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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에 케케묵은 땟국물이 있다 해도, 꽃차남을 업고 안으며 자금성을 둘러보는 것 보다는 낫겠지.
▲ 자금성, 유모차를 꼭 타야 해. 유모차에 케케묵은 땟국물이 있다 해도, 꽃차남을 업고 안으며 자금성을 둘러보는 것 보다는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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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이토록 케케묵은 땟국물 묻어 있는 물건은 태어나 처음 봤다. 더구나 그건 유모차였다. 남편과 큰 아이, 그리고 나는 정서적으로 고민에 빠졌다. 둘째 아이 꽃차남만 빼고. 꽃차남은 한 대만 남았다는 유모차에 벌써 손을 뻗었다. 올라타려고 다리를 뻗자마자 꽃차남의 흰 바지에는 때가 탔다.

지난 5월 31일 새벽 2시 반에 군산 집에서 나와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한낮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이른 점심을 먹고 천안문 광장에 왔다. 광주에서처럼,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큰애에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네 살짜리 꽃차남을 안았다가 자세를 바꿔 목마를 태우면서도, 처자식 사진을 찍으려고 애쓰는 남편만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나는 주로 풍경 사진을 찍었다. 그 안에 사람을 담는 것에는 게을렀다. 나는 줄곧 '셀카'와 '인증 사진'에 정성을 쏟는 내자매들을 갈궜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5년 동안 썼던 전화기를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디카로 찍은 10년 치 사진을 정리하면서 깨달았다. 진짜 멍청이는 나였다.

사진에서도 역시 사람이 먼저였다. 풍경은 희미하거나 없어도 괜찮았다. 신세경이나 조인성 같은 미모가 없어도, 우리 식구와 내 벗들의 얼굴을 기록한 것이 좋았다. 예쁘고, 잘생긴 것은 객관적인 잣대로 잴 수 없었다. 이제는 인물 사진이 좋다. 방심하면, 내 얼굴을 '쓰레기 봉다리'처럼 찍어버리는 이 기계 앞에서 나는 좀 노력하고 있다.  

유모차에 앉힌 '꽃차남'

풍경 보다는 인물. 예쁘고 잘생긴 걸 객관적인 잣대로 잴 필요는 없어.
신세경이나 조인성 같은 미모가 없으면 좀 어때요.
▲ 카메라가 앞에 있으면 노력 좀 하자. 풍경 보다는 인물. 예쁘고 잘생긴 걸 객관적인 잣대로 잴 필요는 없어. 신세경이나 조인성 같은 미모가 없으면 좀 어때요.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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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보다 무서운 건 자식이다. '중1 님'인 큰애는 뚱하게 보일 때가 많았고, 저만치 가버려 좋고 싫음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남편은 큰애에게 혼자 남으면 전화하라는 당부만 했다. 꽃차남은 땅에 발 딛고 있는 자기 삭신을 공중으로 모시라고 지시했다. 옛날로 치면, 엄마 아빠는 손주 봤을 나이라는 '경로설'을 주장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8704칸의 방이 있다는 자금성을 통과하려면 무조건 유모차를 빌려야 했다. 꽃차남은 꽃가루에도 피부가 뒤집어지고, 줄곧 아토피한테 시달려왔다. 그걸 잊어야 했다. 나무 하나 없는, 덩치가 큰 궁궐을 몇 시간이나 걸어서 통과할 자신이 없는 걸 알아챘을까. 유모차를 빌려주는 중국 사람은 꽃차남을 유모차에 앉혀 버렸다.

숨 돌리고 나니 사람들이 보였다. 그네들은 깃발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천안문 앞에서 팔던 오성홍기를, 우리 애들처럼 흔들면서 걷기도 했다. 초록이나 빨간색, 노란색 모자를 쓰고 다녔다. 대지진 같은 자연 재해를 겪으면서, 인생이 계획한 대로 안 되는 걸 실감했다. 그 뒤로 사는 것에 여행을 끌어안은 사람들, 중국인들이었다.

어릴 때, 우리 동네 사람들도 집단으로 설악산이나 속리산에 갔다. 출발 전부터 전축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지루박을 연습하던 젊었던 엄마 아빠의 들뜸을 기억한다. 이틀이나 사흘, 자는 시간까지 아껴서 뛰고 놀았던 여행이 끝났는데도, 마을 어귀에 멈춘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얼굴에는 열기가 있었다.

어차피 '진상' 부릴 거면서...

엄마 아빠도 옛날로 치면 손주 봤을 나이라고 '경로설'을 만들어 들이대도 안 먹힌다. 어서 자신의 삭신을 공중으로 떠받들라고 한다.
▲ 천안문 광장 엄마 아빠도 옛날로 치면 손주 봤을 나이라고 '경로설'을 만들어 들이대도 안 먹힌다. 어서 자신의 삭신을 공중으로 떠받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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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을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중국에 온 지 사흘은 된 것 같았다. 유모차를 빌려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다고 선물로 아이스크림 4개를 줬다. 나는 쪼잔했다. 아이스크림은 먹는 시늉만 하고, 꽃차남을 안고 모퉁이로 달렸다. 아이 옷을 벗기고는 그대로 갈아입혔다. 먹는 물로 손을 씻겼다.

전날 밤에 나는, 중국을 10번쯤 와 봐서 중국 음식 특유의 향까지 저어하지 않는 남편에게 잘난 척을 했더랬다. 애들 간식을 날짜 별로 나눠담고, 볶음 김치와 김을 사 챙기는 그에게, 베이징에 살러 가냐고, 자연스럽게 먹고 놀다 오자고, 불편하고 다른 게 여행이라고  했다. 막상 와서는 꽃차남 핑계를 대며 진상 짓을 할 거면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만리장성.
중국 사람들은 아래서부터 걷기도 한다.
▲ 만리장성 팔달령 구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만리장성. 중국 사람들은 아래서부터 걷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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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두엽의 폭풍성장으로 자주 뚱해지는 '중 1님'
▲ 독심술을 배우고 싶소. 전전두엽의 폭풍성장으로 자주 뚱해지는 '중 1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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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만리장성 팔달령에 가서도 '그들처럼' 될 수 없었다.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을, 벽돌 한 장 올릴 때마다 사람 한 명씩 죽어나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부른다. 그래서 저 아래서부터 한 계단씩 밟으며 장엄함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는 관광객이니까 케이블카를 탔다.

그래도 걸어야 할 구간이 있었다. 장성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 경사가 심했다. 네 살짜리 꽃차남 손을 잡은 채로, 중심을 잡고 계단을 오르는 게 어려웠다. 만리장성 귀신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아서 기다시피 몸을 수그려야 했다. 차라리 한 쪽으로 비켜섰다. 둘러봐도,  큰애와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휠체어를 탄 채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오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1950년대 후반, 대약진 시대부터 입었을 법한 두껍고 낡은 옷을 정갈하게 빨아 입고 온 사람들. 염색이나 화장을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순박한 얼굴들. 낯가림이 없어져버렸다. 나는 마주치면 인사를 했다.  

"쎄쎄" "니하오" "니 취 팔러마"(욕 같지만 밥 먹었니?) 밖에 못하면서 말도 걸었다. 어떤 모녀는 내 말을 알아듣고 멈춰 섰다. 내 카메라를 바라보고 웃어주는데 해맑다. 감동이 있다. 중국의 먼먼 지역에서 며칠에 걸쳐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 일생 한 번은 베이징에 다녀와야 한다는 꿈을 꾸고, 마침내 그것을 실현하는 꿈같은 현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때가 좋은 거란다"라는 말

일생 한 번은 베이징에 다녀와야 한다는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려고 먼먼 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온 분들. 내 카메라를 보고 우성주는 모습이 해맑아서 시큰했다.
▲ 꿈을 실현하는 현장 일생 한 번은 베이징에 다녀와야 한다는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려고 먼먼 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온 분들. 내 카메라를 보고 우성주는 모습이 해맑아서 시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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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것은 어디든 통하는 게 있겠지. 비슷한 곳에서 서고 감탄한다.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중국식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 '중국식 가족사진' 사람 사는 것은 어디든 통하는 게 있겠지. 비슷한 곳에서 서고 감탄한다.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중국식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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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구가 좋다고 멈춘 풍경이나 물건 앞에서 그들도 섰다. 비슷한 것에서 감탄했다. 그러니 사진을 찍으면 '중국식 가족사진'이 나왔다. 우리 넷 옆에는 본 적 없는 중국인들이 있었다. 재밌어졌다. 우리는 손도 덜 씻고, 녹지도 않는다고 겁냈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큰애는 현지식을 잘 먹으며 몸매 걱정까지 했다. 꽃차남도 아침에 입은 옷을 밤까지 입었다. 

호텔에서 아침밥을 먹을 때에 우리 식구만 한국 사람인 날도 있었다. 중국의 어떤 지역에서 버스로 온 사람들. 아직 아이가 어린 젊은 부부도, 어르신들도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를 자리에 앉혔다. 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쓰는 말이 다르니까 서로 눈웃음과 손짓으로 주고받았다.

"어디서 왔니?"
"한국이요."
"베이징에 오게 돼서 많이 기쁘구나."
"저도 그래요. 근데 둘째가 자꾸 안아달래서 힘들어요."
"그 때가 좋은 때란다."

내 절친한 친구는 마흔이 된 나를 '늙수구레'라고 놀렸다. 때마침 몸도 아퍼서 저항하지 않았다. 첫사랑 영화라는 <건축학 개론>을 보면서는 엄마한테 더 빙의했다. 스무 살 남자애는 엄마랑 같은 집에 살아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었다. 우리 애들도 그러겠지, 인생이 이렇게 저무는구나, 내 입으로 "내가 젊고 건강했을 적에"라고 말하면서도 농담 같지가 않았다.

좋은 때! 큰애는 일생에 떨어야 할 '지랄'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중2 님'이 아직 아니라서 좋다. 생떼를 많이 쓰는 꽃차남은 아기 냄새를 폴폴 풍겨서 좋다. 늘 시간이 빠듯한 남편이 여기에 함께 와서 좋다. 나는 <로보캅 폴리>에 나오는, 상냥하고 똑똑한 엠버를 잘 따라할 수 있어서 좋다.

바로, 지금, 여기,는 좋다. 베이징에 오니 새삼스럽다.

이화원, 물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 그림과 글씨를 감상했더니 우리보고도 해 보라고 한다. 남편은 자신의 청년 시절 자화상 같기도 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 바로, 지금, 여기,는 좋다. 이화원, 물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 그림과 글씨를 감상했더니 우리보고도 해 보라고 한다. 남편은 자신의 청년 시절 자화상 같기도 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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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베이징, #중국식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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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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