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큰 아들이 촛불을 켜고 일기를 썼습니다. 촛농이 공책에 떨어졌군요.
▲ 일기 큰 아들이 촛불을 켜고 일기를 썼습니다. 촛농이 공책에 떨어졌군요.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지난 21일 밤입니다. 긴 회의를 마치고 집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최근 설치한 자동문 번호를 찍었습니다. '삐리릿' 소리와 함께 요술 문처럼 잠금장치가 풀립니다.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온 집안이 컴컴합니다. 거실에 촛불 두 개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꼬맹이 책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초등학생 큰아들이 알은체를 합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하던 일에 집중하더군요. 주위를 둘러보니 아내는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웠나 봅니다. 작은애와 막내는 컴컴한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큰방에서 일찌감치 잠에 빠졌습니다.

큰아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그럴싸합니다. 이 녀석이 벌써부터 은은한 분위기(?)를 즐기나 봅니다. 도대체 무슨 글을 쓰기에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을까요?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 봤더니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동생들이 깨어있으면 함께 뛰어 노느라 숙제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 녀석들 잠든 틈에 재빨리 일기를 씁니다. 기특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 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촛불은 어떻게 켰을까요?

전기가 부족합니다. 전기을 아껴야 합니다. 초를 몇개 더 구해야 할까요?
▲ 절약 전기가 부족합니다. 전기을 아껴야 합니다. 초를 몇개 더 구해야 할까요?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오늘 훈련 했다. 전기 아껴야 한다"

아내도 없는데 촛불을 두 개나 켜놓았습니다. 잘못해서 불이라도 번지면 큰일입니다. 한바탕 호통을 친 후 형광등을 켰습니다. 어디서 찾았는지 집에 있는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였습니다. 초를 켠 이유를 다그쳐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이렇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전기 아껴야 한대요. 오늘 훈련도 했어요. 실은 재밌기도 하고요."

그 말 듣고 아들 머리에 힘차게 꿀밤을 날렸습니다. 극심한 전력난에 전기 아끼겠다는 마음은 기특한데 극단적 절약 정신을 보여주는 아들 행동이 영 마뜩잖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21일은 '정전대비 위기대응 훈련'이 있었던 날이군요.

돌이켜 생각하니,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2시에 발전소 건설과 관련된 기사를 취재하러 모 회사에 들렀습니다. 회사 정문에 도착해 마중 나올 분을 기다리며 라디오를 켰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군요. 민방위 훈련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들으니 '정전대비 위기대응 훈련'이랍니다.

훈련 당시(14:00~14:20) 전력부하 곡선
▲ 전력부하 곡선 훈련 당시(14:00~14:20) 전력부하 곡선
ⓒ 지식경제부 보도자료 참고

관련사진보기


"5천만 국민의 힘으로 500만 킬로와트 발전소 세웠다"

다음날, 지식경제부 홈페이지를 뒤졌습니다. 보도자료가 있더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5천만 국민의 힘으로 500만 킬로와트 발전소'를 지었답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그리고 현대제철 등 산업체는 조업시간을 조정하고 자가용 발전기를 가동했으며 냉방부하를 조정했답니다.

롯데마트와 이마트 그리고 신세계․현대 백화점 등 유통업체는 냉방정지와 조명 소등 그리고 비상 발전기 가동으로 훈련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또, 서울역과 코엑스몰 그리고 지하철, 철도역 등 다중 이용시설은 공용시설 점등과 냉방가동 중지 그리고 입주자 절전참여로 함께했고요.

가정에 있는 국민들은 잠시 전기제품을 멈추는 행동으로 국가의 전력위기 상황 극복에 동참했습니다. 늦었지만 저희 집도 큰아들 덕분에 절전 운동에 동참한 꼴이 됐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전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부족해졌을까요? 100년 만에 찾아온 더위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너무 심하게 전기를 펑펑 쓰고 있는 걸까요? 지식경제부에서 발표한 보도자료를 수십 번 읽으며 뒤져봤지만 위기 상황에 대한 원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큰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각 가정마다 안내문을 보냈습니다. '학부모님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가 대규모 정전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써 있습니다.
▲ 안내문 큰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각 가정마다 안내문을 보냈습니다. '학부모님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가 대규모 정전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써 있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산업계, 전기 많이 쓰면 이익 남는 구조 만들었고 정부는 규제 안 했다"

그래서 직접 전화를 했습니다. 지식경제부 전력산업과 최형기 과장은 원인을 세 가지로 파악하고 있더군요. 그는 "이번 훈련은 유례없는 무더위 때문이다. 또, 과거에는 전력부족 현상이 여름에만 있었는데 2009년 이후로 겨울에도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현재는 사계절 모두 전력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전국에 있는 발전소가 봄과 가을로 정비를 해야 하는데 지금을 정비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위기 상황을 말합니다.

덧붙여,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발전소가 제때 세워져 전기를 공급해 줘야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건설이 늦어지면서 전력수급에 차질이 생겼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럼, 전력 부족 상황을 다르게 보는 시각은 없을까요? 환경운동연합 에너지담당 안재훈 간사와 통화했습니다. 그는 "정부가 전력 사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또,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곳은 산업계인데  그동안 정부는 전력을 많이 쓰는 정책을 펴며 규제를 안 했다"고 말합니다.

특히, "산업계는 전기를 많이 쓰면 쓸수록 이익이 남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게만 절전을 강조하는 일은 '전력부족으로 인해 발전소를 많이 세워야 한다'는 논리 만들기 위한 명분 쌓기일 뿐"이라고 걱정했습니다.

정전되면 요긴한 물건입니다. 종종 생일잔치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 초 정전되면 요긴한 물건입니다. 종종 생일잔치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꼬맹이 가슴에 담긴 위기의식, 극성스러워 보인다

누구의 잘못이든 이번 '정전대비 위기대응 훈련'은 큰 성과를 낳았습니다. 노력에 따라 발전소 10기를 세울 수 있는 전기 아낄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은 꼬맹이 가슴에까지 위기의식이 담겨졌다는 겁니다. 그날따라 유독 촛불 켜고 일기 쓰는 아들이 극성스러워 보였습니다.


태그:#지식경제부, #정전, #정전대비 위기대응훈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