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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열린 인권회복기도회
 1974년 11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열린 인권회복기도회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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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천주교 신부들은 '시위꾼'이었다.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과 소명을 믿기(1974년 9월 26일 '제1시국선언' 중에서)" 때문이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너무도 당연한 것들을 요구할 수 없던 날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유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잡혀갔다.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93년 선종)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지 주교는 1974년 7월 6일 로마 바티칸에서 돌아오자마자 김포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갔다. 유신반대 시위를 일으킨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아래 민청학련) 등을 도왔다는 이유였다.

김수환 추기경(2009년 선종)과 박정희 대통령의 면담 후 구금에서 풀려난 지 주교는 7월 23일 "유신헌법은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 주교는 이 양심선언으로 구속돼 8월 1일 비상군법회의에서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현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이유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는다.

지학순 주교의 투옥, 정의구현사제단 설립으로 이어져

1975년 2월 18일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 마중나온 인파와 기쁨을 함께나눴다. 지 주교 뒤에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 2월 18일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 마중나온 인파와 기쁨을 함께나눴다. 지 주교 뒤에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보인다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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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계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9월 24일 지 주교구가 교구장인 강원도 원주에서 시위를 한 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아래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을 결정한다. 이틀 뒤 서울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창립을 선언하고 '제1시국선언'을 발표했다. 10월 26일 사제의 길을 준비하는 신학생들까지 민주주의 회복과 지학순 교수 등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해 12월 25일 0시 성탄축하 자정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추기경은 "지학순 주교의 투옥은 안일 속에 잠들었던 교회를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었다"고 평가했다. "지금의 정치현실은 정직한 현실비판을 건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나 기본인권을 박탈당해도 침묵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민주화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치자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두 손을 든다. 1975년 2월 지학순 주교는 당시 감옥에 있던 김지하 시인·이철 민청학련 의장·김동길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풀려났다. 그는 석방 이튿날인 2월 18일 치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는 불의가 판치고 비질서가 질서를 누르고 있다"며 "현 집권층은 더 이상 역사의 진실에 역행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이후에도 유신과 맞서 싸우는 현장 곳곳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있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정부의 탄압을 받아 백지광고 사태가 벌어진 <동아일보>에 1975년 1월 4일 전면광고도 실었다. 김지하 시인이 1975년 옥중에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양심선언을 할 때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석헌 선생이 1976년 명동성당에 모여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할 때에도 함께였다.

유신 끝난 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삼성비자금 폭로 등에 앞장서

6·10대회 이후 명동성당에서 열린 사제단 시위(1987년 6월 12일)
 6·10대회 이후 명동성당에서 열린 사제단 시위(1987년 6월 12일)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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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신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군사정권의 야만은 계속됐다. 정의구현사제단 또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1980년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글로 당시 정부가 '무장공비들의 폭동'이라고 주장했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렸다. 부산미문화원, 김근태 고문사건 등 수많은 시국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 발표와 시국기도회는 이어졌다.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 민주화운동 추모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정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축소·은폐했다'고 폭로했다. 이는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민주화 시위가 전국 곳곳으로 퍼지자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선언을 발표, 직선제 개헌을 약속한다.

이후 벌어진 임수경 방북사건·국가보안법 폐지운동·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사건·새만금살리기 운동 등 현대사의 주요 장면에도 정의구현사제단은 빠지지 않았다. 2007년 10월 '삼성비자금'사건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 곁에도 그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정의구현사제단은 용산참사 피해자와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시위꾼'으로 살고 있다.

이들은 22일 오후 7시 서울광장에서 그들을 '시위꾼'으로 만든 유신시대를 회고하며 시국기도회를 연다. 이는 유신선포 40년을 맞아 10월 17일 시작, 오는 28일까지 계속되는 '유신독재 알리기 위한 집중행동주간' 행사 중 하나다. 이날 시국기도회에는 정의구현사제단 창립의 주역으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함세웅 신부가 강론자로 나선다.


태그:#정의구현사제단, #지학순, #박정희,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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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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