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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형평운동가․애국지사인 백촌(栢村) 강상호(姜相鎬, 1887~1957) 선생의 묘역에 안내판을 만들어 세운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회장 장승환)는 25일 오후 4시 30분 진주 새벼리 언덕에 있는 강상호 선생 묘역에서 제막식을 갖는다.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이다.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지식인 등이 '형평사'를 결성한 뒤, 전국으로 퍼졌다. 이 단체가 그 날을 기려 형평운동을 이끌었던 강상호 선생 묘역에 안내문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25일 오후 진주 새벼리 언덕에 있는 고 강상호 선생 묘소에 한글과 영어.일어로 된 안내판을 만들어 설치한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25일 오후 진주 새벼리 언덕에 있는 고 강상호 선생 묘소에 한글과 영어.일어로 된 안내판을 만들어 설치한다.
ⓒ 형평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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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호 선생의 묘역이 일반에 알려지기는 1990년대 이후부터였다. 그동안 유가족들이 묘소를 관리해 왔다. 묘소는 넓지도, 화려하지 않다. 그러다가 '형평운동70주년기념사업회'(현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학술행사․조형물 건립 등 기념사업이 벌어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상호 선생 묘소는 한때 국립묘지로 옮겨질 뻔했다. 2005년 정부가 독립유공자(애국지사)로 추서했던 것이다. 유족들은 묘역 정비를 진주시에 요구했지만, 진주시는 개인 묘소라는 이유로 시 차원이 정비가 불가하다고 통보했던 것.

이에 유족들은 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묘소 이전에 반대하면서 '강상호 선생 묘역 역사공원화 사업'을 제안했다. 이후 진주시의회는 2006년 주민청원을 받아들여 통과시키기도 했다.

진주시가 묘역 입구 도로에 '안내 표지판'을 세운 때는 2007년이다. 기념사업회는 진주시에 강상호 선생 묘역 정비를 요청했고, 최근 진주시는 묘소 부근 수목정비작업을 마쳤다.

안내판은 한글 안내판이 가운데 있고 좌우로 일어․영어 안내판이 있다. 장승환 회장은 "형평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강상호 선생에 대한 정당한 예우를 통해 진주시에 대한 시민들의 긍정적인 여론 형성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강상호 선생 비석 앞면.
 강상호 선생 비석 앞면.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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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형평운동가 강상호" 안내판 전문이다.

백촌(栢村) 강상호(姜相鎬, 1887~1957) 선생은 1887년 진주군 정촌면 가좌리에서 진주군 대안면장을 지낸 강재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뒤 늦은 나이에 진주공립보통학교와 진주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남 돕기를 좋아하는 부모의 뜻을 이어 1917년부터 9년 넘게 가난한 마을 농민들의 호세(戶稅)를 대납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구한말과 일제강점시대를 살면서 국채보상운동 경남회 결성(1907), 진주사립봉양학교 운영(1915), 진주의 삼일 운동 주도(1919), 일신고보 설립 발기인(1920), 진주노동공제회 회계(1923), 일본인 목화 부정사건 해결 실행위원(1924),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1927) 등의 일을 맡아하였다. 이런 여러 사회 활동 중에서 선생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형평사를 창립하여 형평 운동을 앞장서 이끌어간 일이었다. 조선시대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이다(1923~1935).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을 빗대어 당시 사람들 중에는 선생을 '새백정'이라 비웃기도 하였다. 1957년에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진주 사람들은 한국축산기업조합연합회장으로 성대히 장례를 치르고 선산인 이곳 새벼리 언덕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2005년에 애국지사로 추서하였다.


태그:#강상호 선생, #형평운동,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진주 새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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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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