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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까진 알지 못했다. 일본에서 남이섬까지 와서 드라마 <겨울연가>를 다시 기억하는 관광객들의 심정을. 파리에서 '비포 선셋 (Before Sunset)'에 나온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그제야 그들이 이해됐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를 처음 보고는 '어쩜 이런 영화가 있을까?' 싶었다. 그 다음 드는 생각은 '이런 사랑이 정말 있을까?'였다. 유럽의 기차 안에서 만난 셀린과 제시의 사랑 이야기. 두 사람은 그 다음날 해가 뜨기 전까지 빈에서 함께한다. 영화 내내 둘의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기차 안에서 첫눈에 반한 남녀, 서로에게 얼마나 묻고 싶은 게 많을까. 어쩜 이렇게 말이 많은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9년 후, 이번에 그 둘이 파리에서 다시 만났다. 9살 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다음날 아침 해 뜰 때까지도 시간이 없나 보다. 이번에는 당일 해지기 전까지이다. '비포 선셋'을 보고는, '이 영화, 내 연애관에 심각하게 지장을 주겠다'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남자친구가 없는 이유는 영화의 영향이 지대한 것 같다. '제시'를 알고서는 내가 어떤 남자를 만날 수 있으랴.

1996년에 나온 <비포 선라이즈>. 셀린과 제시의 9년후 재회를 그린 <비포 선셋>.
 1996년에 나온 <비포 선라이즈>. 셀린과 제시의 9년후 재회를 그린 <비포 선셋>.
ⓒ 영화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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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사는 동안 영화에 나왔던 곳곳을 내 발로 직접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다. 게다가 이번엔 셀린이 다녔던 소르본느 대학으로 교환학생으로 온 것이니, 셀린의 후배가 된 셈이다.

제일 먼저 찾아갔던 곳은 셀린과 제시가 9년 만에 처음 만난 서점. 파리지엔인 셀린이 즐겨 찾는 서점으로 나온다. 'Shakespeare and Company'라는 영어로 된 서적을 파는 곳인데 '비포선셋'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에도 많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 유명세 때문에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1층에서는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다.

제시가 9년 전 셀린과의 사랑에 관한 책을 내고 이 서점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했다. 영화에서처럼 아직까지도 이런 작가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낭독회와 같은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다. 책만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은 수 있는 공간까지 조금하게 마련돼 있어, 책 읽는 재미에 빠져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은 2층은 더욱 마음이 따뜻해지는 공간이었다. 고서적이 있는 공간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고, 계단으로 올라와서 바로 보이는 한사람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에는 옛날 타자기와 함께 여기에 왔던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쪽지들이 보인다. 서점에서 나올 때는 몸에 사람들의 추억 냄새를 한껏 품게 된다.

노트르담 성당 옆의 영어서적 전문서점. 작가가 된 제시는 9년전 그들의 사랑에 대한 책을 내고, 이 서점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한다. 여기서 9년만에 셀린과 재회한다.
 노트르담 성당 옆의 영어서적 전문서점. 작가가 된 제시는 9년전 그들의 사랑에 대한 책을 내고, 이 서점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한다. 여기서 9년만에 셀린과 재회한다.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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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바로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골목길 또한 자주 갔다. 제시와 셀린이 처음 만나 조금은 어색한 대화를 시작하는 이 골목. 강의실 가는 길과 가까워 일부러 수업을 들을 때 조금 일찍 나와 돌아가더라도 이 길을 지나가곤 했다. 수업이 항상 4시 반에 시작했는데, 겨울이여서 해가 짧았던지라 항상 그 시간이 되면 해가 지면서 이 골목을 눈부시게 비추곤 했다. 영화 장면대로 골목을 계속 따라가니 그들이 걸었던 골목 대신 차가 달리는 도로가 나온다. 아 맞다. 편집이라는 게 있지!

갑작스런 만남에 어색하지만 기분좋은 대화를 시작하면서 걷는 서점 옆 골목.
 갑작스런 만남에 어색하지만 기분좋은 대화를 시작하면서 걷는 서점 옆 골목.
ⓒ 영화스틸,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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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파리를 구경시켜 주기로 한 셀린이 제일 먼저 간 카페가 바로 'Le Pure Café' 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바 뒤쪽에서 셀린과 제시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 같아 잠깐 설레기도 했다.

셀린이 데리고 간 카페, LE PURE CAFE
 셀린이 데리고 간 카페, LE PURE CAFE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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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가서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켰다(아직도 에스프레스는 왜 마시는지 이해가 가진 않지만, 파리에선 카페에 가면 항상 가장 저렴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학기 중 수업을 들으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불어가 싫어질 때로 싫어졌었지만 여기서 앉아 주위 사람들이 대화를 엿들으니 이때만큼은 불어가 한곡의 샹송같이 느껴진다.

언니랑 같이 왔을 때는 간단한 식사도 했다. 식사에 곁들일 와인 한 잔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에, 이 와인이 자기 같이 상큼하다며 보르도산 와인을 추천해줬다. 센스 있는 웨이터 덕분에 웃으며 식사할 수 있었다.

제시는 말한다. "미국에도 이런 카페가 있었으면..!"  나리언니와 카페에서 한 간단한 식사. 셀린과 제시가 앉았던 그 자리에서는 에스프레소 향속에서 영화속 장면을 음미했다.
 제시는 말한다. "미국에도 이런 카페가 있었으면..!" 나리언니와 카페에서 한 간단한 식사. 셀린과 제시가 앉았던 그 자리에서는 에스프레소 향속에서 영화속 장면을 음미했다.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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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찾아간 곳은 'Promenade plantée'. 파리에는 햇살 좋은날 책 한권 들고 찾아갈 만한 예쁜 공원, 정원들이 많다. 이 정원 또한 그런 곳들 중 한 곳. 셀린이 제시와 쇼핑하는 대신 산책하러 온 곳이다.

색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원래 기차가 다니던 철도를 정원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좁지만 길게 정원이 가꿔져 있다. 정원의 길이가 4.7km라고 한다. 건물 2층 정도 높이에 위치해 있어서 왼쪽 오른쪽 파리의 건물들을 둘러보면서 걷는 것도 이 정원의 색다른 재미이다. 내가 갔을 때는 산책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고, 조깅하는 젊은 사람들도 간간히 보였다. '제시'같은 남자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와 고민들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편안한 곳이었다.

해가 지면 헤어져야 하는 둘은 파리 곳곳을 구경한다. 둘이 산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Promenade Plantee'. 철도였던 곳을 정원으로 만들었다.
 해가 지면 헤어져야 하는 둘은 파리 곳곳을 구경한다. 둘이 산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Promenade Plantee'. 철도였던 곳을 정원으로 만들었다.
ⓒ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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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덕분에 노트르담 성당의 매력을 진정한 매력을 알게 되었다. 제시가 시간이 없어 불안해하는 셀린의 손을 붙잡고 무작정 탄 여객선에서, 노트르담 성당 뒷면을 보면서 셀린은 말한다. "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잊고 있었어." 밖으로 뻗은 아치들과 높이 솟은 첨탑이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뒷모습을 보자면 그녀의 말대로 그동안 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면 은행잎들이 수두룩이 떨어져있는 센 강을 따라 산책하는 것도 좋다.

아치와 첨탑이 아름다운 노트르담 대성당 뒷모습. 센느강변을 따라 산책하기도 좋다.
 아치와 첨탑이 아름다운 노트르담 대성당 뒷모습. 센느강변을 따라 산책하기도 좋다.
ⓒ 영화스틸, 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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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쭉 읽고, '이거 너무 낭만에 빠진 거 아니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편집이라는 기술 덕분에 영화에는,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하염없이 걸어도 예쁜 길만 나오듯이, 나 또한 '카페를 찾다가 길을 잃은 얘기, 정원을 걷다가 짓궂은 십대들이 "니하오!"를 외치며 귀찮게 한 얘기, 노트르담 성당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낯선 남자들이 따라오는 바람에 서둘러 반대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탈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는 다 생략했으니, 우리 이 글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셀린과 제시'처럼 로맨틱해져 보자. 

추신_ 제시 역을 맡았던 에단 호크의 한 인터뷰에서 2013년이면 '비포 선셋'이 개봉한 지 다시 9년이 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줄리 델피와 영화를 하려고 얘기하고 있다고 했다. 그 얘길 듣고 설렜는데 기사에서도 '비포 선라이즈' 3편 제작 소식이 전해오는 걸 보니 내년이면 정말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9년이 지난 셀린과 제시는 어떻게 변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태그:#비포선셋, #에단호크, #줄리델피 ,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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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행복한 만큼 다른사람도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계의 모든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세계에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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