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가 회사 때문에 거처를 서울로 옮기기 전까지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대구 고향집은 우리 가족과 24년째 함께하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이다.

1989년, 그러니까 내가 9살 때 2000만 원 전세로 들어갔다가, 1995년에 2500만 원을 더 얹어 사게 된 집이다. 아빠 월급 절반을 뚝 떼어내어 6년을 적금한 돈으로 마련한, 실평수는 20평을 넘을까 말까한 재래식 아파트다. 하지만 내 방도 있고, 동생 방도 있는 나에겐 고마운 집이다.

20년이 넘도록 그 집에서 추억을 쌓고 살면서, 나는 '집'이라는 것을 '엄마' '아빠' '동생'처럼 가족을 구성하는 하나의 인격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내 방을 갖게 되었을 땐 잠을 설쳤고, 정든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집을 산다는 것은 'buy'의 개념도 있지만, 'live'의 개념이 내겐 더 컸다.

고향집 매매가 4500만 원, 전세는커녕...

집은 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집은 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 선대식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며, 그런 내 생각이 시대에 너무 뒤떨어지는 사고방식이라는 걸 온몸으로 체험했다. 고향집의 매매가였던 4500만 원으로는 서울에서 전세는커녕 월세 보증금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도 빚 없이 집을 구입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얼마 전, 서울 자취생활 7년이 된 기념으로 조금 더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싶어 집을 알아보러 간 적이 있었다. 15평도 안 되는 신축 빌라의 매매 가격이 1억 3천이었다. 내가 너무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자 건물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3000만 원은 갖고 계시죠? 그럼 1억 정도는 융자 받으시면 돼요"라고 말했다.

신입 때야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한 달 살 수 있으면 감지덕지, 그 와중에 2년에 한 번 정도는 나 자신을 위한 여행도 놓치고 싶지 않아, 서울 오고 처음 몇 년간 적금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다행히 7년을 놀지 않고 일한 덕에 연봉이 오르면서 최근에서야 월급의 절반정도를 저축하고 있지만 사실 1억은 내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기만 한 액수다. 나에겐 여전히 어마어마한 돈인데, 1억 빚지라는 말을 어쩜 저렇게 손쉽게 할 수 있을까, 의아했다.

한국 전쟁 직후에 태어나신 아빠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월급을 받고 있지만, 그 월급을 매달 모아 현금으로 몇 평 안 되는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아빠, 엄마같은 세대를 일컬어 베이비부머세대라고 한다.

그리고 그 세대가 낳은 1980년 전후로 태어난, 베이비부머들보다 학력도 높고 연봉도 높은데, 평생직장도 구할 수 없고 빚 없이 집도 구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에코세대라 부른다고 한다.     

베이비부머들은 직장을 구하면, 결혼을 하고, 내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순차적이고도 일관된 소망들을 하나하나 일구며 살았다. 하지만 에코 세대들에겐 그 모든 것이 순차적이지도,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결혼도, 자녀 양육도, 내집 마련도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왜 결혼하지 않냐고? 원해서 한 선택 아니다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진보신당이 2월13일 낮 서울 홍익대 지하철역 부근에서 마련한 '발렌타인데이 맞이 키스 플래시몹'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다. 진보신당은 아르바이트에 바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집을 못 구해서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사랑을 나눌 공간도 구하지 못해 값비싼 모텔을 전전해야 하는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젊은이들)에게 자유로운 연애를 허용하라는 취지로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진보신당이 2월13일 낮 서울 홍익대 지하철역 부근에서 마련한 '발렌타인데이 맞이 키스 플래시몹'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다. 진보신당은 아르바이트에 바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집을 못 구해서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사랑을 나눌 공간도 구하지 못해 값비싼 모텔을 전전해야 하는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젊은이들)에게 자유로운 연애를 허용하라는 취지로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에코세대에 싱글족이 많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나 역시 내 미래를 저당 잡히면서까지, 언제 다 갚지도 못할 빚을 내서 집을 마련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밖에도 결혼을 늦추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는 것 등도 역시 우리가 원해서 한 선택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현실 때문이다.

지금 이 기사를 쓰기 위해 홀로 앉아 있는 카페에도, 어린 자녀 하나씩을 안고 온 30대 중반의 기혼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온통 대출 아니면 융자 아니면 아파트 실평수 아니면 코를 찔찔 흘리는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자식들의 영어교육 관련이다. 몇 시간째 그 이야기만 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과 내 집 마련과는 아직 거리를 두고 살고 있는 에코세대인 나도 윤택해지고 싶다. 돈과 영어학원 이외에도 친구들과의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했으면 좋겠다. 그런 삶을 영위하려면 역시나 결혼과 출산과 내 집 마련은 포기해야 하는 건가, 조금 씁쓸해진다.


태그:#에코세대, #대출, #베이비붐, #결혼, #내집마련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