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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범 선생이 4월 28일 포항 호미곶 새천년해맞이광장에서 11바퀴 2만7500km 걷기여행을 마쳤다.
▲ 대한민국 11바퀴 2만7500km 종료 남상범 선생이 4월 28일 포항 호미곶 새천년해맞이광장에서 11바퀴 2만7500km 걷기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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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가을 마지막 바퀴만 걷고 이제 그만 걸을까 봐. 국토 12바퀴 3만km 정도 걸었으면 충분하겠지?"

지난 28일 포항 호미곶 새천년해맞이광장에서 남상범(80) 선생을 다시 만났다. 대한민국 11바퀴 걷기여행을 일단락하는 순간이었다. 몇달 봄볕에 그을린 까만 얼굴이 동해 바다의 쪽빛을 배경으로 더욱 까맣게 빛났다. 선생의 국토 걷기순례는 계절을 넘고 세월을 건너, 햇수로 8년이 흘렀고 거리로 환산하면 2만7500km에 이른다. 글자 그대로 우리 땅, 우리 바다를 실패처럼 휘감고 또 휘감았다. 11바퀴를 마치는 순간에도 다음 여정을 떠올리는 그의 일성에서 팔순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았다. 선생에게 걷기는 삶 그 자체다.

선생은 지난 2005년 11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서울을 기점으로 한 번은 동쪽으로, 한 번은 서쪽으로 국토 해안선 10바퀴를 걸었다. 이번 11바퀴는 해안가 대신 내륙을 3차로 나눠서 걸었다. 28일은 3차 내륙 걷기를 마치는 날. 다음은 남 선생과의 일문일답.

- 11바퀴 내륙걷기의 일정과 코스를 소개해 달라.
"2011년 6월 내륙걷기 1차는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을 출발, 반도를 활처럼 휘어 부산까지 종단했다. 한달 조금 넘게 걸렸다. 그해 10월 2차 걷기는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를 출발해 경남 남해 관음포까지 내려왔고 한 달반 가량 소요됐다.

이번 내륙 3차는 국토의 최북단에서 최남단, 그리고 최서단에서 최동단으로 걸었다. 지난 3월 8일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에서 출발해 경기도 포천→가평→남양주→광주→용인→안성→충청북도 진천→증평→괴산→보은→옥천→충청남도 금산→전라북도 완주→진안→임실→장수→남원→전라남도 곡성→화순→담양→화순→보성→고흥→완도군 금당도→ 금일도→생일도→약산도→고금도→신지도→ 노화도→소안도 항일운동 기념공원광장에서 4월 6일 종료했다.

이어 시외버스를 타고 전남 신안군 자은도로 이동한 뒤 자은도→암태도→압해도→무안→함평→광주시→광산→장성→담양→순천→임실→장수→경상남도 함양→거창→경상북도 김천→성주→고령→ 대구시→경산→청도→경주→포항 호미곶에서 4월 28일 봄햇살을 맞으며 종료했다." 

"시골길을 걸으며 희로애락을 밟았다"

내륙 11바퀴 걷기 코스를 표시한 5만 분의 1 지도
▲ 11바퀴 걷기 코스 내륙 11바퀴 걷기 코스를 표시한 5만 분의 1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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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매직으로 여정을 표시한 5만 분의 1 지도가 마치 인체의 동맥같다.
"최북단에서 최남단, 그리고 최서단에서 최동단을 걸었으니 당연하다. 내륙 코스만 표시한 게 이런데, 11바퀴를 모두 한 지도에 그으면 연줄을 감은 실패처럼 보일 것이다."

- 이번 내륙걷기에서 느낀 게 있다면.
"지방 국도와 시골길을 걸으며 농민의 희로애락을 밟았다. 편안하고 소담스런 정취와 달리 농촌의 현실은 척박하고 위태로웠고 그게 피부로 와 닿았다.

농촌이라고 해서 다 못사는 건 아니었다. 전남 완도군에 가보면 전복 양식업을 통해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농들은 여전히 가난의 쪽박을 차고 있었다. 농민들은 자녀교육에 심혈을 쏟아 서울이나 수도권 대학에 자녀들을 유학시키는데, 대학 등록금부터 기숙사 비용까지 하늘 높이 치솟아 등이 휜다고 표현했다.

자녀들이 졸업을 해도 취직과 주택문제 등아 도사리고 있어 여전히 절망스럽다고도 했다. 이번에 타결된 한미FTA도 농민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고도 말했다."

한미FTA에 한숨과 걱정 쏟아내던 농민들

경북 성주군에서
▲ 남상범 선생 경북 성주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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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들은 한미FTA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걱정과 한숨이 뒤섞여 있다. 대기업에서 생산하는 자동차나 전자제품에는 유리하지만 농산물이나 축산물에는 상당히 불리하게 이뤄졌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대기업의 이익을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이 절실하다. 그리고 농민들은 현재의 지방자치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지방자치제를 없애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지방 잘 살자고 만든 게 지방자치제도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시골에 불필요한 도로나 체육관, 복지관 같은 시설들이 경쟁하듯 만들어졌다. 건물만 번듯하게 지어 놨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태반이 개점휴업 상태였다. 천문학적인 돈이 다 어디서 나왔겠느냐. 국민의 혈세고 피같은 돈이다. 진짜 농민을 위해 쓰여야 할 돈이 괜한 곳으로 갔다는 뜻이다.

특히 지자체들은 도로 개설에 있어 병적인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경주와 포항 가는 길이 대표적이다. 기존 국도는 일반 차량이 거의 없어 텅빈 상태인데도, 곳곳에 고속화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단체장에게 뭔가 떨어지는게 있으니 도로 놓는데 혈안이 아니겠느냐'고 비판했다. 내가 만난 시골사람들은 '제발 필요 이상의 도로개설이나 공원조성, 복지관 건립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부정축재하는 단체장을 가중처벌하는 부정축재근절대체법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 이도 만났다."

"내가 걷는 이유... 분열된 민족성의 봉합을 위해"

경북 성주군의 지방도로를 걷는 남상범 선생
▲ 남상범 선생 경북 성주군의 지방도로를 걷는 남상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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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중에 4.11 총선을 맞았는데.
"여전히 지역 편가르기가 한창이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지역 대 지역, 정당 대 정당이 각을 세우고 피 흘리는 쟁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경상도가 가장 심했다. 경상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당에 대한 지지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답답하고 서글픈 현장이었다."

- 피부로 느낀 지역 편가르기를 말해달라.
"지역 간 감정의 골이 여전히 깊었다. 특히 전라도 사람들의 피해 의식이 가장 컸다. 내륙걷기 이틀째 몸이 찌뿌듯해 경기도 포천의 어느 대중탕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60대 초반의 한 남성을 만났다.

이런저런 말 끝에 전라도가 우리 국토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라도 사람들이 가장 인심이 넉넉하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30년 가까이 간직했다는 비밀을 내게 털어놨다. 자신은 사실 전라도 출신이지만 객지에 살면서 여태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을 깜쪽같이 속이며 살고 있다고 했다.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 고향을 속이고 말투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 공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어릴적부터 뼛속까지 파고든 전라도 특유의 말투를 버리고 경기도 말투를 쓰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싶어 가슴이 아려왔다. 전라도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차별받고 설움 받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으로 사례였다. 좁은 땅덩어리에 같은 민족끼리 왜 이리 반목하고 적대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유도 없고 실체도 없다. 이게 다 위정자들의 못된 짓거리 때문이다. 내가 대한민국을 걷는 이유는 바로 찢어지고 분열된 민족성을 마음의 바느질로 봉합하기 위해서다. 발걸음의 무게감을 다시 느꼈다."

따뜻한 밥 한 공기에 눈물이 핑

땀에 하얗게 소금이 낀 모자
▲ 남상범 선생 땀에 하얗게 소금이 낀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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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으면서 좋은 풍경 많이 봤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괴테는 '자연은 어쩌면 저렇게도 화려하게 나를 향해 빛나는 것일까(오월의 축제)'라며 자연을 예찬했다. 괴테의 싯구를 실제 몸으로 느낀 축복의 길이었다. 자연은 늘 감동을 주지만 사람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감동받는 게 걷기 여행이다. 걷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길을 걷는 인생여행이다."

- 사람에게 상처 받았다면?
"시골인심이 좋을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몰인정하고 야박할 때가 더 많다. 밤길 오지에 갇혀 잘 데가 없는 이 늙은이한테 잠자리를 내주지 않는 몰인정한 이들이 많았다. 젊은 사람보다 나이가 많을수록, 그리고 학력이 높고 경제력이 좋을수록 더 인색하고 야박했다. 그리고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옹졸하고 쩨쩨했다."

- 그게 요즘 세태 아닌가.
"김삿갓도 팔도를 돌며 '시골인심 야박하다'는 글을 남겼다. 요즘 인심이나 옛날 인심이나 야박하긴 매한가지다. 사람이 문제지 지역이나 시대가 중요한 게 아니다."

- 그럼 사람에게 감동받은 적은?
"끼니를 거른 내게 조건 없이 밥상을 차려주는 애기 엄마들을 가끔 만날 때가 있었다. 친정아버지 대하듯 정성을 다한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받으면 눈물이 핑 돈다. 풍경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교감을 나눴다. 이런 인간의 정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2만7500km를 홀로 여행할 수 있었다. 걷기 여행, 그건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나는 이들과 지금도 연락을 주고 받는다."

3만km 걸으면 일단 그만 두겠다

11바퀴를 끝내고 기자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남상범 선생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표시한 지도를 펼쳐 보이고 있다
▲ 2만7500km 걸은 남상범 선생 11바퀴를 끝내고 기자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남상범 선생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표시한 지도를 펼쳐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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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기 여행의 가장 좋은 점과 가장 어려운 점은?
"진짜 여행은 혼자서 하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려면 반드시 혼자 다녀야 한다. 더러 1대 1로 만나 자분자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상대는 경계를 허물고 자신의 치부나 속내을 스스럼 없이 털어놓곤 한다. 혼자하는 걷기여행의 마력이다.

반면 먹고 자는 문제가 가장 고달팠다. 걷기 여행은 잘 먹고 잘 자야 한다. 그래야 오래 걸을 수 있다. 시골의 숙박업소와 식당은 여전히 불결하고 불친절하다. 식당에 들어가면 혼자(1인분)라서 밥을 줄 수 없다고 하는 곳도 적지 않다. 관광 한국으로 도약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한 달 정도 일본에 건너가 걷기 여행을 했는데 산골인데도 청결하고 정갈했다. 80년된 반일 감정이 한달 여행으로 사그라 들었다."

- 2만7500km 걸으면 세상을 달관할 것도 같은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럴수록 경계해야 한다. 지난해 가을 내륙2차 걷기를 할 때였다. 평창 오대산 자락에서 밤이 저물어 어느 작은 암자에 하룻밤을 신세 진적이 있었다. 비구니 주지스님에게 2만5000km를 걸어서 여행했다고 말을 하니 대뜸 그 스님이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시라'고 귀뜸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가에서 말하는 하심(下心)을 다시 깨달았다."

- 여비는 어떻게 충당했나.
"걷기는 가장 값싼 여행인 동시에 가장 비싼 여행이다. 국토 한바퀴를 도는데 대략 1500만 원이 소요된다. 언론 인터뷰에서 몇 차례 언급했지만 첫 바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길에서 만난 친구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1200만 원 가량의 급전을 도움받았다. 특히 두 바퀴 째부터 나를 물적, 심적으로 지원해 주는 젊은 목장주인으로부터 800만 원 가량을 후원 받았다. 그는 여태 1억8000만 원에 가까운 거액을 아무 조건없이 후원해줬다. 그는 나의 걷기가 단순한 여행이 아닌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도 말했다. 무릎 끓어 그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표하고 싶다."

- 언제까지 걸을 생각인가.
"12바퀴 3만km를 채우면 '일단' 멈출 생각이다."

- 일단이라니?
"걷기는 생물이다. 마음이 어찌 변할지 나도 모른다. 서너달 휴식을 취하면서 10바퀴 2만5000km를 걸은 것을 바탕으로 책을 낼 생각이다. 초고는 대충 썼는데, 글을 다듬고 만지는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12바퀴 종료 시점에 맞춰 출간할 예정이다."

남상범 선생이 국토 11바퀴 2만7500km 걷기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서 비망록을 정리하고 있다.
▲ 남상범 선생 남상범 선생이 국토 11바퀴 2만7500km 걷기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서 비망록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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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남상범 대한민국 10바퀴 2만5000km를 걷다'(http://cafe.daum.net/mi5267)에 접속하면 그간 선생의 걷기에 관한 모든 기록과 사진 및 생생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태그:#남상범, #걷기,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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