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원주에서 뽕잎황태밥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중앙동에 있는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선생 기념관'으로 갔다. 무위당 선생은 평생을 고향 원주에서 사회운동가,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로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위당의 사상과 행동을 좋아했다. 이영희 교수는 '사회에 밀접하면서도 매몰되지 않고,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도 안에 계시던 분'이라고 늘 존경을 표했다.

생명농업을 주창한 무위당 선생
▲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 생명농업을 주창한 무위당 선생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또한 그의 곁에서 그와 행동을 같이 했던 김지하 시인은 '하는 일 없이 모든 일을 했던 분,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만 기다가 드디어 한 포기 산 속 난초가 되신 분'이라고 했다. 나는 그 분은 도종환 시인의 표현대로 '순한 물 같고 편안한 흙 같은 분'이라고 알고 있다.

선생은 1945년 경성공업전문에 입학했으나 국립서울대 설립안 반대 투쟁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제적되었다. 1946년 다시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가 한국전쟁으로 군에 입대하여 거제수용소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제대 후 1953년 고향 원주로 돌아와 대성학원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5년간 활동했다.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민의원에 출마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5·16군사쿠데타 직후 그 동안 주창해온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체포된 뒤 3년간 수감되기도 했다.

1963년 풀려난 뒤 지학순 신부,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강원도의 농촌 광산 지역을 돌며 농민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등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에서
▲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에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19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동학사상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서 도시와 농촌의 공생을 추구하는 협동운동을 전개했다.

1983년 '민족통일국민연합'의 발족에 일조한 데 이어, 그 해 10월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했다. 1988년에는 한살림 운동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차례 서화전과 전시회를 열었으며, 강연과 함께 한살림 운동이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1993년에는 제자인 이현주 목사와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대담으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를 펴내는 등 노장사상에 조예가 깊었다. 난초 그림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내는 '얼굴 난초'로도 유명했다.

내가 무위당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는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농약과 화학비료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고는 이러다가는 땅이 죽고 사람이 죽고 자연이 다 죽는다는 생각에 생명의 기본이 되는 친환경생명농업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 현판
▲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 현판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이러한 생명사상으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면서 생산자협동조직과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고 이후 한살림운동을 통하여 안전한 유기농 먹을거리 생산과 생명을 살리는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런 노력이 21세기 우리농업의 좌표와 공동체의식 확립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평소 존경하던 무위당 선생 기념관에 방문하여, 잠시 선생의 활동상을 담은 영상과 책, 그림 등을 살펴 본 우리들은 단구동에 위치한 '토지'의 '박경리 선생 문학공원'으로 갔다.

대하소설 토지(土地)를 쓴 박경리(朴景利)은 1926년 경남 통영 출신으로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박경리 문학기념관에서
▲ 박경리 문학기념관 박경리 문학기념관에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전도' '불신시대' '벽지' 등을 발표하고, 1962년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 등 사회성 강한 문제작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 근현대사와 여러 인물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하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호평을 받았다.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에 선정되었다.

주요작품에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 '노을진 들녘' '신교수의 부인' 등이 있고, 시집에 '못 떠나는 배'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남편은 납북되었으며, 김지하 시인이 사위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2008년에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박경리 선생 가족사진
▲ 박경리 문학기념관 박경리 선생 가족사진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원주에는 이곳 문학공원 외에도 흥업면 매지리에 선생의 뜻을 기리는 '토지문화관'도 운영 중에 있다. 우리가 찾은 문학공원에는 선생이 18년 동안 살면서 토지를 집필했던 옛집과 마당에 있는 조각가 심정수의 작품인 선생의 동상, 2층짜리 북카페, 문학의 집이 있다.

5층 건물의 문학의 집은 1층 사무실을 시작으로 2층은 선생과 만남을 표현한 방으로 선생의 삶을 연표로 나열했고 사진과 시 등으로 구성된 타임캡슐과 같은 공간이다. 육필원고와 만년필, 국어사전, 재봉틀, 달 항아리, 직접 조각한 여인상, 호미와 장갑, 옷 등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는 토지의 역사 문화적인 공간 이미지와 등장인물 관계도, 하이라이트, 영상자료 등을 통하여 보다 쉽게 소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알리는 공간이다. 4층은 책이나 다른 전시공간에서 살펴보지 못한 선생의 삶과 작품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전시장과 함께 청소년토지학교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박경리 선생이 살던 집
▲ 박경리 문학기념관 박경리 선생이 살던 집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5층 세미나실은 선생에 관한 영상물 상영과 세미나가 열리는 공간이다. 전체를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 교육자이신 최희웅 선생이 평생 동안 교육 자료로 모은 일제 강점기의 희귀 연구 자료를 기증하여 전시한 공간인 북카페 2층과 책 대여를 하고 있는 1층을 보았다.

그러고는 선생이 살면서 집필하던 공간인 마당 넓은 옛집으로 가서 글을 쓰던 방을 보고 텃밭을 일구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소설 토지를 시각적으로 다시 보는 멋진 계기가 된 것 같다.  

박경리 집터에 있는 동상
▲ 박경리 문학기념관 박경리 집터에 있는 동상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문학공원을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차를 타고 행구동에 '108대염주'가 만들어져 있다는 '치악산관음사'로 갔다. 1971년에 창건된 관음사에는 대웅전, 관음전, 명부전, 삼성각, 산신각 등이 있는 작은 절이다. 이곳은 재일동포 3세인 임종구 선생이 지난 2000년에 제작한 108대염주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생각하는 구슬이라는 뜻의 염주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합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슬은 부처님을 실은 관음보살을 뜻한다. 이곳에 있는 대염주는 무게 240kg 지름74cm의 모주(母珠)1개와 무게45kg 지름45cm의 나머지 염주로 구성된 전체 무게 7,4톤의 세계최대의 염주다.

치악산관음사 , 작은 절이다
▲ 치악산관음사 치악산관음사 , 작은 절이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수령 2000년이 넘는 지름 3m의 아프리카산 부빙가나무로 만들어졌다. 부빙가(bubinga)나무는 적도 아프리카에 분포하는 나무로 나뭇결이 정교하고 압축강, 곡강도가 크고 황인장 강도가 강해 잘 쪼개지지 않고 충해도 잘 받지 않는 무거운 나무다.  

임종구 선생이 만든 이 108대염주는 현재 1벌은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 있고, 나머지 1벌은 치악산관음사에 나머지 1벌은 내년에 북한 묘향산 보현사로 보내기 위한 사전 준비로 전국을 순회 전시 중에 있다.

치악산관음사, 108대염주, 7톤이 넘는 대단한 규모의 염주다
▲ 치악산관음사 치악산관음사, 108대염주, 7톤이 넘는 대단한 규모의 염주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조국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한다고 하니 한번 기대를 해 볼 만도 하다. 관음사를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차를 타고는 판부면 금대리에 있는 '금대계곡'으로 갔다. 원주에는 참 계곡이 많다고 하더니 금대계곡은 청명한 물소리와 맑은 물이 주는 청량감으로 더운 여름을 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치악산 금대계곡, 찻집과 음식점이 많고 캠핑장이 좋다
▲ 치악산 금대계곡 치악산 금대계곡, 찻집과 음식점이 많고 캠핑장이 좋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남대보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류와 숲이 우거진 금대계곡이 절경이라 사람들이 많은 찾는다고 한다. 곳곳에는 찻집과 음식점이 많았고 특히 민물매운탕 집에 많았다. 치악산의 울창한 원시림과 함께 청명한 계곡이 인상적이라 야외 캠핑을 하기에도 적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치악산 금대계곡. 더워서 손발을 씻다.
▲ 치악산 금대계곡 치악산 금대계곡. 더워서 손발을 씻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우리들은 이왕 금대계곡까지 온 김에 모두 신발을 벗고는 계곡 안으로 들어가 세수도 하고, 탁족을 하면서 잠시 더위를 잊어 본다. 손발을 씻고 나서 잠깐이지만 계곡 사이의 산책로를 걷고는 저녁식사를 위해 금대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야누드 시골밥상'이라는 토속한식집으로 가서 전통 시골밥상으로 식사를 했다.

치악산 금대계곡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쉬면서 한 컷
▲ 치악산 금대계곡 치악산 금대계곡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쉬면서 한 컷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돌너와 지붕을 인 황토 집 안채와 역시 황토로 지은 사랑채가 2개, 마당에는 분수와 벤치 4개, 원두막이 3개 정도 있어서 우리들은 원두막에서 식사를 했다. 20년 정도 되었다는 식당인데 분위기도 조용하고 조경이 좋아 차를 파는 찻집으로 오해를 하고 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깔끔했다.

치악산 금대계곡 인근의 시골밥상집, 돌너와 지붕의 황토 집이 일품이다
▲ 치악산 금대계곡 치악산 금대계곡 인근의 시골밥상집, 돌너와 지붕의 황토 집이 일품이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나는 정갈한 된장국에 조미료를 쓰지 않는 산나물과 고등어 자반이 좋아서 밥을 한 그릇 맛있게 먹었다. 후식으로 나온 숭늉과 녹차를 마셨다. 여름철에는 사랑방을 손님들에게 숙소로 내어주기 한다고 하여 가족나들이를 이곳으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당 전체를 둘러보고는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친구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쉬었다.

치악산 금대계곡 인근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
▲ 치악산 금대계곡 치악산 금대계곡 인근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차도 한잔 하면서 분수와 꽃, 나무, 황토 집을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나도 이런 곳에서 식당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바람이 좋다. 잠시 쉰 우리들은 다시 길을 나서 숙소가 있는 반곡동의 '인터불고호텔'로 갔다. 무척 바쁘고 피곤했지만 즐거운 하루였다.       


태그:#박경리 , #장일순, #치악산관음사, #금대계곡, #시골밥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