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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1일 개최된 학교폭력 관련 공청회 포스터
 지난 6월 11일 개최된 학교폭력 관련 공청회 포스터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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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한국교육과정 평가원 주최로 '인성교육 실현을 위한 교육과정 개정 시안 공청회'가 열렸다. 공청회의 궁극적 목적은 학교폭력 근절에 있었다. 심각한 수준의 학교폭력 문제의 해결책으로 학교 교육에 인성 부분을 강화하고자 공청회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공청회장의 토론자들 대부분이 "교육과정 개정이 학교폭력 근절의 대안이 될 수 없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신성호 전교조 정책국장은 "현행 교육과정의 근본적 개편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교육주체 합의 기구로 '국가교육위원회'나 '사회적 교육과정위원회' 구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변순용 서울교대 교수 역시 "수정 보완 방향은 이미 칠해진 그림에 덧칠만 할뿐"이므로 전반적인 교육과정 개정을 요구했다. 또 "인성교육을 전담할 신설 교과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입장은 전국사회교사모임을 중심으로 한 "학교폭력의 근본적 해결책은 시민교육 교과 개설에 있다"는 주장과 일치한다.

시민을 길러내지 못하는 우리의 교육 현장

현행 교육과정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인성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왜 문제가 되는 걸까? 그것은 학교폭력 자체가 공동체의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주체가 갖는 권리와 의무,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 학교폭력 해결의 첫걸음이며 그것은 인성교육이 아닌 시민교육을 통해 가능해진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엔 시민교육 자체가 전무하다. 관련 교과인 사회과 교육은 우리사회에서 철저히 지식 중심으로 실행돼왔다. 학생들은 대통령제의 특징이 무엇인지, 선거의 4대 원칙이 무엇인지 등 교과서에 실린 단편적 지식들을 일방적으로 전달받을 뿐, 나와 공동체의 관계, 공동체 속에서 나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 등을 고민해보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해학생은 자신의 폭력 행위가 얼마나 '비시민적 행위'인지 알지 못하고, 피해학생은 자신이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을' '시민적 권리'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또 폭력을 목격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나서서 도와야할 '시민적 의무'가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성을 더하게 된 데에는 우리의 시민교육 부재도 중요한 이유다.

지난 2011년 9월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민주시민교육 활성화 방안 연구' 보고서는 현행 교육과정 체제에서의 사회과 교육은 '교과내용과 생활세계의 불일치, 지식과 태도의 불일치, 체제유지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 때문에 "민주시민교육에서 실패"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럽의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시민교육 모습들은 이 같은 우리의 교육현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체적 시민'을 길러내는 유럽의 교육 현장

10여 년 전 한국을 방문한 독일 국회의원 안나 뤼어만은 15세에 녹색당에 가입하며 정치를 시작해 만 19세에 국회의원이 됐다. 독일 대부분의 주에선 18세부터 선거에 입후보 할 수 있다. 어떤 주는 16세도 출마가 가능하다.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영국과 프랑스 역시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가능하다. 이 점만 보더라도 '시민으로서의 자아' 인식에 있어 한국과 독일 양국의 청소년들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독일 청소년들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사회에 관심을 갖고 사회 변화를 가능케 하는 통로를 경험하며 시민이 되어갈 때 우리 청소년들은 좁은 교실에서 시민의 의미조차 암기식으로 학습할 뿐이다.

유럽은 교실에서의 시민교육 모습도 우리와 전혀 다르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시민교육'과 관련한 별개의 과목을 두고 있다. 이 과목의 운용은 철저히 '활동 중심'이다.

영국 시민교육 교과의 세 가지 달성 목표는 '시민적 교양을 갖추기 위한 지식과 이해', '탐구와 의사소통 기능', '참여와 책임감 있는 행위를 위한 기능'인데, 이 기능들을 익히기 위해 시사문제와 현안, 논쟁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토론하는 활동이 주로 이루어진다. 영국의 시민교육의 중심엔 "학생은 시민이다. 시민에게 필요한 내용을 학교가 가르쳐야 한다"는 명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프랑스 역시 토론학습을 중시한다. 교과서가 있긴 하지만 신문기사, 학술저널, 전문서적, 법조문, 유명한 삽화, 통계자료, 사진 등 매우 다양한 자료를 활용한다. 특히 '중립적 시민 교육'을 위한 억지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 실업으로 인한 문제, 각종 사회운동 등에 관한 사진자료나 신문기사 등을 활용해 현안에 대해 자유롭게 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현재 프랑스 사회, 현재  교실 속에서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한마디로 프랑스 시민 교육의 핵은 "학생은 시민이다. 시민들에게는 모든 정보를 정확하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판단은 그들의 몫이다"라는 점이다.

전범 국가의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는 독일은 시민교육을 상당히 강화하고 있다. 독일 시민교육의 특징은 한 소도시에서 개최한 학회의 결과물인 '보이텔스 바흐 협의(1976)'에서 엿볼 수 있다. 학자들은 오랜 논쟁 끝에 독일 시민 교육에 대해 "첫째, 교화와 주입 금지한다, 둘째,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 있어서도 역시 논쟁적으로 한다, 셋째, 학생은 어떤 정치적 상황과 그 자신의 이익(또는 이해관계) 상황을 고려할 수 있고 또한 그의 이해관계에 따라 당면한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한다"라는 세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또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시민교육은 "학생은 시민이다. 그러니 주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교육하자"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순한 양' 아닌 '참여 시민'이 학교폭력을 해결한다

1970년대를 즈음해 유럽 사회에선 빈부격차, 인종 갈등 등의 문제가 심화됐다. 이는 고스란히 학교현장으로 옮겨와 계층과 인종, 종교, 취향이 다른 학생들 간 갈등과 폭력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때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시민교육'이었다. 학생들이 스스로를 공동체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 인식하며 성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길이 학교폭력 해결책이라 믿은 유럽 각국은 시민교육 교과를 새로이 만들고 현장 교사들이 토론과 체험 등 다양한 활동 중심으로 시민교육을 실천해나갔다. 또 실질적인 학교 운영도 달리했다. 시민교육 교과 수업의 일환으로 자치 기구를 활성화해 '시민의 권리를 학생들에게도 허용하는 방향'으로 학교를 개혁했다. 단순히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실제 시민이 되어가는 실천을 하도록 한 것이다.

시민교육 교과목 개설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입시 과목이 하나 더 늘 뿐 아니냐는 불만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민교육 교과목을 만드는 것은 학생들을 괴롭히고 부담을 가중시키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유럽의 성공사례를 생각해볼 때 그런 반론은 소탐대실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에선 2002년 신설한 '시민교육' 교과목에 대한 조롱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노동당 시절 등장한 이 과목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보수당 집권 뒤 폐지될 과목"이라 여겼다. 하지만 영국 교육부가 국립교육연구재단에 의뢰해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실시한 종단 및 횡단연구를 통해 이 과목의 엄청난 효과들이 검증된 순간 비아냥거림은 자취를 감췄다. 오히려 보수당 정권 하에서 시민교육은 강화됐다. 그 효과들은 다음과 같다.

- 시민교육이 분명히 청소년의 사회적 참여와 기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정치참여에도 긍정적인 인식을 불어넣었다.
- 시민교육을 통하여 청소년들은 개인 효능감이 향상되었으며 자신감을 얻었다.
- 청소년 시기의 시민교육에 대한 경험 여부가 성인의 삶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린 생명들이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만큼 우리의 학교 현실은 그야말로 위기다. 위기의 진정한 해법은 "우리도 노력은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교육과정에 약간의 리터치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과감한 개혁을 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유럽이 위기를 극복한 수단인 '시민교육 교과 신설'에 주목해야만 한다. 시민교육 교과 신설만이 정답은 아니지만 그것이 학교폭력을 해결하는 최소한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85년 프랑스의 슈벤느망(Jean-Pierre Chevènement) 교육부 장관은 "우리 프랑스에는 학교 시민교육이 필요하다."라고 외쳤고 곧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1985년 프랑스의 사회적 혼란, 학교 폭력의 상황보다 2012년 한국의 그것들이 갖는 심각성은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이에 대한민국 교과부 장관에게 1985년 프랑스 슈벤느망 교육부 장관의 과감한 모습을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세 가지 자료에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원태 외(2006), 주요외국 학교시민교육 내용연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영혜 외(2011), 민주 시민교육 활성화 방안 연구, 연구보고 RR 2011-09, 한국교육개발원
장근영 외(2011), 아동·청소년의 민주시민역량 국제비교 및 지원체계 개발 연구Ⅰ: 총괄보고서, 연구보고 11-R23,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태그:#학교폭력, #시민교육, #사회과 교육, #인성교육,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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