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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서 사는 남자와 여자, 부부는 다 그런 줄 알았다. 방이 몇 개 없었으니, 그중 어린 막내는 데리고 잘 수 밖에 없으셨을 것이고 그러니 설핏 잠에 빠져 드는 내 귓가에는 늘 도란도란 하루 일과를 서로 보고하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아침에 잠을 깰 때도 마찬가지여서 하루의 일정과 계획을 나누는 두 분 목소리가 내게는 자명종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부 모두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는 걸 안 건 결혼하자마자였다. 나는 밤잠이 많고 남편은 아침잠이 많아 서로 이야기 나눌 새 없이 번갈아 잠들고 깨어나기 바빴다. 그래도 어찌 어찌 살다보니 20년이 넘었다.

경주시 외곽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50년 넘게 같이 살아온 부부다. 뻑하면 할아버지는 소리를 지르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비위 맞춰가며 살림하고 밭일 하느라 쉴 틈이 없다. 보이지 않는 저 안쪽 방에는 돌아가실 날을 기다리며 자리 보전하고 누운 시어머니가 계시고, 이야기 동무라고는 옆집 사는 서면댁 밖에 없다. 어느 날 이 집에 이혼 결심을 한 아들이 불쑥 찾아온다.

포스터
▲ 연극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포스터
ⓒ 극단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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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살아온 노부부지만 서로 다 알지 못하는 사연으로 가슴이 아리고 쌓인 화가 깊어 속이 문드러졌다. 옆집 서면댁은 하루가 멀다하고 때리는 남편을 피해 산길을 헤맨다. 아내의 뱃속에 둘째가 있는데도 헤어질 결심을 한 아들은 여윈 얼굴과 마른 가슴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오래 전 어린 첫째를 떠나보내며 가슴에 박힌 대못은 남편이 박은 것이어서 아내는 평생을 원망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남편이 고백한다. 돌아가신 어머니 모시는 자리에서 비로소 입을 연다. 아이 묻은 곳을 가리키면서. 진작 말하지 않은 그 속내야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모두를 가슴이 턱턱 막혀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가슴을 쥐어뜯는 머리 하얀 아내의 애통함이 먹먹하기만 하다.

노부부 둘만의 밥상은 늘 애틋하다...
▲ 연극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의 한 장면 노부부 둘만의 밥상은 늘 애틋하다...
ⓒ 극단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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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의 속도, 지구, 우주, 은하계를 떠올리며 계산해 보면 흙가루 한 개 정도도 되지 않는 존재,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 인연을 맺는다. '시간 속에 우리가 있는 게 아니고, 인연이 만들어 가는 게 시간'이라는 아버지의 대사처럼 어느 하나 오묘하지 않은 만남이 있으며 신기하지 않은 인연이 있으랴. 특히 부부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섭리에 이르면 더 말해 무엇하랴.

연극 속 부부들의 인연, 즉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도 인연이겠거니 하며 50년 살아온 노부부, 인연이 아닌 줄 알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가정을 이뤘으나 예전 인연이 진짜 인연인 것만 같아 괴로워하는 아들, 오래 전 당신들이 맺은 인연이 결국 자식들을 낳았고 지금 모든 인연의 씨앗이 된 편찮으신 시어머니의 부부관계, 인연이 아닌 것을 억지로 붙들어 놓고 괴롭힌 결과 결국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옆집 서면댁 부부의 인연을 두루 생각해 보니 인연이라고 다 같은 인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사꽃이 지면 송화(소나무의 꽃 혹은 꽃가루)가 날린다고 한다. 꽃진 나무의 잎이 푸른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 있어 만나는 것이고 인연이 아니니 돌아서야 한단다. 그 인연의 근원이야 각자 다 다르게 생각할 테지만, 이 봄 다시 또 피어나는 꽃을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선물로 받은 소중한 인연이겠다. 행복하고 좋은 것만 인연이 아니듯이 모든 것은 지나가고 그것을 견뎌내어야만 내 인연의 탑 또한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리라.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두근거린다...
▲ 개막을 기다리는 시간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두근거린다...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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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연극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손기호 작, 연출 / 출연 : 박용수, 우미화, 정인겸, 염혜란, 조주현, 최정화) 2012. 4. 7~15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태그:#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인연, #노인, #노년, #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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