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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미나토 마을의 박제상 비. 박제상은 이곳에서 붙잡힌 뒤 사스나 마을로 끌려가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빗돌에서 100m가량 오른쪽에 동해가 있다.
 대마도 미나토 마을의 박제상 비. 박제상은 이곳에서 붙잡힌 뒤 사스나 마을로 끌려가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빗돌에서 100m가량 오른쪽에 동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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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에서는 아직도 '과거는 흘러갔다'라는 옛날 노래가 애창되고 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도 변함없는 인기곡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런 인식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만큼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로 함께 구성된다. 과거도 당시에는 현재였고, 현재도 곧 과거가 된다. 현재도 조금 전까지는 미래였고, 미래 또한 머잖아 현재가 된다. 과거의 일이라고 해서 한결같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지배한다. 그래서 인간사회에는 역사가 기록된다.

망부석에서 바라보는 동해
 망부석에서 바라보는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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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흘러갔다?

전해지지 않는 '치술령곡'도 바로 그런 예의 하나이다. 노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그 노래의 음률이 흐른다. 치술령에 올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고 새가 되어버린 아내와 두 딸의 애절한 목소리가 쿵쿵 가슴을 울려온다.

세종대왕께서 '신라 천년 최고의 충신'이라 상찬한 박제상. 418년에 왜국에서 죽는다. 신라의 왕자 미해를 몰래 탈출시킨 혐의로 화형을 당한다. 왜왕이 귀순하면 부귀영화를 보장해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비장하게 죽는다.

박제상의 아내가 울다가 쓰러진 장사 벌지지. 망덕사터 옆이다.
 박제상의 아내가 울다가 쓰러진 장사 벌지지. 망덕사터 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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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해, 미해 구출에 앞서 박제상은 고구려에 잡혀 있던 보해도 구출했다. 그때는 함께 귀국했다. 그런데 눌지왕은 아직도 왜에 잡혀 있는 또 다른 동생 미해를 생각하면 '몸에 팔뚝이 하나만 있고 얼굴에 눈이 하나만 있는 것 같다'면서 박제상의 왜국행을 독촉한다.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동해로 출발한다.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망덕사 앞 남천까지 뒤쫓았지만 벌써 남편은 아득했다. 그녀는 남천의 긴 모래밭(長沙)에서 몸부림을 치며 울다가 혼절했다. 친척들이 달려와 부축했을 때 그녀의 몸은 굳어 다리가 뻗쳐지지(伐知旨) 않았다. 뒷날, 사람들은 그곳을 '장사 벌지지'라 불렀다.     

(사진 왼쪽) 치술령 정상의 신모사(박제상의 아내를 기린 사당) 유허비와 (사진 오른쪽) 박제상이 왜를 향해 떠난 곳임을 기념하여 울산 정자마을에 세워진 비석
 (사진 왼쪽) 치술령 정상의 신모사(박제상의 아내를 기린 사당) 유허비와 (사진 오른쪽) 박제상이 왜를 향해 떠난 곳임을 기념하여 울산 정자마을에 세워진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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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은 지금의 울산 정자마을 앞바다인 율포에서 왜국으로 떠났다. 남편이 떠난 후 부인은 두 딸과 치술령 고개에 올랐다. 동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서 남편이 돌아오는 광경을 지켜보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물만 마시며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하늘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아내는 '치'가 되고 두 딸은 '술'이 되고

부인은 그곳에서 돌이 되었다. 몸은 망부석이 되고 혼은 새 '치(鵄)'가 되었다. 두 딸들도 새 '술(鶐)'이 되었다. 새들은 동해를 향해 날아가다가 바위틈 굴속으로 숨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은을암이라 불렀다.   

치산서원. 멀리 치술령이 보인다.
 치산서원. 멀리 치술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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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령의 여신으로 모셨다. 망부석 뒤편 치술령 정상에 사당을 세우고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지금도 그곳에는 사당의 유허가 있다. 또 서쪽으로 200여 미터 내려가면 망부천(望夫泉)도 남아 있다.

치술령 아래 마을에는 치산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박제상, 그의 아내, 두 딸을 함께 기리고 있다. 이런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 골수 '남존여비' 사상에 젖어 있던 조선 시대 사대부들도 박제상의 아내와 두 딸을 기리는 민중의 인식을 차마 내칠 수 없었던 것이다.

박제상이 처형된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대마도의 사스나 마을 풍경
 박제상이 처형된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대마도의 사스나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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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유적지의 꽃은 치술령 망부석

박제상 유적지의 꽃은 치술령 정상부의 망부석이지만 비록 크게 높지는 않아도 766m의 봉우리이니 누구나 다 오를 수는 없다. 그 탓에, 치술령에 오르지 못한 답사자들은 등산로 입구에서 서원을 보고 박제상기념관도 둘러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 특히 저물 무렵, 기념관 앞뜰에 세 모녀가 껴안고 있는 작은 동상을 보노라면 그들의 과거가 오늘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난다.

눌지왕 때 만들어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겨레의 노래 '치술령곡', 지금 비록 노랫말과 악곡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애잔하게 살아 있다. 부부, 부모와 자식, 나라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인간사회의 영원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뛰어난 음악가가 있어 오늘의 시대에 어울리는 '치술령곡'을 만들어내기를 갈망한다.

덧붙이는 글 | TNT뉴스에도 차후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치술령곡, #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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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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