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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래봤자 아저씨'들의 이야기. 기획시리즈 '오빠라고 불러줘'는 한 살이라도 젊게 보이고픈 '마음만은 오빠'들의 고군분투를 담습니다. [편집자말]
2010년 11월 26일, 지긋지긋한 군복을 벗어 던진 날이자 생각만 해도 신물이 올라오는 짬밥 냄새와 결별을 선언한 날. 전역하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2011년 3월 2일이라는 날짜가 각인됐다. 한편으로 설레고, 다른 한편으로 두려웠던 그날. 그날은 바로 복학날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약 3개월. 2년 동안 내 몸을 가득 새겨졌던 군인 티를 말끔히 벗어 던지고 평범한 대학생으로 변신해야 하는 시간.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벚꽃 날리는 교정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여자 후배들에게 멋진 '오빠'의 포스를 풍기고 싶었다. 속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군 전역 후 복학하는 남자들은 한 번씩 상상해봤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몇 가지 준비 과정이 필요했다. 지금부터 오빠로 불리고자 했던 나의 치열한 노력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스타일리시한 오빠로 만들어주세요

다운 펌...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 "디자이너, 당신을 믿어요" 다운 펌...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 차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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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엔 어색했지만, 언제까지 어색한 머리를 붙들고 살 수는 없었다. 멋진 헤어스타일을 꿈꾸는 것은 모든 전역자의 공통된 마음이렷다. '야한 생각을 하면 머리가 빨리 자란다'는 허무맹랑한 근거를 굳게 믿기 시작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덧 헤어 스타일링이 가능한 수준으로 머리카락이 자랐을 때, 나는 과감히 미용실로 향했다. 평생 쳐다보지도 않던 패션잡지를 펼쳐 들고, 디자이너와 짧지 않은 토론 끝에 당시 유행하고 있던 '다운 펌'을 시도했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 다소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의 뒤로 디자이너는 내게 "손님, 너무 잘 어울려요"라는 찬사를 던졌다. 미용실을 나설 때까지 나는 디자이너에게 연신 물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거죠? 어쭙잖은 위로는 아닌 거죠? 믿습니다. 디자이너님!"

헤어 스타일링은 근심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넘겼다. 어차피 헤어 스타일은 변했다. 돌이킬 수 없었다.

다음은 옷. 병장 시절, 복학을 꿈꾸며 한 푼 한 푼 힘겹게 모은 월급은 고스란히 의류비 지출로 이어졌지만, 이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 중의 하나. 비싼 돈 들여가며 준비한 헤어 스타일과 패션으로 '오빠'에 한 걸음 나아갔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뿌듯함도 잠시, 개강날이 밝았다. 등굣길에 나는 여자 후배들과 정겹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의 반응은 냉담했다. 내 스타일의 변화를 알아봐 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공들여 준비한 의상은 색상 선택의 착오 때문에 온갖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지금 그 옷은 내 소중한 잠옷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내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을 던졌다.

"선배, 이거 군대가기 전에 산 거 아녜요? 오랜만에 복학했으니 옷 좀 사 입으세요."

더군다나 개강 총회에서 여자 후배들과 처음 대면한 내 모습은 쭈뼛쭈뼛, 우물쭈물 그 자체였다. 여자 후배들의 반응은 "오빠!"가 아닌 "오빠?"였다. 후배들의 이런 반응은 내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내게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빵빵 터지는 오빠가 되고 싶었지만...

나도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왼쪽) 처럼 빵빵터지는 오빠가 되고 싶었다. 물론 영화에서 납뜩이는 재수생이지만...
 나도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왼쪽) 처럼 빵빵터지는 오빠가 되고 싶었다. 물론 영화에서 납뜩이는 재수생이지만...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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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은 '유머'였다.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으랴. 내게 부족했던 것은 유머 감각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농담을 던지며 친밀감을 높여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되고 싶은 '오빠'는 '유머러스한 오빠'가 됐다.

하지만 내 동기에게서 '섣불리 던진 유머는 난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어느 날, 점심 식사를 마친 나, 내 동기 그리고 여자 후배는 학교 근처 카페에 들러 가볍게 담소를 나누기로 했다. 카운터로 향한 우리는 커피를 주문했다.

친구 : "OO야, 뭐 마실래?"
여자후배 : "저는 카페라떼요."
친구 : "여기 카레라떼하고,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직원 : "따뜻한 거로 드릴까요? 차가운 거로 드릴까요?"
여자후배 : "저는 따뜻한 거로요."
친구 : "저는 미지근한 거로 주세요."
나 : "야..."
여자후배·직원 : "..."
직원 : "아, 예. 아메리카노 미지근한거요."

내 동기는 적재적소에 터지지 않거나, 너무 뜬금없는 유머는 역효과를 낸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줬다. 내 동기는 이 사건으로 인해 당분간 의기소침해진 모습을 보였고,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며 평소 유머에 자신이 없던 나는 유머를 과감히 포기했다. 사람은 가끔은 포기해야 될 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선 주세요"... 고등어를 줘야 하나?

너네 뭐라고 하는 거니?
▲ 생선이 뭔가요 너네 뭐라고 하는 거니?
ⓒ 차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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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감각도, 유머도 포기한 나는 '공감력 충만한 오빠'로 거듭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사실 4~5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분명 같은 한국말인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다.

심할 때는 주어와 서술어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말줄임'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는 있지만, 단번에 그 의미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생선'은 생일 선물의 줄임말, '미피'는 미스터피자, '뻐정'은 버스정류장, ' 배라'는 배스킨라빈스. 대충 이런 식이다.

만약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주변의 놀라운 반응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곤 그들과의 세대 차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아이고, 나는 노땅입니다'라고 인정해야 한다. "생선(생일 선물)주세요"라는 말에 정말 생선을 주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심지어 학과 수업 과목명마저 줄여 쓰다 보니 여자 후배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말줄임 표현들을 배우는 수고가 필요했다.

어느 정도 그들의 언어에 도달했을 때, 나는 달라진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일은 그리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내 앞에 복병처럼 등장한 단어는 바로 '뿌염'.

'뿌염'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뿌잉뿌잉'의 또 다른 표현일 줄 알았다. 하지만 '뿌염'은 뿌리염색의 줄임말. '뿌염'을 몰랐던 내게 돌아온 것은 세대차이라는 거대한 장벽. 아직도 그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기에는 갈 길이 멀었다. 아무래도 매일매일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고 있는 듯. 만약 말줄임 총정리 사전이 나온다면 당장에라도 그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꽃송이가>를 모르는 그대여... 당신은 아저씨

말줄임만 익힌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직 갈 길이 먼 내게는 여자 후배들의 문화 코드에도 정통해야 하는 과제도 있었다.

얼마 전, 버스커버스커의 노래가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했을 때,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여자 후배에게 "어떻게 버스커버스커 노래도 몰라요?"라고 타박을 맞았다. 그날 나는 바로 버스커 버스커의 전곡을 들었다(실제로 그들의 노래는 남성인 나를 자극하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몇 번을 되풀이하며 들은 나는 가사를 흥얼거리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제 나도 '버스커버스커'의 노래를 알게 됐다. 이제 이 사실을 여자 후배들에게 알리면 나는 그들과 문화를 공유하는 '공감 충만 오빠'가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여자 후배와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두던 나는 카페에 흘러나오는 버스커버스커 노래 <꽃송이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노림수였다. 여자 후배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안타깝지만 내가 기대했던 답은 아니었다.

"오~, 오빠도 버스커버스커 노래 알아요? 의외네..."

버스커버스커가 지난 26일 오후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쇼케이스에서 멋진 연주와 함께 열창을 하고 있다. 요새 이 친구들 모르면 소외된다.
▲ 버스커버스커 버스커버스커가 지난 26일 오후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쇼케이스에서 멋진 연주와 함께 열창을 하고 있다. 요새 이 친구들 모르면 소외된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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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가 상처를 받은 부분은 오빠'도' 그리고 '의외네'라는 말. 내게 버스커버스커 노래는 모르면 유행 코드에 뒤떨어지는 것이고, 알면 의외라는 놀라운 반응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도대체 나는 어쩌란 말인가. 어느덧 고학번이 돼버린 내가 여자 후배들에게 오빠라고 인정받기는 이리도 어려운 일인가.

여자 후배들에게 오빠로 불리기 위한 나의 노력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전히 머리를 굴려 봐도 마땅한 답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나의 주옥같은 노력은 결코 성과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 내 노력은 그들에게 아주 조금씩 먹혀들기 시작했다. '오빠'로 불리기 위한 나의 처절한 노력을 알게 된 여자 후배들은 나를 '엉뚱하지만 귀여운 오빠'(물론, 그렇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동기들로부터 주워듣게 됐다.

처음 의도와는 조금 다르지만, '엉뚱하고 귀여운 오빠'로 불리게 됐으니 반은 성공한 게 아닐까. 덕분에 나는 '노땅 구닥다리 고학번'으로 불리지는 않으니 말이다.

얼마 전, 소모임 아이들과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우리 테이블 반대편으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감출 수 없는 쓸쓸함과 허전함이 엿보였다. 딱 봐도 고학번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는 남자들은 쓸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는 듯했다. 어쩌면 내 모습이 될지도 몰랐던 그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흘려보냈다.

"형씨들, 나처럼 노력이라도 하란 말이야. 오빠 소리 듣는 게 쉬운 줄 알아?"


태그:#오빠, #버스커버스커, #뿌염, #김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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