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부는  FTA로 가격이 인하된 체리와 와인, 오렌지 등이 원자재 수입에도 영향을 미쳐 국내 생산 물가에 영향을 주는 물가안정의 도우미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필수재가 아니다. 밥 대신 오렌지를 먹을 수 없고 국 대신 와인을 마실 수 없다. <자료사진>
 정부는 FTA로 가격이 인하된 체리와 와인, 오렌지 등이 원자재 수입에도 영향을 미쳐 국내 생산 물가에 영향을 주는 물가안정의 도우미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필수재가 아니다. 밥 대신 오렌지를 먹을 수 없고 국 대신 와인을 마실 수 없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한미FTA가 발효된 지 벌써 100일이 지났다. 그간 정부는 FTA 홍보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것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애국심을 자극하는 진부한 홍보에 그치지 않았다. 개별 소비자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기심을 자극하며 'FTA가 물가안정의 도우미'라는 민망한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괴담이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동원해가면서 반대 목소리를 철저하게 차단해 온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과연 정부가 말한 것처럼 FTA로 인해 수입물가가 뚝뚝 떨어지며(관세청 대표 블로그에 소개된 글) 소비자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기는 한 것일까? 과연 반짝 하락세를 보이다가 유통 구조의 문제로 FTA 이전보다 비싸진 칠레산 와인의 전철을 밟지 않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싼 수입물품을 소비하는 것이 소비자들의 삶의 질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일까? 거시적 관점이 아닌 아주 가까운 내 지갑 속 변화를 통해 한미FTA를 생각해보자.

물가안정의 도우미? 밥 대신 오렌지 먹을 수 있나 

100일간 수입물가가 뚝뚝 떨어졌다고 확인이 된 제품이 분명히 있다. 바로 와인과 맥주, 과일과 견과류, 육류, 주스, 음료 등에서 소매가격이 인하됐다고 한다. 이렇게 품목별로 열거해 놓고 보면 대단하다. 문제는 제품으로 좁혀서 보면 결국 오렌지와 체리, 아몬드, 포도주스, 와인 정도에서 하락폭이 두드러진다.

그나마도 체리의 경우 500g당 가격이 8000원에서 9000원선으로, 오렌지도 개당 1000원 가량으로 FTA로 장바구니가 가벼워졌다고 체감할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의 성과에 정부는 수입품의 가격인하가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국산 과일과 채소류에 대체재 역할을 하면서 전체적인 물가안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물가안정의 도우미라고 한다면 반드시 필수재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밥 대신 오렌지를 먹고 국 대신 포도주스와 와인을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정부는 이것이 시작일 뿐이고 FTA가 정착되면 원자재 수입에도 영향을 미쳐 국내 생산 물가까지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유가가 오를 때 정유사들이 기름값을 적극적으로 올리면서 하락할 때는 소극적인 반응을 취해 왔던 것을 경험한 바 있다.

지난해에도 국제 유가가 떨어지는 동안 오히려 국내 정유사들은 휘발유 값을 올린 적이 있다. 최근에도 국제 유가가 리터당 101원 하락하는 동안 국내 휘발유 값은 39원 내리는 데 그쳤다. 소비자 단체들은 국제 유가가 오를 때와 내릴 때 국내 휘발유 값에 반영되는 속도가 다르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경쟁적 시장 구조가 아닌 대기업에 독점되어 있는 유통 구조 때문이다.

정부가 한·미-FTA로 가격 인하가 가장 크다고 주장하는 와인이 매장에 진열돼 있다.<자료사진>
 정부가 한·미-FTA로 가격 인하가 가장 크다고 주장하는 와인이 매장에 진열돼 있다.<자료사진>
ⓒ 김덕련

관련사진보기


이런 현상은 한-칠레FTA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포도에 붙는 20%의 관세가 없어졌지만 단기적으로 반짝 싸지는가 싶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소매가격이 20% 이상 오르기도 했다. 이 또한 수입 유통 구조가 문제가 되었다. 수입 유통 구조뿐 아니라 대형마트가 우리나라 일반 소비자들의 장바구니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도 향후 가격 하락에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이미 대형마트들은 시장 진입 초기에 비해 몇 가지 미끼 상품을 제외하고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과와 수박 등 과일 값이 유기농 제품만을 판매하는 생활협동조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래시장에 비해서는 많이 비싸다.

지난 13일 시장경영진흥원이 이틀간 36개 생활 필수품목 가격을 조사한 결과 전통시장의 평균 가격은 22만 3792원으로 대형마트의 25만 7212원보다 13%나 저렴하다. 시장 진입 초기 대대적인 할인 행사나 끼워주기, 일정액 이상 구매시 사은품 증정과 같은 행사도 상당히 많이 축소되었다. 결국 가격 경쟁력으로 출발한 대형 유통 체인점들이 지역 상권이 무너지자 본격적으로 소비자들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FTA 관세 인하로 인한 이익은 앞으로 수입 유통업체와 대형 할인점들의 차지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대목이다. 설사 수입유통업체와 대형 할인점들이 소비자들과의 저가 상품 공급이라는 약속을 지킨다 한들 그것이 과연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일까?

이 또한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된다. 하나는 상품의 가격이 저렴해질수록 힘없는 소상공인들, 농민들과 중소기업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것이다. 대형 할인점들은 보다 저렴한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해외 저개발 국가의 제품을 사들이면서 수백만의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시킨다. 유통시장을 독점해 소상공인들을 몰아낸다. 해외 공급업체로부터 저렴한 제품을 사들이면서 농민과 중소기업들에게 손해 보는 장사라도 해야 한다는 잔인한 경쟁을 결국 강요하게 된다.

"저렴한 상품이 저렴한 노동을 부른다"

또한 대형 할인점도 제품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먼저 인건비부터 줄일 수 밖에 없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지나친 업무의 단순화로 인해 업무 자존감은 땅바닥에 내팽겨쳐 진다. 이에 대해 100년 전 미국의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은 '저렴한 상품이 저렴한 노동을 부른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소비자일 뿐 아니라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사들이는 싸구려들은 내 노동력의 가치까지 침범하게 되어 있다. FTA는 바로 대형 할인점들과 수입 유통업체들의 저렴한 상품 공급처를 효율적으로 늘리는 대신 우리의 일자리를 더욱 잔인하게 착취하는 괴물이다.

두 번째 문제는 소비자로서 할인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과연 소비의 효율을 높이는지 의문이다. 이에 대해 행동경제학자들은 할인 제품이 소비자들을 충동적으로 만들고 그만큼 불필요한 낭비를 초래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싸기 때문에 손이 가지 않는가. 할인 적용을 받아 제품을 구매하게 될 것이란 기대감은 우리의 신경계를 활성화한다.

유독 할인 안내 문구에 눈이 가고 할인 폭이 커질수록 우리가 자주 흥분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결국에는 집안 어딘가 수납공간에 쳐박아 두고 이사갈 때까지 잊어버리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반값 할인'이란 문구에 흥분해 카트에 집어 넣게 된다. 그 순간의 흥분이 바로 신경학자들이 밝혀낸 '도파민의 분비가 촉진'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할인된 제품을 집어드는 순간의 짜릿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대신 점점 우리는 어떤 제품을 구매할 때마다 제 값 주고 살까봐 하는 불안에 내몰리게 된다. 구매 이후에도 내가 산 가격보다 할인된 가격을 접하면서 끊임없이 후회하는 것은 물론이다. 소비의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필요와 욕구에 대한 성찰이 아닌 가격으로 대체되면서 온통 사용하지 않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제품들에 둘러싸이는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 제품의 진짜 가치는 점점 무시하게 된다.

대량 사육되는 동물들과 농약이나 방부제가 함유된 채소를 섭취해야 한다. 과학저널리즘 전문가인 엘렌 러펠 셸의 <완벽한 가격>을 보면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은 저렴한 식품들 때문에 미국의 다음 세대들은 부모 세대보다 더 빨리 죽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저렴한 제품이 저렴한 노동을 부를 뿐 아니라 잡동사니 소비까지 부른 셈이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내놓는 저렴한 상품들은 곧 저렴한 노동을 부를 수 있다. <자료사진>
▲ 대형마트 대형 유통업체들이 내놓는 저렴한 상품들은 곧 저렴한 노동을 부를 수 있다. <자료사진>
ⓒ 강혜란

관련사진보기


"가격경쟁력은 우리를 노동과 소비에서 소외시킬 것"

결국 가격 경쟁력이 우리를 노동과 소비 모두에서 소외당하게 만든다. 물론 할인 제품의 이런 함정 때문에 고가의 명품 소비를 하자는 것도, 물가가 올라 가계 재정안정을 침해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적정한 가격과 다양한 유통 채널 속에서 소비자들이 신중한 소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물가는 저렴한 제품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가계 소비 지출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작 주거비와 교육비, 통신비 등이다. 대형 할인점에 저렴한 제품을 구매한다고 가계 적자 구조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FTA를 체결하고 저가의 제품을 공급함으로써 1000조원의 가계 빚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렌지와 아몬드 몇 개 싸게 살 수 있는 현실이 물가안정에 기여한다고 떠드는 것도 코미디다. 여기에 싸게 살 기회를 주는 것이 마치 소비자 편익을 늘리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불쾌하다. 동네에서 조금 비싼 돈을 주고 치킨을 시켜 먹었다고, 생수를 몇 백원 더 비싸게 구매했다고, 포인트 적립이나 사은품을 받지 못했다고 우리가 빈곤해 지지는 않는다. 퇴직하게 되면 동네에서 조그만 서점이라도 운영해야 겠다는 소박한 꿈을 빼앗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거공간 비용 앞에서 팔짱 끼고 있는 지금의 주거 정책이 문제다.

언제부터 정부가 소비자 물가안정을 그렇게까지 고민했는가? 만약 진정으로 소비자 물가를 안정시키고 싶다면 당장 고등학교 무상 교육과 반값 대학 등록금, 공공임대 아파트 공급 확대 및 전세입자 보호 정책에 더 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소비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오렌지와 와인, 하이네켄 캔맥주 가격이 할인되는 것보다 2년마다 전세금 폭탄을 맞지 않고 빚 지지 않고 자식 대학 교육시키는 것이 아닐까.


태그:#FTA, #소비자 물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