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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고시촌도 가을이 완연하다.
▲ 노량진 고시촌의 추석 노량진 고시촌도 가을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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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가면 뭐해요. 친척들 한마디씩 하는 거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듣는 사람은 엄청 스트레스받아요. 조카들 용돈 줄 처지도 못되고 그냥 노량진에서 영어단어 하나 더 보는 게 나아요"

추석인 지난 9월 30일 오전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ㄷ독서실 앞에서 만난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의 준말) 김희연씨(30·가명)는 아침부터 독서실로 향했다. 독서실 책상의 폭은 어깨너비보다 약간 넓은 60cm 정도. 김씨는 추석 당일 아침부터 오후 10시까지 이곳에서 공부를 할 계획이다. 노량진에서는 수많은 공시생들이 추석에도 김씨처럼 이 좁은 공간에서 문제집과 씨름한다.

추석 당일, 상점들이 문을 닫아 고시촌 거리는 한산했지만 학원이나 독서실 안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노량진에도 보름달이 뜨고 감이 익었지만, 수험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석 특강을 듣거나 독서실·자습실을 찾았다.

노량진은 대입수능학원부터 각종 공무원 학원까지 온갖 학원과 고시원이 즐비한 대표적인 학원가다. 추석 연휴, 10대 후반의 수능수험생부터 30대 늦깎이 공무원 준비생까지 노량진 사람들은 가족들과 추석을 보내는 대신 비장한 각오로 책과 씨름하고 있다.

추석에도 문제집 놓지 않는 청춘들

노량진 골목골목마다 이런 홍보 전단지가 붙어있다.
▲ 추석 특강 홍보 전단지 노량진 골목골목마다 이런 홍보 전단지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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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학원들의 홍보경쟁으로 노량진 거리의 벽, 전신주 등은 홍보 전단지로 빈 공간이 없을 정도다. 명절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추석 몇 주 전부터 골목마다 추석 특강 홍보 전단지가 나붙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된 지난 9월 29일과 10월 1일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총 11시간(점심시간 제외) 진행되는 국어·영어·한국사·행정법 등의 집중 특강을 홍보하는 것이다.

올해의 9급 공무원 시험은 끝났지만 아직 10월 20일 3차 경찰공무원 채용 필기시험, 11월 10일 임용고시 그리고 11월 8일 대입수학능력시험 등이 남아있어 노량진 고시촌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흐른다. 추석 당일도 여느 때처럼 두꺼운 책과 암기장을 끼고 바쁘게 이동하는 수험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날 점심 노량진의 ㄷ경찰직 공무원학원 앞에서 만난 심영석씨(26·가명)는 "20일 뒤에 있는 경찰공무원 3차 시험을 준비하느라 고향에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전이 고향인 그는 추석 특강을 수강하고 특강이 없는 추석에는 자습실에서 공부를 한단다. 그를 따라 자습실을 둘러봤다.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펼쳐진 책과 노트북이 상당히 많았다.

공시생들은 추석에도 노량진을 떠나지 않는다.
▲ ㅇ경찰학원의 자습실 풍경 공시생들은 추석에도 노량진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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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경찰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심씨는 노량진에 온 이후 대전의 고향집을 잘 찾지 않았다. 심씨의 집은 큰집이라 명절 때마다 20여 명의 친인척이 그의 집에 오지만, 2010년 추석 이후 그는 줄곧 이곳 노량진에서 명절을 보냈다. 그는 "고향집에 가면 공부 흐름이 깨져서 좋을 것도 없고 시간도 아깝다"며 "명절에도 그냥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고시식당도 문을 닫은 추석 점심, 그는 분식집에서 홀로 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들이 노량진을 떠나지 않는 이유

노량진 고시촌의 한 분식집에서 한 공시생이 혼자 식사를 하고 있다.
▲ 혼자 식사를 하는 노량진 공시생 노량진 고시촌의 한 분식집에서 한 공시생이 혼자 식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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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고향집에 가지 않고 독서실에 가더라도 노량진 사람들이 추석에 무심한 것만은 아니었다. ㅎ고시원 앞 간이의자에 앉아 여자친구와 송편을 나눠 먹던 양인선씨(27·가명). 그는 "여자친구가 집에서 송편을 좀 가져왔는데, 딱히 먹을 데가 없어 밖에서 먹는다"고 말했다. '노량진 스타일'의 추석은 소박하고 따뜻했다.

양씨의 고향은 경북 김천. 하지만 그 역시 고향 방문을 공무원 시험 합격 뒤로 미루고 있다. 양씨를 비롯한 많은 수험생들이 명절에 고향에 가지 않는 이유는 "시험 준비 잘 돼 가니?" "이번엔 붙을 수 있겠어?" 등과 같은 질문 공세와 새내기 직장인이 된 다른 친척들과의 비교 때문이다. 그는 "이게 올해 추석음식의 전부다, 공시생이라고 왜 고향 가서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 먹고 싶지 않겠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ㅍ카페에서 공부를 하던 구성민씨(29)는 "2살 아래인 사촌이 작년에 ㅅ기업에 합격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한 사촌이었지만, 친척들은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더라"며 "부모님이 사촌을 부러워하는 게 싫고 눈치 보여서 (고향에) 안 간다"고 했다. 이어 그는 "추석 연휴가 오히려 더 괴롭다"며 고개를 저었다.

노량진 공시생들은 고향에 가는 대신 비슷한 처지의 수험생들과 어울렸다. 같은 카페에서 만난 대구 출신의 박성모씨(28)는 "노량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 많다, 학원이나 카페에 있으면 온갖 사투리가 다 들린다"며 "노량진에서는 고향 사람 만나기가 쉽다"고 했다.

"합격하면 츄리닝 말고 양복 한 벌 맞추려고요. 명절에 친척 다 모일 때 양복 딱 차려입고 내려가서 인사드리고 싶어요. 그거 생각하면서 버팁니다."

자신의 츄리닝 바지를 가리키며 박씨가 입을 뗐다. 카페 안 10명 중 5명은 박씨와 비슷한 복장의 '공시생'이었다. 한가위, 노량진을 떠나지 못한 청춘들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 츄리닝 바지를 입고 삼선 슬리퍼를 신은 이들은 가방을 메고 겨드랑이에 두꺼운 수험서를 끼고 학원으로, 자습실로 이동한다. 노량진 공시생의 꿈은 한결같다. 다음 명절에는 합격증 들고 멋진 모습으로 친척들 앞에 서는 것. 이뿐이다.


태그:#노량진, #고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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