양 자신들의 말에 힘을 주지만 그들이 모인 곳에서는 늘 뒷북 소리만 요란하다. 그들은 결코 이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이는 단 하나, 오로지 국민뿐이다. 처음부터 안철수라는 인물을 불러내 판을 벌인 것도, 그리고 지금까지 1년이 넘도록 흔들림 없이 그 인물을 지켜내면서 한국 정치의 미래를 향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온 것도 국민이니까. 그리고 국민은 지금 이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꿋꿋하게 가고 있다.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다수당의 다수파'로 당선됩니다. 1992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다수당의 소수파'로 당선되었고요.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소수당의 다수파'로,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수당의 소수파'로 대통령이 됩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안철수 교수는 정당의 도움 없이 그냥 '개인'인데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당에서만 정치 지도자가 나오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정치하려면 정치하지 말라."는 말이 있겠습니까?"(<정치의 몰락>, 박성민 씀, 2012.2)

바야흐로 한국 정치의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난 1년간 어렵게 지켜온 '안철수 현상'이라는 이름의 새 정치를 향한 흐름을 이어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 정치와 대의 민주주의라는 경계 저 너머를 그려보는 상상력과 실험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말했듯, 정당도 대의 민주주의도 어디까지나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이 정당과 민주주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안철수의 생각'이 미처 다 채우지 못한 새로운 대한민국의 청사진과 이행 전략의 빈 곳을 채우는 일도 우리의 몫이다. 아직 가야할 길이 먼 우리에게 단일화에 목을 매고 있을 여유는 없다.

참고로, 한국리서치가 지난 11~14일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무소속 후보가 대통령이 돼도 상관없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긴 57.8%에 달했다. '무소속은 안 된다'는 응답은 33.2%에 그쳤다. 민주당 산하 민주정책연구원이 13~14일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무소속 후보 선호(36.3%)가 '정당후보 선호(44.5%)에 비해 낮았지만 호남에서는 거꾸로 나타나기도 했다. (내일신문, 2012.10.19).

이는 민주통합당의 현실 인식이 국민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국민은 지금 다 찢어져 앙상하게 살만 남은 우산을 붙들고 서있느니 차라리 맨 몸으로 비를 맞는 편이 속 편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정치는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깝게 다가와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이해찬 대표, 박지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5일 오후 마포구 상암동 중소기업DMC타워에서 열린 의원 워크숍에서 대선승리를 다짐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이해찬 대표, 박지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5일 오후 마포구 상암동 중소기업DMC타워에서 열린 의원 워크숍에서 대선승리를 다짐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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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다

안철수 후보가 결심을 굳힌 지 겨우 한 달이 지났고,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은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각자가 빈 곳을 채우고 자신을 드러내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에 여기저기서 단일화에만 매달리고 있는 모습은 답답하기만 하다. 지금 이대로 덜컥 단일화가 되거나 그것이 당연한 일이 돼버리는 순간 새 정치를 향한 흐름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출마 선언 당시 자신이 내걸었던 약속을 스스로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통합당은 아직 단일화를 위한 준비가 돼있지 않다.

단일화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시간이 많다 해도 같은 길을 가려 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 박근혜의 반대편에도 길은 여러 갈래다. 지금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은 민주통합당이 가려는 길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와 뒤늦게 부산을 떨고 있는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의 모습은 안타깝다.

어제 안철수 후보 측 박선숙 선대위원장은 기자들을 만나 "국민이 단일화 과정을 만들어주면 그에 따르고 승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문재인 캠프가 보이는 혁신 움직임에 대해서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를 갖고 얼마나 진정성 있게 실천하느냐"라고도 말했다.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그러니 이쯤에서 단일화에만 매달리거나 부추기는 일은 그만두자. 그것 말고도 우리에겐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단일화도 정권 교체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대중은 틀리는 법이 없지."

영화 <아티스트>에서 영화 제작자가 배우에게 안타깝게 건넨 말이다. 국민은 분명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태그:#단일화, #안철수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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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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