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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달 숲 관찰일기> 겉그림
 <열두 달 숲 관찰일기> 겉그림
ⓒ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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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전형적인 농촌에서 나고 자랐다. 이맘쯤이면 친구들과 동네 뒷산으로 우르르 몰려가 정금 등과 같은 나무 열매들을 따먹기도 하고, 유독 굵게 열리는 탱자 울타리 앞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몰려들어 장대를 후려쳐 탱자를 따먹곤 하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밭가나 공터에 흔한 까마중도 이즈음에 잘 따먹었는데, 까마중이건 정금과 같은 산열매들이건 아주 잘 익은 것만 빼고 대부분 씁쓰름하거나 시큼했다. 탱자도 눈을 질끈 감고 즙을 빨아먹어야 할 정도로 시디시었기 때문에, 20년도 훨씬 전의 일들이건만 나도 모르게 당시의 추억들을 생각하노라면 입에 신 침부터 고이곤 한다.

이처럼 자랐기에 나도 모르게 풀과 나무, 들꽃 등에 눈과 관심이 우선 머물곤 한다. 이에 입속이 까맣게 되도록 열매들을 따먹던 기억과 추억들이 더해져 이즈음엔 그간 만난 풀과 나무들이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 궁금해지기 일쑤다.

하지만 생활에 묶이다보니 궁금하다고 언제든 산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애써 시간을 내 갔지만 궁금해 했던 것을 못보고 오기 예사다. 그러니 어제나 오늘(9월 23일)처럼 날씨가 맑아 산에 가기 딱 좋은 날에는 집안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자꾸 산으로 가곤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봄에 만난 노루귀와 족두리풀은 어떤 모습으로 가을을 보내고 있는지, 처녀치마들의 잎은 얼마나 자랐는지, 그냥 천남성 말고 줄무늬천남성은 열매가 어떤지, 어디어디쯤에 있던 풀이나 나무들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등, 자주 다녔던 산길에서 만난 풀과 나무들의 안부와 가을 모습이 궁금하기만 하다.

화려한 꽃 외에 잎이나 줄기까지 담은 책

이런지라 1년 동안 숲으로 가 식물들의 모습과 변화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 묶은 <열두 달 숲 관찰일기>(강은희 글과 그림, 현암사 펴냄)의 저자가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다. 난, 묶인 일들이 많아 좋아하는 꽃과 나무들을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산행마저도 포기할 때가 많은데, 1년 동안 거의 매일 도시락 싸들고 산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음 자체부터 그저 부럽기만 한 것이다.

귀룽나무, 생강나무, 노린재나무, 참나무, 덜꿩나무, 애기나리, 여러 가지 제비꽃, 줄딸기, 선밀나물, 며느리밑씻개, 야생벚나무, 개별꽃, 초피나무, 자주괴불주머니, 누리장나무, 개암나무, 개머루, 작살나무, 사위질빵, 물봉선….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50여 종의 식물들. 저자는 우리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풀과 나무들이 언제 어떤 모습의 싹을 틔우고 어떤 과정과 모습으로 꽃을 피우는지, 어떤 열매를 맺어 어떤 방법으로 떨어져 나가는 방법으로 번식을 도모하는지, 어떤 모양의 잎눈과 꽃눈을 만들고 어떤 모습으로 겨울을 나는지, 이들 주변에는 어떤 동물들이 오가는지 등을 직접 그린 그림을 곁들여 풀과 나무들의 일생을 들려준다.

사실 이런 식물들은 나처럼 식물관련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관심만 있으면 당연히 알고 있을법한 그런 것들이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식물에 관심을 두고 걸으면 산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이런지라 이들 식물들의 꽃은 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또한 어지간한 자연관련 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골 주인공들이기도 한지라 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대개 어떤 식물의 가장 화려한 모습이랄 수 있는, 그래서 쉽게 볼 수 있는 꽃에만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다. 여타의 자연 관련 책들 역시도 대부분 꽃을 기본으로 그 식물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을 우선 말하곤 하는지라 어떤 식물의 꽃은 잘 알지만 잎이나 줄기 등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꽃은 그 식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식물의 가장 돋보이는 모습인 꽃이나 특징만으로 그 식물을 온전히 알았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식물의 꽃과 두드러지는 특징만으로 그 식물을 기억하는 것을 얼굴이나 명예, 직업 등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어떤 한 사람을 '어떤 사람일 것'이라 판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면 비유가 적절할까?

어떤 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마음 씀씀이나 말 씀씀이, 사람에 대한 배려, 가치관이나 생활방식 등 다양한 모습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식물을 제대로 알려면 그 식물의 다양한 모습과 계절에 따른 변화와 특징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식물을 제대로 알려면 틈틈이 다가가 다양한 모습을 만나본다든지 관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식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무엇을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막연할뿐더러, 나처럼 마음은 있지만 일상이 우선이다 보니 시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 <열두 달 숲 관찰일기>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130여 개의 세밀화로 만나는 아름다운 숲속 보물들

귀룽나무가 새순을 내고 있는 모습 세밀화
 귀룽나무가 새순을 내고 있는 모습 세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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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이 무렵 금빛 후광을 두른 나무를 숲에서 만난다면 그건 보나마다 귀룽나무다. 봄이 오긴 오나보다. 귀룽나무의 금빛 후광은 봄이 숲에 곧 도착할거라 알리는 전광판 같은 역할을 한다. 옛날의 귀룽나무는 지표목 역할을 해서 새잎이 피는 것을 보고 농사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자연의 들숨 날숨에 모든 것을 맞추어 살던 시절, 귀룽나무는 봄을 알리는 기특한 나무 역할을 톡톡히 했으리라.

4월 20일: 오늘 아침, 다람쥐 한 마리가 꽃이 잔뜩 핀 앵두나무 가지를 바삐 타고 돌아다니며 재주넘기를 한다. 다람쥐의 희고 보얀 배가 보일 때마다 앵두꽃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꽃잎을 실컷 떨어뜨린 다람쥐는 이제 조금 굵은 줄기에 앉아 입으로 뒷발도 닦고 꼬리도 손질한 다음 앞발을 들어 올려 귀와 머리도 쓰다듬듯 매만진다. 함께 나란히 서서 숨죽이고 다람쥐 재롱을 구경하던 젊은 엄마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에게 갑자기 한마디 한다. "봐, 다람쥐도 아침엔 세수를 하잖니?" - <열두 달 숲 관찰일기>에서

저자는 봄꽃들이 본격적으로 피어나고 많은 식물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특정의 숲길을 정해 매일 오가며 만나는 풀과 나무들의 날짜와 날씨, 계절에 따른 변화를 조목조목 기록함으로써 이들 식물들의 일생을, 이들 주변의 곤충과 동물들과 숲속의 변화를 세밀화와 글로 전해 줌으로써 어떤 식물인지 알려주는 동시에 어떻게 무엇을 관찰해야 하고 생태일기는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책에서 거의 매일 관찰하다시피 하는 식물은 48종. 저자가 직접 그린 책속 세밀화는 130여 컷. 아린이 벗겨지고 잎이 막 펼쳐지려는 상태와 솜털이 부슬부슬 달려 있는 새잎, 개미떼로 새카만 벌레알집, 애벌레가 자라고 있는 열매속 등 숲속 식물들이 겪는 변화와 이들 식물들과 함께 다양한 변화를 연출하는 숲속의 열두 달 풍경을 생생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이런지라 자료로서의 가치도 클 것 같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산행을 자주 하며 처음 보는 꽃은 사진으로 찍어 이름도 알아보고 관심을 둔 덕분에 책속에서 만난 풀과 나무들을 나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애기나리와 참나무, 누리장나무, 팥배나무, 물봉선 등 일부 식물들의 열매나 일부 모습만 알 뿐, 나머지 모습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이들 식물들의 가장 화려한 모습인 꽃은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호감이 가는 어떤 사람의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알고 싶은 것처럼, 사실 그동안 풀과 나무들을 꽃으로 우선 만나며 그 식물들의 다른 모습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하지만 산행마저 더러 접어야 할 정도로 먹고 사는 일에 치여 살다보니 결코 쉽지 않았다. 때문에 늘 걸려있다가 여차하면 답답해지곤 하는 체증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던 터였다. 여하간 이 책 덕분에 그동안 참 많이 궁금해 했던 것들을 알게 되어 이 가을 먹고 사는 일에 묶이고 끄들려 살아야 하는 내 삶의 고달픔이 덜 외로운 것 같다.

야생화는 야생에서만 자라게 해야?


- 프로필에 현재 '개방형 생태정원-도토리 EH'를 준비 중이라는 부분이 있던데?
"가족이나 일부 아는 사람들만 알고 드나드는 그런 정원이 아닌 야생화를 알고 싶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개인 생태정원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야생화를 길러본 사람들 중에, 우리 야생화는 기르기 골치 아프고 관리도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야생화들이 화원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외국산 원예품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꽃 크기도 작고 수수한 것이 많다보니 집에서 기르기에는 꽃이 좀 별로라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은 것 같고요. 그동안 외국산 원예품종에 눈이 맞춰지다보니 더 그런 것 같아요. 20여 년간 야생화를 기르고 관찰한 것들을 바탕으로 이런 인식들을 바꾸는 데 이런 개방형 생태정원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랍니다. 서양에는 이런 정원들과 가이드북들이 있는데 우리에겐 아직 좀 낯설기도 하죠. 하지만 정착만 제대로 되면 자연생태 교육공간으로도 무척 좋을 거예요."

<집에서 기르는 야생화> 겉그림
 <집에서 기르는 야생화> 겉그림
ⓒ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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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프로필을 보다가 저자가 현재 준비중이라는 '개방형 생태정원'이 궁금해 저자에게 물어보니 이처럼 답한다. 참고로 저자(강은희)는 2004년에 처음으로 야생화를 그리기 시작, 이렇게 그린 그림으로 두 번의 전시회를 가진 핸드메이드 작가다.

저자가 쓴 다른 책으로는 <쉽게 찾는 수생식물>(공저)과 <집에서 기르는 야생화>가 있다. 이중 <집에서 기르는 야생화>를 본 어떤 분이 '야생화는 야생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좋다'고 반박한 적이 있다. 과연 정말 그럴까?

종자가 금값보다 비싸다는 요즘이다. 농작물 종자만 비싼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는 외국에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고 외국산 원예품종들을 팔고 사고 그리고 사랑하고 있다. 또한 관공서나 학교의 정원, 길에도 외국산 원예품종들이 대부분 심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야생화 씨앗만 조금 받아다 뿌려주는 정도로 멋진 야생화 정원을 가꿀 수 있을 산속 사찰에마저 화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이런 외국산 원예품종들이 거의 심어지고 있다. 참 아쉬운 일이다.

현실이 이러니 야생화를 키워볼 수 있도록 길잡이 하고 있는 <집에서 기르는 야생화>(현암사, 2010) 같은 책이 차라리 고맙지 않은가. 이런 책을 길잡이 삼아 제대로 키워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에도 수출해 보면 좀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 김현자 

덧붙이는 글 | <열두 달 숲 관찰일기>ㅣ강은희 (지은이) | 현암사 | 2012-08-25 ㅣ정가 16,800원



열두 달 숲 관찰일기 - 가까운 작은 숲을 천천히 그리다

강은희 글.그림, 현암사(2012)


태그:#생태일기, #귀룽나무, #관찰일기, #숲,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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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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