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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간, 대북지원사업과 남북교류협력사업을 하면서 수없이 방문해서 만났던 북한과 북한 사람들.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고, 다르면서도 같은 것 같은 남과 북의 만남에서 발생했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해 볼 지점들을 하나씩 기사로 전합니다. - 기자말

남북이 협력사업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양 체제의 차이가 갑자기 드러나는 돌발상황이 종종 있다. 어떤 때는 남쪽 후원자들 앞에서 남쪽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발언을 하는 공장 지배인들도 있고, 역으로 남쪽 방문객들이 북한 사람들을 매우 민망하게 할 질문들을 쏟아내 여러 사람을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북한의 안내원이나 남쪽 대북협력사업자들이 슬기롭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임기응변과 기지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 대북사업자들보다는 해당 사업을 하며 방북을 했을 때, 남쪽 전문가들이 훨씬 더 북한의 고민을 빨리 이해하고 답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번 글에서 함께 방북했던 기계 제작 납품회사 사장님이 내게 새로운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안성시와 함께 평양에 장류공장을 짓다

지난 2007년 9월, 평양 룡성구역에 장류공장 설비를 지원할 때였다. 장류공장이란 된장, 고추장, 간장을 만드는 공장을 말한다. 북한은 장류공장을 짓고 싶어 했다. 그러자 남측에서는 현대화된 기계와 전기 승압장치 등을 지원했다. 북한에서는 공장 건물과 노동력을 대기로 했다. 공장 건설은 차곡차곡 진행됐다.

사실 이 지원사업의 주체는 안성시였다. 안성시는 안성시 소속 바우덕이 풍물패의 평양 공연을 성사시킴으로서 바우덕이 풍물패의 우수성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싶어 했고, 북한은 장류공장을 지음으로써 그 공연의 성사를 위한 북한 내부에서의 명분을 만들자고 했다. 안성시의 장류공장 지원기금은 안성에 있는 기업의 후원이었다.

우리는 방북할 때마다 룡성 장류공장 책임자가 부탁하는 지원 요청 품목이 자꾸 추가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비용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예산 집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남북협력사업을 할 때마다 발생하는 일이지만, 공장에 페인트 칠을 새로 해야 한다든가, 공장을 운영하는 집기나 소모품 등을 추가로 요청하고는 했다.

북한에서는 공장 건물과 노동력만 대고 나머지는 남쪽에서 협력하기로 정리된 사업장인지라, 북한에서의 자체적인 예산이 배정된 것은 아닌 듯했다. 우리는 기계 설비와 전기공사에 관한 것 빼고 웬만한 것은 다 거절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런 과정 자체가 힘들고 안타까웠다. 북한의 사정을 보면 해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우리도 처음 후원자를 확보할 때 세운 예산을 초과할 권한과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설비 조립이 거의 완료됐다. 우리는 설비 조립 상태를 점검하러 방북길에 올랐다. 당시 남쪽에서 기계 설비 설치 전문가가 같이 동행했는데, 그분은 남쪽에 웬만한 대규모 된장 고추장 회사들의 공장 건설을 맡아 했다는 '식품가공 기계제작 회사' 사장님이었다.

"노동자들 다치겠네... 엘레베이터 설치해야"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걱정하는 북한 장류공장 지배인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걱정하는 북한 장류공장 지배인
ⓒ 서영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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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의 설치와 정상 가동 상태를 점검하던 중 노동자가 삶은 콩 함지를 얹은 지게를 매고 철 구조물로 만든 계단 몇 개를 올라가 콩을 분쇄기에 쏟아 붓는 부분에서 북측 공장 지배인이 우리 사장님에게 물었다. 내용인즉 그곳에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무거운 콩 지게를 어깨에 매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노동자의 허리와 어깨가 무사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러면서 남쪽에서 웬만한 고추장, 된장 만드는 대기업에 기계 납품을 했는데 어디에도 그런 설비를 갖춘 곳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음은 당연했다. 남쪽에서는 그냥 노동자가 하는 일로 일상화돼 있어서 그 누구도 그런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았다고. 남쪽 사장님의 답변에 북한 공장 지배인은 더욱 황당해했다. 당연한 설비 아니냐고 되물었다. 남측에 그 크고 화려한 공장들에 그 정도의 자동화 시설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원사업을 진행하는 도중 추가로 지원해야 할 품목이 생기면 당황스럽다.
 지원사업을 진행하는 도중 추가로 지원해야 할 품목이 생기면 당황스럽다.
ⓒ 서영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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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제 우리 식품회사 대기업에 그런 자동화 설비가 있는지 잘 모른다. 사장님 말이 그런 게 없다니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 솔직히 말하면 나는 북한이 좀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쪽의 인도지원으로 어렵게 자금을 구해 가까스로 사업을 할 경비를 마련했는데... 남쪽에도 없는 자동화 설비를? 그것까지 주문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나 생각했다.

쉬는 시간이었다. 사장님이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그 설비를 해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 사장님은 이 사업의 실제 후원자인 안성시로부터 돈을 받고 일을 하는 고용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돈을 내서 지원을 해줘야 할 의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제안을 하는 게 잘 이해 되지 않았다.

노동해본 사람만이 고된 노동을 안다

노동자를 생각하는 북측의 지배인을 보고 감동받은 남쪽의 사장님.
 노동자를 생각하는 북측의 지배인을 보고 감동받은 남쪽의 사장님.
ⓒ 서영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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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요? 거절하면 되는데, 사장님이 비용을 내서 하신다고요?"

내가 물끄러미 사장님을 쳐다보자 사장님 답변은 더 뜻밖이었다. 사장님 본인이 감동을 받아서 그렇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단다. 자기가 지금은 사장이지만 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 출신인데, 노동자의 어깨와 허리를 걱정해주는 경영인이나 관리인은 없었단다. 작은 문제지만 남쪽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사장님은 북한이 사회주의를 택하고 있어서 그런지 남쪽과는 좀 다른 것 같다고 했다.

망연자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 듣고 나는 그 사장님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남쪽에도 없는, 더 세련된 기계 설비를 요구하는 것 같아 약간 짜증까지 난 상태에서 어떻게 거절할 지 고민 중이었는데... 사장님은 감동을 받았다니?

사장님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책을 통해 관념적으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배웠는데, 노동자들은 힘든 노동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기 때문에 생긴 차이일까. 책상에서 배운 이론적 이해와 삶을 통해 얻은 실제적 감수성의 차이일까. 그러고 보니 내게는 노동자 혹은 노동자 출신이 겪는 고통도, 분노도, 따라서 노동현장이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주견도 없었다.

갑자기 우리 사장님이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장사치라고 생각했는데, 인정이 있고 사람의 삶을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는 철학을 가진 분이었다. 나는 남북협력사업을 할 때마다 합의안을 이행하기에 급급해 정작 중요한 자기 성찰의 좋은 계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갑자기 내가 애초 남북민간교류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처음의 마음을 떠올리게 했다.

2007년 9월 평양 룡성구역에 위치한 장류공장 기계를 설비 중인 모습.
 2007년 9월 평양 룡성구역에 위치한 장류공장 기계를 설비 중인 모습.
ⓒ 겨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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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남쪽과는 전혀 다른 체제인 북한에서 북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서 우리와는 무엇이 다른지, 서로의 차이에도 민족의 동질성이 어떻게 확인되는지, 남북의 협력과정을 통해 남북 모든 사람들의 분단이 어떻게 함께 치유돼야 하는지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입견과 좁은 틀에 얽매여 있었던 나 스스로를 해방하는 길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류공장을 건립하고 준공식 이후 몇 년 동안 그 공장에 가보지 못했다. 우리가 원료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기로 했으면 가 볼 일이 있었겠지만, 공장을 지어주는 것으로 완료된 사업이었기에 현장에 가 볼 기회가 없었던 것. 글을 쓰다 보니 그때 사장님이 지어준 자동화 설비를 사진으로 찍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블로그(http://blog.krhana.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이경 기자는 겨레하나의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북한경험, #대북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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