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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의 동아시아 역사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세력이 점차 동방으로 힘을 팽창했다는 뜻이다.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세동점에 노출되고 이로 인해 불이익을 입었다.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특수했다. 서세동점으로 불이익을 입기는 했지만, 얼마 안 있어 훌훌 털어버리고 그 자신도 서세(西勢)에 편승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의 변방에 불과했던 일본이 단기간 내에 세계적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일본의 변신은 근대화 개혁인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인 18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함포사격에 놀라 문호를 개방한 일본이 그것을 모방해서, 강화도 앞바다에서 함포사격을 가해 조선을 위협한 것. 일본이 서양의 침략방식을 모방해서, 조선 정부에 강제로 차관을 제공하고 이를 빌미로 이권을 강탈한 것. 이런 것들은 일본이 서양을 모방하고 서양의 동아시아 침략에 편승하기로 결심한 뒤에 일어났다.

이런 변신에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것이 1885년 3월 16일자 일본 <시사신보>에 실린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즉 탈(脫)아시아론이다. 일본 근대화의 기수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이 성공하는 길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조선·중국 같은 '나쁜 친구들'(원문 표현은 惡友)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고, 하나는 서양 문명국들과 진퇴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를 버리고 서양열강에 편승하자'는 이 노선은 1870년대 이후 일본의 급부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때부터 1945년까지의 역사를 보면 그런 패턴을 읽을 수 있다.

'나쁜 친구들'과 관계를 끊는 것... 일본의 근대 성장전략

아편전쟁 당시 중국을 침공한 영국 함대(왼쪽)의 모습. 서세동점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중국 광주시(광저우시) 해전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아편전쟁 당시 중국을 침공한 영국 함대(왼쪽)의 모습. 서세동점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중국 광주시(광저우시) 해전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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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을 집중 공략하던 서양열강은 1860년대 들어 기존 전략을 수정했다. 중국을 직접 공략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중국 주변의 나라들을 먼저 공략한 뒤 중국을 치자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한 것이다. 1866년에는 프랑스가, 1871년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공한 것은 이런 전략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전략은 1870년대와 1880년대에도 계속됐다.

그런데 1870년대에 이런 전략을 누구보다 최대한 활용한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이 1874년에 대만을 침공하고 1875년에 강화도사건을 도발하고 1879년에 오키나와를 합병한 것은 '중국 주변의 나라들을 먼저 공략한다'는 서양열강의 전략을 모방한 것이었다.

1876년 런던에서 발행된 시사 잡지에 '영국이 동아시아를 차지하려면 오키나와를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이 기사는 1877년에 일본 법무장관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보고됐고, 이때부터 일본은 영국에 뒤지지 않기 위해 오키나와 합병을 서둘렀다. 일본이 서세(西勢)에 편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18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서양의 강력한 후원을 얻지 못했다. 그냥 서양의 전략에 편승했을 뿐이다. 2류 국가였던 일본과 선뜻 제휴할 강대국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 최강이 되면서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이 서양열강을 스폰서로 끌어들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먼저,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인 1896~1898년에 러시아와 공조했다. 이 기간에 일본은 러시아와 공동으로 조선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1898년에는 '조선은 일본이 차지하고, 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한다'는 러일협정을 체결했다. 자국이 단독으로 조선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러시아의 동의를 끌어낸 것이다.

1882년 개항 이래 만신창이가 된 조선은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 다소 회복의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이 러시아의 동의 하에 조선을 단독 장악함에 따라, 대한제국 선포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은 서양 스폰서를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교체했다. 1902년에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영국을 스폰서로 만든 것이다. 그 뒤 일본은 러시아와의 약속을 파기했다. '조선은 일본이, 만주는 러시아가 확보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던 일본은, 만주까지 장악할 목적으로 1904년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새로운 스폰서를 확보한 다음에 기존 스폰서를 버리는 치밀함을 보여준 것이다.

서양 '스폰서' 등에 업고, 동아시아 변방에서 세계 정상으로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전에서 전사한 러시아 병사들을 위한 위령비(왼쪽)와 위령비 옆의 일본, 러시아 국기(오른쪽). 찢어진 러시아 깃발이 인상적이다. 대마도 북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차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찍었기 때문에 사진이 약간 불안정하다.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전에서 전사한 러시아 병사들을 위한 위령비(왼쪽)와 위령비 옆의 일본, 러시아 국기(오른쪽). 찢어진 러시아 깃발이 인상적이다. 대마도 북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차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찍었기 때문에 사진이 약간 불안정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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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이 일본의 우세로 굳어진 뒤인 1905년 7월과 8월에 일본은 서양과의 파트너십을 한층 더 공고히 했다. 7월에는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라는 합의를 도출하고,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조선은 일본이, 인도는 영국이'라는 합의를 성사시켰다. 이처럼 일본은 조선을 강탈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영국·미국의 지원을 확보했다.

서양 스폰서의 후원 하에 동아시아를 침략하는 일본의 전략은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21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노골적인 침략의지를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은, 대전의 한 축인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가 일본과 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동아시아 침략에 편승하는 일본의 전략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인 워싱턴체제 하에서도 유지됐다. 일본은 영국·미국·프랑스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 대한 영향력을 구축했다. 이때 일본은 이미 세계 4강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일본이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된 것도 그것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일본은 서양열강에 대한 편승전략을 통해 불과 몇 십 년 만에 동아시아 변방에서 세계 정상으로 우뚝 올라섰다. 동아시아 전체가 서세동점으로 시련에 빠져 있을 때 유독 일본만 크게 성장한 것은 이 같은 전략 덕분이었다.

그런데 자만심에 빠진 일본은 서양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 정서가 반영된 것이 1931년 만주사변 도발과 1933년 국제연맹 탈퇴였다. 일본은 서양열강의 반발을 무시한 채 만주 침략을 밀어붙이고 국제연맹까지 탈퇴함으로써, 앞으로는 서양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일본의 홀로서기는 한동안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일본은 중국 본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서양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일을 벌이는 것은 무리였다. 이것은 일본의 국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1870년대 이후의 국가 시스템이 서양과의 파트너십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 같지 않은 스폰서들... 일본은 이대로 침몰하나  

미군정 하에서 찍은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기념사진. 두 사람의 키 차이를 통해 종속적인 미일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다. 사진 출처는 앤드루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
 미군정 하에서 찍은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기념사진. 두 사람의 키 차이를 통해 종속적인 미일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다. 사진 출처는 앤드루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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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홀로서기는 불과 14년도 버티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영국·소련과도 대립했다. 과거에 자신의 승승장구를 도와주던 나라들까지도 적으로 돌린 것이다.

결국 그것이 재앙이 되었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서양까지 적으로 돌린 것은 일본의 자충수였다. 일본은 미국에 뺨(핵폭탄) 두 대를 맞은 뒤에야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일본은 1945년 이후의 미군정하에서 기존의 전략을 회복했다. 서양에 편승하는 전략을 복구한 것이다. 

그것은 현대 일본의 성장을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경제·군사적 급성장은 미국의 후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미국의 아시아 대리인'이라는 명함이 없었다면, 일본의 눈부신 성장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일본의 스폰서인 미국의 국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또 일본을 내세워 중국·북한을 견제하던 미국이 요즘에는 중국의 지위를 인정하고 북한과도 계속 접촉하고 있다.

이제껏 일본이 한국·북한·중국에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 덕분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고 있으니, 일본의 국력도 예전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지난 140년간 서양의 동아시아 침략에 편승해서 급성장해온 일본의 기반은 그렇게 침몰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큰소리를 치고 있다. 최근 일본이 한국·북한·중국을 한꺼번에 자극하고 있는 데서 드러나듯이, 일본은 자국의 존립기반이 침몰하고 있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더 이상 믿고 의지할 만한 서양 스폰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예전에 했던 것처럼 한국·북한·중국을 여전히 깔보는 일본을 지켜보는 것만큼 서글픈 일도 없을 것이다.


태그:#서세동점, #탈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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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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