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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무신>의 최우(정보석 분).
 드라마 <무신>의 최우(정보석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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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을 넘긴 MBC 드라마 <무신>에서, 고려 무신정권의 수장인 최우(정보석 분)는 부인과 사별한 뒤 외롭게 지내고 있다. 그래서 가신들이 나서서 새장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재혼 상대방은 처녀가 아니라 과부다. 그것도 아이 딸린 과부다.

지난 13일 제26부에서, 최우는 대집성 장군의 집에서 열린 술자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얼마 전 제1차 고려-몽골 전쟁(여몽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대씨 여인(김유미 분)도 동석했다. 대씨 여인은 대집성의 딸이다. 최우의 가신들이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최우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인과 술자리를 함께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대씨 여인은 남편보다는 나라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고, 이에 감동한 최우는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최우는 먼지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대씨에게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급속도로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이들의 혼인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실제로도, 최우는 여몽전쟁 초기에 과부와 재혼했다. <고려사>를 축약·보충한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최우는 고려 고종 19년 2월(1232년 2월 23일~3월 23일) 상장군 대집성의 딸을 후처로 맞이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대씨 여인이 "(그 직전에) 새로 과부가 되었다"고 했다.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안 되던 때에 최우와 재혼했던 것이다.

과부의 재혼을 금기시한 조선시대 선비들 같았으면 이런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을 것이다. 일국의 최고 통치자가 과부와 재혼했다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이고, 그 과부가 남편을 사별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이다.

하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과부의 재혼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란 표현을 쓸 필요도 없다. '별다른 느낌을 갖지 않았다'란 표현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지난 12일 제25부에서는 <무신>의 등장인물이 "우리 고려에는 여성의 재혼을 당연시하는 풍습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 말 속에는 어딘가 여성의 재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말하는 사람 자신이 여성의 재혼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든가 둘 중 하나다.

그러나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남자의 재혼처럼 여성의 재혼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를 포함해서 그 이전 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을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고려에는 여성의 재혼을 당연시하는 풍습이 있어요"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과부나 이혼녀의 재혼에 대해 얼마나 자연스럽게 반응했는가는 제26대 충선왕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충선왕은 원종-충렬왕에 이어 몽골(원나라)의 간섭을 받은 세 번째 임금이다.

충선왕은 여덟 명의 부인을 두었다. 몽골(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기였으므로, 고려왕은 몽골 여인과 반드시 결혼해야 했다. 그래서 결혼한 여인이 몽골 출신 계국대장공주다. 나머지 일곱은 고려인 후궁이다.

조선시대에는 후궁을 지칭할 때 왕비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비(妃)란 표현 속에 '왕의 부인'이란 뜻이 있었다. 그래서 후궁에게는 의도적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후궁은 실제로는 왕의 부인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후궁은 공식적으로는 고위직 궁녀에 불과했다. 일부일처제 때문에 두 명의 부인을 인정할 수 없어서 이렇게 했던 것이다.

고려시대, 과부의 재혼 '자연스러웠다'

 최우의 재혼 상대방인 대씨 여인(김유미 분).
 최우의 재혼 상대방인 대씨 여인(김유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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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고려시대 후궁은 격이 높았다. <고려사> '후비 열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려시대에는 '비'란 표현이 후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후궁 역시 명실상부한 '왕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제의 제약이 없었기 때문에, 후궁에게도 공식적으로 부인의 지위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왕의 부인으로 인정된 고려시대 후궁들 중에 과부들이 있었다. 충선왕의 후궁들 중에도 그런 여성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순비 허씨다. 허씨의 첫 남편은 왕족인 평양공 왕현이었다. 허씨는 왕현과의 사이에서 딸 넷과 아들 셋을 낳았다.

여성이 자유롭게 재혼하는 오늘날에도 자녀 일곱을 데리고 재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점은 허씨가 충선왕과 재혼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또 다른 한 명은 숙비 김씨다. 숙창원비 김씨라고도 불리는 이 여성은 본래 최문이란 선비의 부인이었다. 남편을 잃고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김씨는 세자 왕장(훗날의 충선왕)의 소개로 충렬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는 충렬왕에 의해 숙창원비에 책봉됐다.

충렬왕이 죽은 뒤, 김씨는 장례식장에서 세자 왕장과 '눈빛 교환'을 했다. 그러고는 충선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는 충선왕에 의해 숙비로 책봉되었다.

숙비와 충선왕의 결혼에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자. 첫째는 아버지(충렬왕)와 새어머니(숙비)의 재혼을 성사시킨 아들(충선왕)이 아버지가 죽자마자 새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최문 및 충선왕과 사별한 과부가 충선왕과 결혼했다는 점이다.

첫째 부분은 고려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패륜이었다. 이것은 충선왕의 도덕성에 흠집을 남길 만한 일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여인을 탐한다는 것은 지금이건 옛날이건 한국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둘째 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숙비가 이전에 몇 번 결혼했던지 간에, 그것 자체는 후궁의 결격사유가 아니었다. 과부의 재혼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던 것이다.

충선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과부의 재혼에 대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아이 딸린 과부의 재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우가 과부와 재혼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분위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여성이 재혼을 하면 금방이라도 사회가 어지러워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최우나 충선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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