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냐옹! 냐옹! 아빠 놀아줘" 하면서 나그네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옛날 어느 날의 추억
▲ 아기고양이 똥가리 "냐옹! 냐옹! 아빠 놀아줘" 하면서 나그네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옛날 어느 날의 추억
ⓒ 조영삼

관련사진보기


겨울의 긴 잠에서 막 벗어난 후줄그레한 개구리 되어 아들내미와 엄지엄마와 함께 거닐었던 추억의 공원을 쓰디쓴 공허에 휘둘려 발길 닿는 대로, 바람이 이끄는 대로 마냥 걸어보았습니다.

허허로운 발자국
'똥가리'의 체취를 더듬는다.
흔적은 피안의 저 쪽
조막손 같은 연못은 철 없는 오리처자 휘젓는 세상
애달픈 떠꺼머리 오리총각 추파를 던지네


아스라한 옛 추억, 찍히는 깊은 회한
회한도 외로움도 생활의 한 조각인데
갈 곳 없는 나그네는 어느 결에 들이 마실꼬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습니다. 생각의 마디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소중했던 추억의 조각들도 내 안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백치가 되어버린 느낌, 허허로운 기운만이 온 몸을 칭칭 동여매었습니다. 텅 빈 공간 속에서 잡히지 않은 그 무엇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한 해도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거리던 지난 연말. 나그네는 생과 사의 심연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세월, 다섯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없을 만큼 이런저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이번에는 그 위험수위가 정도를 넘었습니다.

"참 기구한 운명이요. 조 형은!"

노무현, 김대중 양 대통령이 서거한 해에 두 분 타계 시점의 딱 중간 지점에서 나그네만큼이나 파란으로 점철된 생을 마감했던 친구가 아주 오래전에 나그네에게 내 뱉았던 절규에 가까운 단발마였습니다.

그랬습니다. 그 '기구한 운명의 종결자'연 하는 무엇이 이번에도 예고 없이 불현듯 덮쳐왔습니다. 일터에서 일을 하다가 우주의 빅뱅을 탄생시킨 대폭발에 버금가는, 적어도 나그네에게 있어서는 가늠키 어려운 어떤 충격에 의해 비몽사몽의 늪에 빠져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깨어나 보니 병원 중환자실이었습니다.

사건의 전개 과정은 이랬습니다. 촘촘하게 철제 기기들이 설치되어 있는 좁은 공간에서 접이용 사다리 꼭대기에서 일을 하던 중 사다리가 접혀지며 쓰러짐과 동시에 나그네는 조건반사적인 낙법으로 착지를 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착지 하는 와중에 나그네의 머리가 바닥에 깔려 있는 철제 콘베이어벨트 모서리에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맨 땅에 헤딩' 하면 그런 충격이 오나 봅니다.

물론 그 후론 전혀 기억이 없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곧 바로 병원으로 후송 되었고 응급처치 후 생사를 예측 할 수 없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찰나의 순간만 늦었어도 지금 나그네는 이 글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유혈이 낭자한 외상보다도 충돌로 인해 뇌출혈을 동반한 뇌졸중 수술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고 후 며칠 낮 며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염라대왕에게 물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봄날, 햇살 사이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고 흐릿한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나그네는 그 어떤 상황판단도 할 수 없는 완벽한 공황상태였습니다. 어린 아기의 옹알이처럼 웅얼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주변을 감싸고 있을 뿐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양 손은 왜 꽁꽁 묶여 있는지, 꿈인지 생시인지, 지옥인지 하늘나란지, 나는 누구고 웅얼거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지, 낮인지 밤인지, 아무런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똥가리와 독일 똥가리의 빙의

"냐옹! 냐옹! 아빠 놀아줘" 하면서 나그네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어느 날의 추억. 한국의 똥가리도 그랬다.
▲ 아기고양이 똥가리 "냐옹! 냐옹! 아빠 놀아줘" 하면서 나그네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어느 날의 추억. 한국의 똥가리도 그랬다.
ⓒ 조영삼

관련사진보기


그 후로도 스스로 가늠할 수도 없고 측정 자체가 무의미한, 내 안에서 다른 차원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짐작할 수도 없지만 깨어나서 나그네가 처음으로 한 외마디는 이거 였답니다.

" 똥가리 밥 줘야 하는데, 내 똥가리가 지금 배가 고파서 아빠를 애타게 부르며 울고 있을 텐데."

똥가리는 비가 몹시도 세차게 내리던 어느 스산한 날에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들녘에서 비를 흠뻑 맞으며 뼈 속까지 스미는 찬 기운 만큼이나 애잔하고 처연하게 울고 있던 아기고양이였습니다. 그 절절한 울음을 외면할 수 없어 나그네가 입양을 했고 이름을 똥가리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똥가리는 2년 전 이맘때에 '내나라 내 땅'에 유학 보낸 아들내미의 애칭이기도 하지요. '아빠의 똥가리', 풀어보면 나그네의 한 부분이라는 뜻이랍니다. 우리 마눌님은 '아빠 껍데기'라 부르더군요.

재작년 8월 15일, 공교롭게도 우리 해방의 날이군요. 아무튼 우리말을 자꾸 잃어가는 아들네미 똥가리를 정체성을 살려준다는 나그네의 욕심으로 엄마와 함께 내 나라 내 땅으로 떠나보내고 난 후 나그네는 허허롭고 공허한 마음을 추스릴 길이 없어 한동안 '멘붕'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그 후 처량한 기러기 아빠로 유학 간 똥가리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던 중 엄마 잃고 슬프게 울고 있는 아기고양이 똥가리를 만났고 나그네는 두 똥가리를 동일체로 승화시켜 키워오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유치원 졸업 때까지 독일 문화 속에서 자랐던 한국의 똥가리는 처음 한국에 유학 갔을 때는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얼마 동안은 독일 말도, 우리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완벽했던 독일 말은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했고, 토박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어눌했던 우리말은 아이들의 좋은 노리개 감이 되기에 충분했겠지요. 그때 나그네는 참 많은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괜한 엄마, 아빠의 욕심 때문에 이른바 '왕따'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 고민의 주된 요인이었습니다.

독일의 똥가리는 한국의 똥가리가 아기고양이의 몸을 빌려 한 몸이 되어버린 듯 하루 종일 나그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예전에 아들네미가 하루 종일 놀아줘도  "아빠, 또 놀아줘!" 하는 듯이 말입니다. 한국의 똥가리가 유체이탈이라도 했지 않았나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냐옹, 냐옹, 깨꿍! 아빠 또 놀아줘!"

나그네는 아기고양이 똥가리와 지지고 볶고 부데끼면서 기러기 아빠의 허전하고 공허한마음자리를 달랠 수가 있었습니다. 아기고양이 똥가리는 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서 고아 되어 떠돈 아이라 처음에는 눈꼽도 많이 끼었고 뗏국물이 줄줄 흘렀으며 벼룩이도 많았습니다. 나그네는 아기고양이를 깨끗이 목욕시키고 참빗을 사서 자그마한 몸뚱이 구석구석에 준동하고 있던 벼룩이들을 분리수거해 주었습니다. 벼룩이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그네는 인터넷 통화 시스템인 '스카이프'를 통해 독일 똥가리와 한국 똥가리의 맞선을 주선했습니다. 두 똥가리 녀석의 신기해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한국의 아들네미 똥가리가 말했습니다.

"아빠! 똥가리가 무지 귀엽다. 응! 안아봤으면 참 좋겠네. 깨꿍,깨꿍! 똥가라. 똥가라. 우리 똥가라."

독일의 아기고양이 똥가리가 말했습니다.

"냐옹, 냐옹. 쳇! 니도 똥가리잖아. 같은 똥가리면서 똥폼 잡지 말라구. 냐옹!"

붕어빵 아들 녀석이 유체이탈과 시공을 초월하여 독일 들녘에 뚝 떨어져서 마침 엄마 잃고(아니 아빠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울고 있던 아기 고양이의 몸에 빙의된 것이 아기고양이똥가리였습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처음 깨어나 첫마디가 '고양이 밥 줘야 한다'는 걱정을 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정상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나그네는 뇌를 심하게 다쳐 대수술을 받고난 직후였으니까요. 죽다 살아난 나그네의 절규에 가까운 외마디가 '하고 많은 말' 중에 고양이 걱정이었으니 주변 사람들은 감탄스럽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정상적인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어쨌거나 나그네가 수술 후 거의 일주일 만에 처음 거울을 보던 때, 거울 속에는 들풀 하나 되어 살아온 나그네가 아닌 '한 마리의 프랑켄슈타인'이 흉물스런 얼굴을 하고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머리통은 산산조각으로 깨진 조롱박을 굵직한 바늘로 꿰매어 임시로 복구해 놓은 듯한 형상이었습니다.

수술 부위에 해당하는 머리통의 딱 절반 정도만 멋대로 깎아놓은 머리카락 하며, 대지진의 여파로 지반이 뒤틀려서 좌우 아귀가 맞지 않은 지구처럼, 아물지 않은 수술 부위의 전후좌우가 뒤틀리는 바람에 실핏줄이 모두 터져서 달구어진 시뻘건 용광로가 되어버린 눈자위와 눈두덩과 그 주변부는 또 어떻고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요. 나그네가 봐도 괴물이나 다름없던 반수반인의 프랑켄슈타인에게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급보를 듣고 부리나케 엄마와 함께 대양과 대륙을 건너 날아온 아들내미 똥가리가 "아빠아!" 하고 달려와 안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때는 나그네가 거울을 보기 전, 수술 직후 겨우 의식이 돌아온 시점이었지요.

나그네는 순간적으로 '아! 뇌가 잘못 되어서 드디어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과 더불어 현실 인식과 상황판단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웃집 불구경도 아니고 '엄마 찾아 삼만리' 만큼이나 먼 거리를 그렇게 빨리 날아온 것도 잘 믿기지가 않았지만 그 시점에는 한국의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었고 알릴 겨를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조금 불가사의한 사연이 있지만 여기선 지면관계상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니까요.

우리 집에서 두세 시간 떨어진 요양소 방에서. 정말 작년 겨울은 끔찍히 추웠다. 유럽에서는 수백명이 얼어 죽었다. 그럼에도 똥가리와 엄지엄마는 손을 호호 불며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자주 면회를 왔다. 나그네는 사고 후 구레나룻을 기르기로 했다. 물론 똥가리와 엄지엄마의 허락을 받았다.
▲ 요양소에서 우리 집에서 두세 시간 떨어진 요양소 방에서. 정말 작년 겨울은 끔찍히 추웠다. 유럽에서는 수백명이 얼어 죽었다. 그럼에도 똥가리와 엄지엄마는 손을 호호 불며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자주 면회를 왔다. 나그네는 사고 후 구레나룻을 기르기로 했다. 물론 똥가리와 엄지엄마의 허락을 받았다.
ⓒ 조영삼

관련사진보기


무엇보다 나그네를 감격스럽게 했던 것은 이제 갓 초등학교 일학년인 아들내미 똥가리의 자연스럽고 스스럼없는 태도였습니다. 1년 반 전에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힘센' 아빠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혼자 몸도 잘 가누지 못한 괴물(?) 아빠를 아빠랍시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와 품에 안겼으니 나그네의 감격이 어디 보통이겠습니까? 아무리 아빠지만 무서웠을 텐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똥가리의 깨복쟁이 첫사랑이요 이웃친구였던 마리에따가 러시아 엄마, 독일 아빠와 함께 나그네를 면회 왔을 때 "옹켈 조(조 아저씨)!" 하면서 가까이 다가오다가 나그네의 평소와 다른 몰골을 보고 새파랗게 놀래서 도망가 버렸었지요. 무서웠던 게지요.

마리에따는 평소에 나그네를 만나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서 품에 안기던 아이였지요. 나중에 거울을 보니 놀라서 달아날 만하더군요. 프랑켄슈타인이 형님으로 대접해도 손색이 없었지요. 그런데 우리 똥가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마눌님 말마따나 '아빠 껍데기'가 맞긴 맞나 봅니다.

다시 혼자가 된 기러기 아빠

그 후 나그네는 병원 생활을 거쳐 기차와 버스로 두어시간 여 떨어진 오지의 시골에 위치한 요양소에서 두 달 가량을 보냈습니다. 뇌 손상에 기인한 재활치료를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유난히도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  나의 분신 똥가리는 여덟 살짜리 소년가장이 되어서 엄마 손을 잡고 버스와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그렇게 요양소로 삼사일이 멀다하고 나그네를 찾아왔습니다. 작년 겨울은 유럽대륙에 유래 없는 한파가 들이닥쳐서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었지요. 거리에는 동사자가 속출을 했고요.

나그네가 똥가리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아빠가 다 나을 때까지 이제부턴 니가 우리 집 가장이다. 아빠 면회 끝나고 집에 갈 때 어두운 길목에서 엄마를 잘 보살펴야 한다. 엄마는 겁이 많거든? 할 수 있겠지? 니는 아빠 똥가리니까."

똥가리가 나그네에게 말했습니다.

"알았어. 아빠! 걱정 마. 나는 아빠 똥가리잖아. 이따가 집에 갈 때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봐. 내가 용감하게 잘 하는거 보라구."

당시는 겨울 한복판이라 늦은 4시경이면 초유의 한파와 폭설이 뒤덮인 독일의 시골 길은 깜깜하게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요양소 방 창가에서 바라보면 아들내미가 앞장서서 엄지엄마보다 열 걸음이나  앞장서서 나그네에게 자랑하듯 으쓱대며 걷고 있는 모습이 멀리까지 들어옵니다. 땅거미가 내린 어둑한 거리에서 똥가리는 나그네가 개미만큼 가물가물해질 때 까지 하염없이 손을 흔들고 있는 베란다를 연신 바라보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댑니다. 자꾸 뒤를 돌아다 보면서 말이지요.

" 아빠아! 잘 있어. 또 올게. 아빠. 안녀엉!. 아빠, 잘 지내. 엄마는 걱정 마. 내가 잘 보살필 거야. 아빠! 안녕. 아빠아! 아녀엉!"

똥가리는 그렇게 골목길을 돌아설 때 까지, 아빠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든든한 가장이 되어 주었습니다. 나그네의 눈가는 당연히 촉촉이 적셔 왔고요. 머지않아 똥가리는 엄마 손을 잡고 다시 내 나라 내 땅으로 떠나갔습니다. 학교에 다녀야 했거든요.

재작년 똥가리를 유학 보낼 때는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서 아쉬운 애절양이 되어 작별을 했지만 이번에는 우리 동네 기차역 플랫폼에서 작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머언 공항까지 동행하기에 당시에는 나그네가 몸이 그렇고 그랬거든요.

똥가리는 플랫폼에서 몇 번이고 나그네 품에 안겨왔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떠났습니다. 그날도 아침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나의 똥가리는 침울해했습니다. 아침에는 식사를 하다 말고 결국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아빠, 빨리 나아서 한국에 돌아와야 해. 아빠가 없으니 자전거도 멀리 못 타고 가고, 또 롤러스케이트도 못 타고, 강가에서 보트도 못 타고, 등산도 못 가고. 진짜 빨리 와 응? 알았지, 아빠!"

나그네는 빨개진 눈을 감추려고 헛기침을 하고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거닐어 보지만 가슴은 찢어지듯 갈기갈기 무너져 내렸습니다. 나의 똥가리는 아빠가 왜 함께 돌아가지 못하는지 잘 알지를 못합니다. 나그네는 아주 오래 전, 망명 여부를 가름하는 재판정에서 담당 판사에게 정식으로 요청을 했었습니다. 망명신청을 취소하겠노라고. 그리고 내일이라도 당장 나의 조국으로 돌아가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담당 판사는 나그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판사는 말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당신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나그네의 정치적 핍박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네는 몇 번의 휴정을 반복하면서도 망명 철회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그녀 역시 담당 변호사를 설득해가면서까지 나그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의 실랑이(?) 끝에 담당 판사는 일방적으로 나그네의 망명을 결정한다는 '방망이'를 세차게 두드리는 것으로 재판을 종결지었습니다.

모든 것 내려놓고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 돌아가련다

그렇게 거의 반강제(?)로 게르만의 나라에 망명을 해서 국제나그네의 방랑기를 써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돌아가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입니다. 그리고 엄지엄마와 나의 똥가리가 살고 있는 시골에 허름한 농가 하나 구해서 물처럼 바람처럼 여여하게 살다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올해 구순이 되신 아부지와 귀가 거의 들리지 않은 엄니' 두 분,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에 뵙고 불효를 참회하고자 합니다.

아들내미 똥가리는 올해 2학년이 되었습니다. 이젠 우리말도 아주 잘한다고 아빠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입니다. 이번 학기에는 국어는 물론이고 시험을 잘 봐서 우등상을 받았다고 컴퓨터 화면을 통해 아빠에게 상장을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독일 말은 많이 잊었습니다. 조금 아쉽지만 어쩌겠습니까. 귀중한 하나를 얻었으니 다른 하나는 내려 놓아야지요.

2년 전 8월 15일, 내 나라 내 땅으로 유학 보낼 때 '삼천리금수강산 보다 게르만의 나라를 더 좋아했던 똥가리'는 이제는 확실하게 내 나라 내 땅에 뿌리를 내린 것 같아 나그네의 우려는 기우가 되어 버렸습니다.

똥가리의 정식 이름은 '조한얼'입니다. 쬐끔 유치찬란할 지도 모르지만, 독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조국과 한민족의 얼을 잊지 말라는 나그네의 사욕(私慾)이 깊이 배어 있고 또 다른 뜻은 '온 누리가 한 생명' 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오래전 망명수용소 생활을 할 때 '세계는 하나'란 화두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살길 찾아 몰려든 수용소의 난민들을 대상으로 전시회를 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때 원주교도소에서 장기징역을 살고 있던 백태웅씨와 서신 교환을 하고 있었는데 전시회에 백태웅씨를 초청할 예정이었지요. 물론 가능성은 제로였지만 말이지요.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전시회는 무산되었지만,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나그네인지라 자연스럽게 아들내미가 태어나자 한얼이라 지었답니다. '온 누리는 하나요 한 생명'이란 의미를 욕심 많게도 갓 태어난 똥가리에게 억지로 빙의시킨 거지요.

나그네가 오래전 망명수용소 시절, 세계 각지에서 온 수용소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전시회를 목적으로 그렸던 그림이다. 제목은 '지구는 하나, 그리고 온누리는 한 생명' 여기에서 아들내미의 이름, 한얼이가 탄생했다.
▲ 온누리는 한 생명 나그네가 오래전 망명수용소 시절, 세계 각지에서 온 수용소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전시회를 목적으로 그렸던 그림이다. 제목은 '지구는 하나, 그리고 온누리는 한 생명' 여기에서 아들내미의 이름, 한얼이가 탄생했다.
ⓒ 조영삼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독일의 아기고양이 똥가리는 나그네가 요양소에 있을 때 나그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으로 멀리멀리 떠나갔습니다. 애잔하고 서럽고 불쌍하고 슬펐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왜냐하면 나그네가 어느 날 훌쩍 한국으로 떠날 때 그 별리의 아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거든요. 미리 예행연습을 한 셈이지요. 지금쯤 나그네보다 백배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고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이젠 나그네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뇌 손상으로 인해 예전처럼 강인한 신체와 몸의 균형감각, 예지력이나 변별력이 조금 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정말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오랜 국제나그네 생활을 내려놓고자 합니다.

사고 후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사무총장을 지냈고 지금은 유럽의회 의원인 바바라 로흐빌러 부인이 직접 독일주재 한국공관에 나그네의 귀국문제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도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에 귀국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총영사관에서는 조금만 기다리면 소식 주겠다는 답을 해왔습니다.

반골기질이 조금 있었던 나그네는 이젠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진짜 자유인이 되고자 합니다. 나그네는 조만간에 그리운 내나라 내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청산은 날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날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 하네


태그:#조국이 나를 부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