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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자주 즐기지는 않지만 크고 작은 산에 오갈적마다 아쉽고 궁금한 게 있었다. 낮에도 좋지만 밤에 산행하는 기분은 어떨까? 집에서 가까운 서울 북한산만 해도 오후 5시 정도면 서둘러 내려와야 했기에 밤 산행은 비현실적인 일로만 생각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 경우에도 해당되는지 북한산만큼 가까이에 있는 남산이 저녁나절 오르기 좋다는 것을 왜 떠올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서울 살이가 분주하고 여유가 없다는 뜻이리라.

예상대로 저녁녘의 남산은 고즈넉하고 고요해서 요즘 같은 화창하기 그지없는 낮과는 또 다른 느낌과 멋을 전해준다. 그런 멋을 더욱 고조시키는 것들이 남산에 존재하는데 바로 성곽길과 둘레길이다.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생긴 성곽길은 남산 밤 기행을 더욱 운치 있게 해주고, 차들만 쌩쌩 달렸던 남산 둘레길은 이제 걷는 사람들만을 위한 넉넉한 산책길이 되었다.   

밤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남산의 길 위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이름만 바뀐 채 남아있는 옛 중앙정보부 혹은 안기부 건물들이 그것. 군사 독재로 인해 굴곡진 현대사 속을 용기 있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남산 둘레길 에서 톡톡히 느끼게 되었다. 

성곽길 따라 남산 오르기

신라호텔 야외공원 옆으로 초입 성곽길이 남산을 향해 구불구불 나있다.
 신라호텔 야외공원 옆으로 초입 성곽길이 남산을 향해 구불구불 나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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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남산 봄 기행을 가자며 그럴듯한 말로 꼬여 내는 것 까진 성공했는데 오후 6시에 만나자고 하니 놀란다. 친구도 남산의 야경과 저녁나절이 좋다는 걸 한동안 잊고 살았다며 청춘시절 남산 타워에 올라가 데이트 하던 추억을 꺼낸다. 수도권 전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남산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있는 장충 체육관 뒤쪽으로 걸어갔다. 

이 코스의 산행길이 좋은 건 남산 성곽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왕 남산을 오르는 길이라면 조선 초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만들었다는 성곽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길을 따라 남산까지 이정표가 잘 나있다. 운치 있는 성곽에 신라호텔의 야외 조각 공원까지 합세를 하니 초장부터 기분이 좋다. 산길이지만 오르막이 완만해서 배낭 속에 가지고 온 등산용 스틱이 민망해진다.
현대식으로 복원된 성곽이 대부분인 성곽길에서 오래된 돌을 마주치면 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현대식으로 복원된 성곽이 대부분인 성곽길에서 오래된 돌을 마주치면 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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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이 끊어질 즈음 나타난 한눈에 봐도 아주 오래된 돌담이 걸음을 멈추어 서게 한다. 보통 서울 성곽길의 성곽 대부분은 너무 말끔하고 깔끔하게 복원이 되어 성곽이라는 옛스러운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런 아쉬움이 잠시 사라지는 순간이다. 돌담 곳곳에 피어난 야생화들과 더불어 한 폭의 큰 그림 같아 그 앞에 서서 조상들의 작품을 잠시 감상한다.

성곽길 끝에 서있는 작은 정자위에 올라서니 이제 서야 남산이 한 눈에 시원하게 보인다. 곧 오월의 푸르름으로 가득할 나무들로 울창한 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초록의 숲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커다란 그물망이 눈에 몹시 거슬린다. 반얀트리 클럽 (옛 타워호텔)에 있는 골프 연습장이다. 골프가 매력적인 취미이자 스포츠이긴 하지만 이때만큼은 그저 자연속의 흉물로만 보인다.    

가로등 켜진 저녁녘의 남산 순환로, 사진과 달리 너무 어둡지 않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길이 된다.
 가로등 켜진 저녁녘의 남산 순환로, 사진과 달리 너무 어둡지 않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길이 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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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나절 고즈넉하게 산속 걷기

국립극장을 지나 서울타워를 향해 남산 순환로 길을 오르던 시각이 7시 반쯤. 바라던 바대로 해가 저물어가고 산길에 등이 하나 둘 켜진다. 이 시간이면 벌써 산을 내려와야 했던 걸 떠올려보면 이색적인 기분이 들고 발걸음은 여유롭기만 하다. 적당한 수의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심심하지 않게 길을 올랐다. 땅거미가 드리우니 나무와 꽃의 화사함은 보이지 않지만 가로등에 은은하게 비쳐오는 산속의 느낌이 한껏 고즈넉해서 좋다.

좀 쉬어 가라는 듯 순환로 한쪽에 나무 데크 쉼터 겸 전망대가 나있다. 차들과 빌딩들로 가득한 서울 풍경은 그저 삭막했었는데, 도시의 야경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의 문명과 닮았다. 밤이라 그런지 코로 들어오는 공기도 시원하고 상쾌하다. 낮엔 나무와 꽃들의 향연에 탄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이젠 남산의 야경에 감탄을 하며 너도 나도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들이댄다.         
        
은은한 불빛이 비쳐주는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새 남산타워가 나타난다.
 은은한 불빛이 비쳐주는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새 남산타워가 나타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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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얀트리 클럽에서 끊겼던 성곽길이 남산 순환로에 다시 나타난다. 밤이지만 따듯하게 보이는 조명불빛이 성곽을 비쳐주어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인다. 이 성곽길을 따라가도 남산타워가 나온다. 새들도 잠들었는지 고요하기만한 오르막 길은 은은한 불빛에 비쳐 운치 있는 산행의 기분이 들게 한다. 오랜만에 내안의 나와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 새 남산타워가 커다란 등대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정상부근은 산책 나온 주민, 관광 온 사람들, 자전거타고 올라온 라이더들 등으로 시끌벅적하다.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는 편의점에서 향긋한 커피에 빵을 곁들여 먹으며 다리 힘을 재충전한다. 남산 도서관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안중근 기념관이 있는 산 중턱에 걷기 전용 길인 '남산 둘레길'이 있다고 해서다.       

남산 둘레길에서 마주친 야만의 현대사

남산 '삼순이 계단'에서 가위, 바위, 보 놀이를 보니 옛 사랑이 아련히 떠오른다.
 남산 '삼순이 계단'에서 가위, 바위, 보 놀이를 보니 옛 사랑이 아련히 떠오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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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히트한 드라마에서 이름 지은 '삼순이 계단'에서 한 떼의 젊은이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노는 모습에 보는 사람들도 덩달아 동심으로 돌아간다. 언제였던가 나도 이 계단에서 그녀와 둘이서 저렇게 놀며 웃음 지었던 때가 생각난다. 추억 속에 남산 계단은 선명히 남아있지만 그녀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건 다 옛일이 되었기 때문이겠지...

계단을 내려와 오른쪽으로 와룡묘, 서울시 남산별관, 국립극장 방면으로 오붓하게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지는데 바로 '남산 둘레길'이다. 아까 걸어왔던 '남산 순환로'와 달리 차량은 물론 자전거도 통행이 안 되는 오로지 걷는 사람들을 위한 길이다. 둘레길답게 산중턱을 오르막길 하나 없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머리 위 가까이에서 불빛들이 반짝거리길래 얼굴을 들어 보니 작은 케이블카가 남산 타워를 향해 미끄러지듯 흘러가고 있다. 밤 산행은 반짝거리는 작은 케이블카마저 정답게 보이게 한다.    
     
남산 둘레길 어느 벤치에서 보이는 서울시 남산 별관. 과거 안기부의 대공 수사국으로 고문으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남산 둘레길 어느 벤치에서 보이는 서울시 남산 별관. 과거 안기부의 대공 수사국으로 고문으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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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은 없지만 잠시 쉬어가고파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바로 뒤 나무사이로 왠 밋밋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이 보인다. 이정표에 서울시 남산 별관이라고 써있는 이 건물은 바로 중앙정보부 (안기부)의 대공 수사국이 있던 곳으로 끔찍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주변에 중앙정보부 남산 본관이었던 서울 유스호스텔을 비롯해 대여섯 개의 건물들이 1961년부터 1995년까지 야만의 우리 현대사를 증언하듯이 서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임수경씨가 1989년 방북했다가 돌아오자마자 체포되어 끌려 갔던 곳도 저 서울시 남산 별관 건물이다. 삼십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고문을 받으면서도 봄이면 이렇게 화려하게 벚꽃들이 피어나고 시민들이 가족, 친구들과 남산에 놀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안기부 창문 밖으로 남산의 봄이 보이기라도 하면 피해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안기부장의 공관이었던 곳이 남산 '문학의 집'으로 변신할 정도로 아이러니가 느껴지는 남산 속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성곽길도 좋고 둘레길도 좋지만 숲길을 걸으며 역사를 배우고 민주주의의 가치와 인권의 소중함을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수도권 전철 3호선 동대입구역 하차 신라호텔 뒤쪽 성곽길에서 출발 - 남산 순환로 - 남산 타워 - 안중근 기념관 - 남산 둘레길 - 장충단 공원 - 3호선 동대입구역
 수도권 전철 3호선 동대입구역 하차 신라호텔 뒤쪽 성곽길에서 출발 - 남산 순환로 - 남산 타워 - 안중근 기념관 - 남산 둘레길 - 장충단 공원 - 3호선 동대입구역
ⓒ 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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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4/28일날 다녀왔습니다.



태그:#남산, #남산성곽길, #남산둘레길, #안기부, #중앙정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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