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지난 21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분향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지난 21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분향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파격 행보가 연일 정치권의 화제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민주통합당이다. 박 후보가 야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허를 찔린 모습이다. '환영'과 '정치 쇼'라는 상반된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온 이유다.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 중 한 명인 안철수 서울대 교수도 지난 23일 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봉하마을을 방문하고 이에 대해 문재인 의원이 바람직하고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것이 국민이 원하는 정치라고 생각했다"며 한 마디 거들었다.

박근혜 후보의 돌발 행보에 '멘붕(멘탈붕괴)'이 된 것은 야당뿐이 아니다. 21일 현충원 참배 후 봉하마을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인사는 새누리당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박 후보의 일정을 챙겨야 할 실무자조차 당일 오전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봉하마을 방문 준비에 나섰다. 박근혜 후보를 전담해서 취재하는 기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봉하마을 간다'는 말에 '멘붕' 기자들 "아, 예"

대선후보로 선출된 다음 날(21일) 오전 박 후보는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대통령, 대통령 후보, 당 대표 등 주요 정치인들이 '거사'를 앞두거나 마친 후 검은 옷을 입고 비장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참배하는 것은 관행처럼 되어 있다.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로 시작하는 판에 박힌 말이 예상되기 때문에 펜기자들에게 흥미로운 취재는 아니지만, 이른바 '그림이 된다'는 이유로 TV·사진 기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취재다.

박 후보의 현충원 방문 때도 TV·사진 기자 수십 명이 대거 몰린 반면, 펜기자들은 3~4명에 불과했다. 검은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박 후보는 굵은 빗줄기 속에 60여 명의 전·현직 의원들과 함께 현충원에 도착했다. 지난 15일 열린 육영수 여사 추도식에서도 입었던 옷이다.

박 후보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차례로 참배했다. 아버지인 박 전 대통령 묘역 앞에 선 박 후보는 간단한 묵념만 했을 뿐 다른 묘역에 비해 머문 시간도 길지 않았고,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었다. 특이 사항이라고 해봐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참배가 전부였기 때문에 현충원 방문 일정은 아무런 '사건'없이 마무리되는 듯 했다.

참배를 모두 마친 박 후보가 현충원을 나설 즈음 몇 안 되는 기자들이 따라 붙었다. 그러나 특별히 물어볼 질문이 없었던 한 기자가 가볍게 던진 질문이 '화근'이 됐다. 이 기자는 "오늘 오후에 뭐 하세요"라고 물었고, 박 후보의 입에서는 "봉하마을에 가요"라는 답변이 나온 것. 순간 기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너무 당황한 기자들은 왜 봉하마을에 가는지, 봉하마을에 가면 고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씨를 만날 것인지, 봉하마을에 가는 의미가 뭔지 등 후속질문조차 하지 못한 채 "아, 예"라며 입을 닫았다.

'집권여당 대선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에 참배하기 위해 봉하마을에 간다'는 대형 뉴스를 접한 순간이었지만, 너무나 예상 밖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자들도 '멘붕'에 빠진 것이다.

봉하마을 방문에 대해 박 후보의 선거캠프 내에서는 '오래 전부터 기획됐다'고 해명했지만, 정작 방문 일정을 알고 있던 인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특히 새누리당은 박 후보의 입에서 나온 갑작스런 오후 일정을 뉴스로 접했고, 그제야 허겁지겁 봉하마을에 연락을 취하는 등 준비에 나섰다. 이 때문에 민주통합당으로부터 "사전에 통보도 하지 않은 예의 없는 방문"이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사전에 준비된 일정이 아니었다는 정황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이원기 당 행정실장이 의전, 경호, 행정 등 1인 3역을 소화할 정도로 급박하게 일이 진행됐다. 특히 당과 박 후보의 비서진 사이에 제대로 의사소통이 안 되다 보니 헌화 문제 등 현장에서의 준비 과정에도 문제가 생겼다. 박 후보의 봉하마을 방문에 대한 대변인 브리핑도 당 명의로 나갈 것인지, 후보 캠프 명의로 나갈 것인지가 사전 조율이 안 돼 혼선을 빚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이희호 여사를 예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이희호 여사를 예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문제는 박 후보의 다음 행보였다. 당은 물론 박 후보의 선거캠프에서조차 박 후보의 다음날 일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자들은 이를 파악하기 위해 발을 굴렀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기자단 버스에서 박 후보의 대변인을 맡고 있는 이상일 의원에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상일 의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보 자신만이 안다"는 답변 외에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 여기자가 물었다. "내일 저희들 치마 입어요? 바지 입어요?" 지난 한 달여간 진행된 대선후보 경선 지역 순회합동연설회를 취재하면서 여기자들은 치마 대신 활동성이 좋은 바지를 입었다. 경선이 끝난 다음날 대부분의 여기자들은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치마를 입고 출근했다. 그러다 '봉하마을 방문'이라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치마냐, 바지냐"는 질문에는 불편한 치마를 입고 봉하마을까지 가서 현장 취재를 한 여기자의 불만이 녹아 있었다.

이상일 의원은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하더니 "청바지를 입는 게 좋겠다"고 답했다. 박 후보의 파격 행보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 셈이다. 실제 박 후보는 다음날인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휘호씨를 예방했다.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음에도 다시 이휘호씨를 방문한 것 역시 파격 행보의 일환으로 해석됐다.

'복도녀' 박근혜가 변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지난 22일 국회 기자실을 방문해 <오마이뉴스> 기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지난 22일 국회 기자실을 방문해 <오마이뉴스> 기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박근혜 후보의 파격 행보는 다음날 소통 행보로 이어졌다. 22일 오전 국회 기자실이 있는 정론관을 찾은 것. 하루에도 수십 명의 정치인들이 브리핑 등을 이유로 국회 기자실을 다녀가지만, 박근혜 후보의 경우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이후 5년 만에 처음이다.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한 박 후보의 입장은 주로 국회나 당사 복도에서 기자들을 만나 던진 한 마디로 언론에 노출됐다. '복도녀'라는 별명까지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만큼 기자들과의 접촉이 제한적이었다. 때문에 박 후보가 국회 기자실에 있는 수십 개의 언론사 부스를 일일이 돌며 기자들을 만난 것은 '불통'의 이미지를 깨기 위한 파격 행보의 일환으로 풀이됐다.

박 후보는 각 부스에서 만난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TV 카메라 기자들에게는 "무더운 여름에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니며 고생이 많다"고 위로했고, 기자들은 박 대표와 기념사진을 찍으며 "국민행복", "필승"을 외쳤다. 방송사 기자들을 만나서는 "사람이 성공하려면 꿈, 꼴(외모), 끼, 깡(오기), 끈(연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꼴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추켜세웠다.

박 후보는 특히 기자실 방문이 뜸했던 것을 의식한 듯 기자들과 인사할 때마다 "마음으로는 늘 찾아뵙고 싶은데 시간이 안 났다", "좋은 기사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유력 대권주자인 박 후보의 출현에 기자들도 들뜬 분위기였다. 모 언론사는 박 후보의 방문에 맞춰 바닥 청소를 했고, 일부 기자들은 점심 약속까지 미룬 채 박 후보와의 악수 순서를 기다렸다. 한 기자가 "새누리당 담당 기자 중에 박씨가 3명이나 된다"며 농담을 건네자, 박 후보는 "박씨는 본이 달라도 모두 '범박'으로 통한다, 단결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호응했다. 박 후보의 사인을 받는 기자도 있었다.

박 후보는 지난 23일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복도녀'라는 별명에 대해 해명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 후보나 지도부가 아닌 평의원이면서 왜 자꾸 복도에서 인터뷰를 하느냐고 하는 분이 있는데, 중요 현안이 나올 때마다 기자회견을 열어서 제 입장을 밝히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그래서 복도에서 하게 됐다"며 "그것도 안 하면 여러분이 얼마나 답답했겠느냐"고 덧붙였다.

이날 박 후보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김종인 전 선대위원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기자들을 만나) 말하는 것도 부드러워지고 했는데, 왜 자꾸 불통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앞으로 더 변할 거다. (언론이) 깜짝 놀랄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신동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박근혜 후보가 버틴 힘의 원천은 스스로 진화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인식 부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의 진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태그:#박근혜, #복도녀, #김종인, #노무현, #봉하마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