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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부음은 늘 놀랍고 아프다. 머리 하얀 어른들도 그럴진대, 파랗게 젊은 사람들은 더한 게 당연한 일. 오십이 된 남자들이 어릴 적 고향 친구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빈소가 마련된 도시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다.

화장장에서도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졸고 전화 통화를 해야 하는 인생살이가 이 친구들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이야기는 빈소를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벌써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영화 감독, 신발가게 주인, 택시기사, 중소기업 사장, 모피회사 사장. 생김새만큼이나 하는 일도 각기 다 다르다. 그래도 어린시절 기억에는 의기투합, 신이 난다.   

포스터
▲ 연극 <여행> 포스터
ⓒ 극단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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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들의 기억 속에는 친구 돈을 빌려쓰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그래서 누구는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친구도 있다. 서로의 기억이 들어맞는가 하면 약간씩 어긋나기도 한다. 그래도 권커니 잣거니 마시는 술에 얼굴도 마음도 달아오르며 푸근해진다. 세상 떠난 친구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오고 원망스럽지만, 곁에 있는 친구와 나누는 농담에 어느 새 키득거린다.

고인의 누이동생이 홀로 지키고 있는 빈소. 누구는 술을 마시면서, 또 누구는 화투를 치면서 빈소를 지킨다. 그러던 중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나타나고 이쪽 저쪽에서 큰 소리가 오간다. 그간의 사연이 속 시원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강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장례식장에서 흔히 보고 듣고 겪는 일. 쉼 없이 오가는 지난 시절 이야기와 말다툼, 멱살잡이, 술과 화투, 미안하고 안쓰러우면서도 떠난 것이 야속해 마구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 묻어 두었던 지난 일들이 드러나면서 서로 부딪치고... 그러다 풀고...

이 친구들 역시 하나도 다르지 않다. 화장장에 가서도 친구의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누구는 밥을 먹고, 누구는 또 바닥을 구르며 울음을 터뜨린다. 고인의 몸이 지금 뜨거운 불 속에서 타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는 건 야속한 일이고,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고인을 사랑한 것이라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친구의 화장까지 다 마친 친구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이들은 관광버스가 떠나가라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러면서 잊을 만하면 운전기사를 향해 소리친다. "아저씨 내 친구가 죽었어요!"

이 친구들의 여행길에 나도 슬쩍 끼어들었다.(빨간색 원 안)
▲ 연극 <여행> 포토존에서 이 친구들의 여행길에 나도 슬쩍 끼어들었다.(빨간색 원 안)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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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다. 서로 같이 갈 방향을 맞춰보며 헤어질 준비를 하는데, 화장장에서 그토록 몸부림을 치며 울던 친구는 못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그 자리에 주저 앉고만다. 그리고는 말한다. "야, 오늘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맞다. 그럴 수 있다. 오늘 당신이, 아니, 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은 여행이다. 시간과 함께 가고 또 가야 하는 여행이다. 당신들이 기차를 타고 가서 날밤을 새우며 친구 장례를 치르고 온 것만 여행이 아니라, 우리들 사는 자체가 여행이다. 그런데 이 여행이 언제 어디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갑작스레 떠난 친구를 보내는 마음에는 분명 자신을 향한 마음이 들어 있다. 의식하든 못하든 세상 떠난 친구 자리에 나 자신을 대입시켜 보는 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어떻게 떠나게 될까, 뒤에 남을 우리 가족들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기조차 싫지만 엄연한 현실로 내 앞에 놓여있는 친구의 죽음. 거기서 우리는 또 알게 된다. 친구는 이렇게 떠나면서까지 가르쳐 주고 간다는 것을. 우리들 삶 속에 엄연히 들어 있는, 그러나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들어준다. 

몇 살 위의 선배 빈소에는 엎드려 보았지만 아직 친구 영정사진을 마주해 본 적 없는 나는 이 오십 살 남자들의 친구 조문 여행에 끼어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죽음 앞에서야 뭐 그리 따질 것 있겠는가.

그들의 농담과 추억과 음담패설과 눈물과 후회와 답답함과 억울함과 미련과 우정에 그냥 같이 웃고 울었다. 그리고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 인생을 보는 그들의 눈이 조금은 더 밝아졌으리라 생각하며 그들과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보니 보름 지난 달이 하얗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연극 <여행> (윤영선 작, 이성열 연출 / 출연 : 장성익, 임진순, 이해성, 박수영, 강일, 정만식, 김민선, 김동욱) ~ 10/7 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태그:#여행, #죽음, #중년, #윤영선, #이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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