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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30대가 대부분인 객석에서는 연극 중반부터 이쪽 저쪽에서 번갈아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들은 공연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양공주'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어릴 때 양공주, 양색시, 양xx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어 알고 있던 나보다 오히려 그들이 극중 상황에는 더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은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지촌, 그 중에서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의 작고 허름한 집. 일곱 개 쪽방에는 늙고 병든 할머니들이 각자 방 한 칸 씩에 몸 담아 살고 있다. 젊은 시절 기지촌 클럽에서 미군을 상대하던 여성들이다. 이 집에 미국에서 논문 자료 조사를 위해 젊은 여성 '하나'가 오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포스터
▲ 연극 <일곱집매> 포스터
ⓒ 극단 해인, 공상집단 뚱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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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질 당하는 삶을 살게 된 사연이 어디 범상하랴만은, 누구는 거기 가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해서, 또 누구는 식구들 먹여살리러 왔다. 동생들 학비에 식구들 뒷바라지하며 살았지만 식구들은 돈은 얻어쓰면서도 존재 자체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거기다 아이라도 생기면 깜둥이라고, 튀기라고 못살게 구니 도저히 버틸 길이 없다.   

이들의 한 평생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 일. '화자' 할머니 말처럼 '가슴 속에 둑을 쌓아놓고 (눈물을) 거기에 담지 않고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둑이 무너질까봐'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산 세월이다.

미국으로 입양보낸 혼혈 아들이 찾아왔을 때 '엄마는 죽었다'고 전해달라며 나타나지 않았던 '순영'할머니. 처음에는 하나의 인터뷰를 거절하지만 숨진 지 며칠 지나 발견된 옆의 할머니를 보면서, 또 돈 벌러 한국에 온 필리핀 여성 써니를 보면서 가슴 속 깊이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고, 한 때는 달러를 버는 '애국자'라고까지 불리웠지만 지금은 아무런 관심과 도움도 받지 못하는 독거노인으로 살아가는 현실, 그리고 미군기지 철수 운동을 하는 활동가 '상철'과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춘권'이 오가며 극을 구성한다.

할머니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런 저런 화해가 이루어지는 듯도 하지만, 끝내 서로가 '불가능한 거리, 닿을 수 없는 거리(impossible distance)'를 확인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어떠한 공감과 이해도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을 수는 없기에. 그래도 한 가닥 위안은 우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안아줄 수는 있는 존재라는 것.

연극의 주인공들인 안정리 기지촌 할머니들과 10년을 함께해온 '햇살사회복지회'의 우순덕 대표를 공연 전에 만났다. 다음은 우 대표와의 일문일답.

- 기지촌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인데, 각별한 느낌일 것 같다.
"고맙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도와줬기 때문에 이렇게 연극으로까지 만들게 됐다. 이 연극을 통해서 젊은 세대는 사고의 확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끌려간 것이고, 미군 기지촌 여성들은 자기 발로 찾아온 것이라는 단선적인 인식을 넘어서서 여러 각도에서 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대표(사진 왼쪽)
▲ 연극 <일곱집매> 공연을 기다리며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대표(사진 왼쪽)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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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동안 기지촌 할머니들과 함께했는데 그 사이에 사회의 인식이 좀 변했나?
"기지촌 할머니들의 삶은 전쟁과 미군 주둔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구조와 맞물려 있다. 무관심으로 방치하거나 손가락질만 해서는 안 된다. 10년 전보다야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 할머니들 쪽은 어떤가. 10년 동안 그분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하다.
"할머니들은 오래도록 함께 일하고 이웃해 살아왔으면서도 서로 절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만큼 힘든 것이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은 달라졌다. 늘 '내 죄'라고 하던 분이 '용기를 내서 내 이야기를 하겠다, 고맙다'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고, 거기다가 마음도 잘 열지 않는 할머니들과 10년을 함께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첫째는 신앙의 힘이다. 신학교에 다닐 때도, 사회복지 공부를 할 때도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 일할 수 있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할머니들의 힘이다. 조금씩 마음을 여는 할머니들이 내 신앙과 삶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이 일만 생각하며 하루 하루 살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웃음)"

- 기지촌 할머니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 아니면 반대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분들의 삶을 개인의 고통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눠야 할 문제다. 그분들이 자기들이 당한 삶의 고통을 증언하는 것을 넘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아 드리고 친구가 되어드렸으면 좋겠다. 관심 가져달라."

공연 후 대본을 쓴 이양구 작가와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가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활발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졌다.

관객과의 대화(왼쪽 이양구 작가, 오른쪽 이나영 교수)
▲ 연극 <일곱집매> 관객과의 대화(왼쪽 이양구 작가, 오른쪽 이나영 교수)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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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당사자들에게 강제였느냐, 자발적이었느냐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며 당시의 상황이나 사회구조 속에서 그들이 제도 차원의 폭력을 포함해 어떤 폭력을 당했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기지촌 여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일이 의미있는 것은 우선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통해 잊었던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며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점, 두 번째로는 역사를 보는 관점을 좀 더 넓힐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할머니들이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치유되어 간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은 이제 시작을 알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문 배우들이 일반 관객과 만남으로써 접점을 가지게 되었고, 순영 할머니의 말대로 '다시는 입이 안 열릴 수도 있으니까' 이제라도 적극적으로 귀 기울여 '살아있는 증거'인 그들만의 이야기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함께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연극 <일곱집매> (작 : 이양구, 연출 : 문삼화, 출연 : 김지원, 김시영, 한철훈, 조시현, 최설화, 유명상, 나다래) ~ 9/9 까지, 연우소극장 * 기지촌 복지를 위한 (사)햇살사회복지회 031-618-5535



태그:#일곱집매, #햇살사회복지회, #기지촌, #기지촌 여성,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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