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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30대 초) 군산 명산동의 유곽.
 일제강점기(1930대 초) 군산 명산동의 유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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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종걸(宗杰) 스님이 제공한 사진으로 80여 년 전 군산의 유곽(遊廓) 풍경이다. 작년(2011) 추석 때 일본인 도쓰카 다타오(56)씨가 친할아버지(나까야마)가 운영하던 '군산병원'의 조선인 약제사 임진호씨 자손을 찾으러 오면서 가져왔다고 한다.

보고 또 보고. 놀라움과 함께 궁금증이 일었다. 말로만 듣던 일제강점기 군산 유곽의 게이샤 모습과 최근에 촬영한 사진처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관한 정성이 놀라웠다. 친할아버지가 게이샤와 찍은 사진을 공개할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쓰카씨가 할아버지 얼굴을 보여주려고 가져왔으며, 일인들은 유곽 출입을 생활 일부로 여기기 때문인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더라"는 종걸 스님 부연과 <유곽의 역사>(홍설철 지음) 내용은 우리와 일본의 성(性)문화 차이를 새삼 느끼게 하면서 궁금증을 푸는 열쇠 노릇을 해주었다.

"1930년 '일본 유람사'는 아예 <전국유곽안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이 자료에는 일본열도뿐만 아니라 조선, 대만 등지의 유곽 위치, 가격 등이 적혀 있다. 이 책에는 일본 본토는 물론 당시 일본 영토였던 조선과 대만 지역의 유곽까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홍설철의 <유곽의 역사> 87쪽)

"얼마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관광지를 안내하는 고서(古書)를 우연히 봤다"며 "군산의 명산동 유곽과 군산공원, 군산수원지, 비응도 해수욕장 등도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종걸 스님 얘기는 유곽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각이 대중적임을 뒷받침해주었다.

관복차림 '초상화', 흉측스런 '도요토미 히데요시' 모습 상상 돼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스물세 명으로 술상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표정이 모두 밝아서, 마치 스모 선수 우승을 축하하는 주연(酒宴) 자리로 보이기도 한다. 실내에서 많은 사람이 기념촬영을 한 것으로 미루어, 유곽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쪽 중앙 기둥을 경계로 좌우에 들어선 오시이레(붙박이장)와 도코노마(장식용 공간), 그리고 다양한 풍속화가 그려진 액자와 족자는 왜색을 짙게 풍긴다. 화려한 궁중의상 차림의 여성과 관복차림의 남자 초상화를 보는 순간 임진왜란(1592~1598)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흉측스런 모습이 상상되기도.

스모 선수 4~5명이 어여쁜 게이샤와 어울리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게이샤들 목을 감싸고 호기를 부리는 선수도 있는데, 1980년대 한국 씨름계를 평정했던 이만기 선수가 요정에 가서 사진처럼 벗었다면 기생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방을 뛰쳐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스모 선수 중 체격이 우람한 중앙의 히슈산(肥州山: 1906~1980)은 일본에서 주니어챔피언(세키와케)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현역시절 신장 180cm에 체중 109kg으로 당시로는 거구였으며, 한때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리키시(力士)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군산부(府)에서도 일본 국기(國技)인 스모 경기가 가끔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쓰카씨는 사진 설명문에서 "히슈산은 초창기 군산부청과 군산신사가 있던 군산공원(월명공원) 아래 '신사광장'(현 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스모 경기를 수업했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라고 말했다.

스모 선수와 술잔을 건배하는 두 사람 중 검정 기모노 차림에 콧수염을 기른 스포츠형 머리의 남자가 일본에서 사진을 가져온 도쓰카씨 조부(祖父) 되는 '나까야마' 원장이다. 그의 취미는 마작, 경마 등이었으며 활달하고 친절해서 조선인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거류민단 시절(1903) 군산에 '中山病院(중산병원)'을 개업하고, 1906년 '군산병원'을 인수 합병한 '나까야마'는 훗날 군산부(府) 의원을 지냈고, 어머니 장례식을 금광사(현 동국사)에서 치렀으며, 해방 후에도 군산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 여성들 '인신매매처'가 되었던 '유곽'

유일하게  겉모습이 남아 있는 군산 명산동 유곽, 1920년대 건물로 알려진다.
 유일하게 겉모습이 남아 있는 군산 명산동 유곽, 1920년대 건물로 알려진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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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가 깔린 바닥의 접시와 맥주병들 그리고 일본 전통악기 샤미선(三味線) 등은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특히 삼색 태극 문양이 들어간 대형 부채가 눈길을 한참 멈추게 했다. 게이샤 중에 조선 여성이 상당수 섞여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반영(96) 화백은 "일제가 조선에 처음 유곽을 만들 때는 접대부(게이샤) 모두 일본 여성으로 채웠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여성이 하나둘씩 늘어 1930년대 들어서는 6대4 비율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조선 처녀들이 팔려가거나 요정에서 빚을 많이 지고 인기가 떨어진 기생들이 유곽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라는 것.

명산동 유곽은 일제가 미성년자 출입을 엄격히 규제했다 한다. 그럼에도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범죄를 저지르고 달아난 범인의 피신처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나이 어린 조선 여성들 인신매매처가 되기도 했다. 다음은 소설 줄거리와 당시 신문 보도를 정리한 것이다.

"그 여자는 17세 때 그녀 아버지에 의해 유곽(창녀촌)으로 팔려갔다가 몸값 20원을 10년 동안이나 갚고도 빚이 60원이나 남았는데 병들고 산송장이나 다름없이 되어, 쓸모가 없어지자 겨우 유곽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일본 집 식모살이를 한다고 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고향(故鄕)> 줄거리에서)

"지난 4일 밤 11시경 군산부 신흥동 유곽 태평각(太平閣)에 일본사람 하나가 들어와 차를 마신 후 그냥 나가는 것을 김향심(19세)이 찻값을 주고 가라니까 돌연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향심을 찌르고 도주하는 것을 잡아 군산경찰서에서 문초 중인 바 향심은 다행히 오른손에 경상을 입었을 뿐 큰일은 없다고 한다." (1930년 12월 8일 <동아일보>)

"충남 서천군에 사는 유부녀 황성녀(16세)는 학생들 원족(소풍) 구경을 갔다가 외척 송(宋) 아무개를 만났는데, 김성보란 자와 공모한 송씨는 황씨를 감언이설로 꾀어 군산 유곽에 60원을 받고 팔려다가 발각되자 달아났다고 한다. 송씨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며, 김씨는 자신의 딸들을 모두 군산 유곽에 팔아 낭비한 자라고 한다." (1930년 3월 5일 <동아일보>),

"일본 '유곽'은 '쫄짜'들이나 다니는 집이었지"

 호텔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서양식 건물. 윗부분만 남아 있어 아쉬웠다.
 호텔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서양식 건물. 윗부분만 남아 있어 아쉬웠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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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매매 역사를 정리한 책 <유곽의 역사>에는 "1930년 명산동 유곽에는 일본인 업소 8곳이 있었으며 접대 여성은 모두 61명이었는데, 조선인 업소 3곳에는 26명의 여성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하반영 화백은 "크고 작은 유곽이 20개 이상 있었고, 접대 여성도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외지 손님을 위한 호텔도 있었다"고 전했다.

"1930년대는 신의주, 함경도 등에서도 군산 미두장(米豆場)으로 미두하러 오는 조선 부자가 많던 때였지. 그때 명산동 유곽은 요정(料亭)처럼 게이샤들이 춤도 추고 술도 팔았어. 사람들은 유곽에 가는 것을 천하게 여겼지. 적어도 '료데이'(요정)에는 가야지, 유곽은 '쫄짜'들이나 드나드는 집이라고 해서 '조로야'(卒伍屋)라고 불렀다구.

나는 돈도 없고 나이가 어려서 유곽에 드나들진 못했지만, 명산동 입구에 있는 '히노마루 카페'에 다니면서 겉껍데기는 많이 구경했지. 화대도 전주보다 비쌌어. 잠깐 즐기는 쵸오또(一寸) 화대는 전주보다 50전(錢) 비싼 1원, 하룻밤 자는 나가야(長夜)도 전주는 1원 50전, 군산은 3원이었거든."

일찍이 외톨이가 되어 문구점 점원, 식당 '뽀이'(boy), 극장 '양치기'(알바) 등을 하면서 번 돈으로 그림 도구를 샀던 하 화백. 그는 일제의 감시 아래 군산항 부두에서 하루에 쌀 네 통(4말)짜리 스무 가마를 나르고 1전짜리 '맘보'(딱지) 20개를 받아 환전상에게 바꾼 18전으로 국밥(5전)을 사 먹으며 사춘기를 보내고 18세 때 만주로 떠난다.

일제는 삼남지방의 농산물 수송을 위해 전국 최초로 전주-군산을 잇는 신작로를 만들고(1908), 이리(익산)-군산 철도를 개설(1912)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군산에 유곽이 들어선 시기도 그즈음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하 화백은 "일인들을 상대하는 소수의 유곽은 이사청(理事廳) 설치(1906) 이전부터 영업하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정했다.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를 관할하면서 경술국치(1910)와 함께 '군산부청'으로 명칭이 바뀌는 당시 군산 이사청은 공주와 전주에 지청을 두고 부이사관을 배치했다. 또한, 이사청 관내에 두 곳의 지청을 둔 곳은 전국에서 경성(서울), 부산, 군산 세 곳 뿐이었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위 기사는 김중규의 <군산역사 이야기>와 홍성철의 <유곽의 역사>를 참고했습니다.
귀한 사진을 제공해준 도쓰카 다타오님과 종걸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태그:#군산 유곽, #명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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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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