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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 성벽이 집 담벼락이 됐습니다.
▲ 전라좌수영성벽 전라좌수영 성벽이 집 담벼락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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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여수지역 초등학생 40명과 함께 지금은 흔적만 남은 전라좌수영성을 둘러봤습니다. 비좁은 골목길에서 만난 좌수영성 터를 보니 비참함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성을 이루고 있던 돌들이 가정집 축대와 담벼락으로 변했더군요. 그 흔적을 보니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도 세워야 하겠지만 장군이 걸었던 좌수영성 복원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동상이 있습니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몇 안 되는 사람, 이순신 장군 동상입니다. 그는 왕이 자신을 미워해도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건 바보였죠. 또,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수장시킨 무섭도록 치밀한 전략가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성스러운 인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400년 전에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울고, 웃고 떠들었겠지요. 홍수처럼 밀려오는 적에 대한 보고를 들은 날은 잠을 설치기도 했을 겁니다.

'인간 이순신'이 고민하며 걸었던 길이 남아 있습니다. 남도 땅 끄트머리에 있는 여수가 바로 그곳입니다.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진남관은 장군의 흔적을 그나마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주위를 살펴보면 장군과 관련된 많은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해군사령부인 전라좌수영성

비좁은 골목길에서 찾은 전라좌수영성 흔적입니다.
▲ 골목길 비좁은 골목길에서 찾은 전라좌수영성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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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성 안에 있던 우물입니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도 물을 마셨을까요?
▲ 우물 전라좌수영성 안에 있던 우물입니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도 물을 마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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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을 보호하기 위해 쌓아 올린 성벽이 지금은 담벼락으로 변했습니다.
▲ 성벽 전라좌수영을 보호하기 위해 쌓아 올린 성벽이 지금은 담벼락으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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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순신과 연관된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싶었겠지만 역사란 게 그리 쉽게 사라지나요. 지금도 진남관 주변을 둘러보면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장군이 적을 섬멸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부관들과 긴 밤을 보내던 곳도 있습니다. 달 밝은 밤에 길을 나서 초병의 고단함을 위로하던 길도 있고요. 또, 지친 발길을 멈추고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전장에 나선 군인의 고단함을 씻었던 우물도 있습니다.

여수에는 전라좌수영, 지금으로 말하면 해군사령부쯤에 속하는 진남관과 본영을 방어하기 위해 쌓아 올린 길이 1740미터의 성곽이 있었습니다. 진남관은 잘 아실 텐데, 좌수영성은 모르는 이가 많더군요. 그도 그럴 일이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이 성은 순천 낙안읍성보다 300미터 더 길고 우리나라 대표적인 동래읍성(1900미터)보다 조금 작은 규모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좌수영성은 사라진 지 오랩니다. 일제가 그 흔적을 모두 없앴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성벽이 모두 사라지지 않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남아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성벽 흔적을 찾으려면 비좁은 골목길을 서성거려야 합니다. 고생스럽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습니다.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 날... 산이 삼일 밤낮 울었다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입니다.
▲ 충민사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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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내 이순신 장군 영정입니다. 한창진씨가 초등학생들에게 이순신 장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이순신 장군 영정 충민사 내 이순신 장군 영정입니다. 한창진씨가 초등학생들에게 이순신 장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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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고산 정상에서 바라 본 여수세계박람회장입니다.
▲ 여수세계박람회장 종고산 정상에서 바라 본 여수세계박람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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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다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성을 이루고 있던 돌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옵니다. 현재 좌수영성벽은 가정집 담벼락으로 변했습니다. 지난 15일 오후, 저는 '전라좌수영성 걷기'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이 행사는 전남여수교육지원청의 지원으로 열렸답니다.

이날 40명의 초등학생과 함께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태를 체험했는데, 과거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학생들과 함께 전라좌수영성을 둘러보기 전에 충민사에 들렀습니다. 이곳은 장군과 함께 7년 동안 전쟁에 참여한 박대복이라는 부하가 세운 사당입니다.

이 사당은 통영의 충렬사보다 62년,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이 앞서 장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으로는 국가에서 처음으로 인정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이순신 장군과 전라우도절도사 이억기, 그리고 보성군수 안흥국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학생들과 참배를 마치고 충민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종고산에 올랐습니다. 이 산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 날, 산이 삼일 밤낮을 울어 그 소리가 북소리 같기도 하고 종소리 같았다고 해 장군이 종고산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입니다.

좌수영성은 무려 6년에 걸쳐 쌓은 성

여수 종고산 정상에 있는 북봉연대입니다. 제단과 봉수대 역할을 했습니다.
▲ 북봉연대 여수 종고산 정상에 있는 북봉연대입니다. 제단과 봉수대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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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공격을 막기위해 잘 쌓아올린 성벽입니다. 지금은 가정집 담이 됐습니다.
▲ 성벽 적의 공격을 막기위해 잘 쌓아올린 성벽입니다. 지금은 가정집 담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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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에는 '북봉연대'라는 곳이 있는데, 봉수대와 제단 구실을 했던 곳입니다. 북봉연대는 좌수영 관내 5관 5포 관청에서 횃불과 연기로 정보를 주고받던 곳이고, 좌수영에 사는 관리와 주민들의 무사 안녕과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제단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종고산을 내려오면 진남관을 마주하게 됩니다. 진남관 주위로 전라좌수영 성이 있었지요. 좌수영의 최고 책임자는 수군절도사입니다. 장군이 수군절도사로 근무한 곳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정삼품으로 지금의 해군 소장의 벼슬이었죠.

전라좌수사는 5관인 순천도호부·보성군·낙안군·고흥현·광양현과 다섯 군데 수령과 5포인 사도·방답·여도·녹도·발포의 첨사와 만호 그리고 권관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해군사령부를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습니다. 좌수영은 1479년 조선 성종 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6년에 걸쳐 성을 쌓아 올렸죠.

그 성이 좌수영성입니다. 지금은 성벽이 사라졌지만 모두 없어진 건 아닙니다. 진남관 주변 좁은 골목길을 걸으면 옛 성터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곳은 '막돌 쌓기'의 흔적이 남아있고, 또 다른 곳은 사각형으로 잘 다듬어진 돌들이 층을 이루고 있더군요.

골목길에 남은 성터라도 잘 복원한다면...

성벽에 색을 입혔습니다.
▲ 색칠 성벽에 색을 입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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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04호인 진남관 입구입니다.
▲ 진남관 국보 제304호인 진남관 입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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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포루와 동문·서문·남문이 있던 자리도 둘러봤습니다. 성 안에 있던 우물도 찾았습니다. 1740미터 좌수영성터를 둘러본 후 참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화문 대로에 우뚝 서 있고 여수 이순신 광장에도 멋진 동상이 있지만, 그가 걸었던 좌수영성은 가정집 축대와 담벼락으로 변했기 때문이죠.

지금은 성터를 온전히 복원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나마 골목길에 남아있는 성터라도 잘 복원해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길 따라 좌수영성터를 둘러보면서 학생들은 이순신에 대해 좀 더 가깝게 느꼈겠지요? 비좁은 골목길에 좌수영성 흔적이 그나마 남아있어 다행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전라좌수영, #진남관,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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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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