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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교수의 책 <남자의 물건 겉 표지
 김정운 교수의 책 <남자의 물건 겉 표지
ⓒ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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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드러내놓고 말하기 힘든 표현들이 더러 있다. 남자의 '물건'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여기 남자의 '물건'을 과감히 말하는 책이 있다.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쓴 책 <남자의 물건>이다.
먼저 읽기 시작한 소로우의 <월든>과 조정래의 자전적 소설인 <황홀한 글감옥>을 잠시 미룰 정도로 이 책을 신나게 읽었다. 책을 신나게 읽을수 있다는 것은 드문 독서 체험 중 하나다.

그는 최근에 가장 '잘 팔리는' 심리학자중 한 명이다. 텔레비전에도 종종 나온다. 슈베르트처럼 파마를 한채 바흐를 좋아하며 세상 여러 가지 문제를 거침없는 입담으로 풀어낸다. 관객과 시청자들은 그의 거침없는 입담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그의 직함은 명지대학교의 교양학부 교수. 특이하게도 그의 전공인 심리학 교수가 아니다.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의 소장이라는 특이한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책은 가독성도 있었고, 짬짬이 섞어놓은 그의 잘난 척도 그다지 얄밉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 마흔 이상이 된 남자들의 우울한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그러려고 독일에서 13년이나 외롭게 유학했다는 능청스러움도 빼놓지 않았다.

이 책의 주 독자는 남자다. 그중에서도 그의 책을 서점에서 골라줄 대상은 필자와 같은 비자발적 독신주의자(?)가 아니라 자식을 한두 명쯤은 낳고, 주말이면 리모컨을 빙빙 돌려가며 소파에 누워 있을 마흔 살 이상의 유부남들이다. 그럼에도 그의 책은 아직은 30대인 나에게도 충분히 통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내 외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 해줬으니까.

지난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피곤과 무기력이 심신을 압도했다. 정신없이 바쁠 때는 힘들 겨를도 없다. 하지만 바쁜 일과를 마치고 계단을 올라 불 꺼진 현관문 앞에 서면 그때부터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사무치게 밀려온다.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면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심할 때는 일을 하다가도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 한 적도 있었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았다면 아마도 우울증 초기 진단을 받았을 듯. 지금도 심리적으로 나아진 게 없지만 따스한 봄 햇살 덕분인지 그때처럼 죽을 만큼은 아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의 인생이 재미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의 인생이 재미 없어지는 이유는 더이상 설레일 물건이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세상을 경험하지 않은 학창시절이나 20대는 모든 것들이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마흔 이상의 남자들은 이미 한번씩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설레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자신의 욕망을 대체할 물건에 집착하게 된다." (본문 중에서)

설렘도 용기가 필요하다... 남자의 물건은 결핍에 대한 반항

중년 남성의 위기를 그린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한 장면.
 중년 남성의 위기를 그린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한 장면.
ⓒ DreamWorks S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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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도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를 테면 최신형 소나타는 내게는 아주 매력적인 대상이다. 나는 지금 당장 출고된 소나타를 갖고 싶다. 그렇지만 한꺼번에 수천만 원을(비록 36개월 할부라도)지불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값을 지불할 용기가 내겐 없다. < TV 동물농장 >에 나오는 강아지들을 보면 무표정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는다. 그 순간 강아지들은 분명 나를 설레게 한다. 하지만 나는 강아지를 기르지는 않는다. 병원을 데리고 가거나 1주일에 한 번씩 목욕을 시키고, 향수를 뿌리거나 털을 빗겨줄 섬세함이나 세심함이 없기 때문이다.

DSLR 카메라와 42인치 3D TV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용기(지름신)가 좀처럼 강령하지 않는다. 바보같이. 세상 모든 수컷(?)들에게 있어야 할 용기. 내겐 그것이 결핍된 상태로 태어난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지난겨울을 그토록 힘들고 괴로워했던 까닭은 설레게 할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설렘을 위해서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지불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나를 설레게 할 뭔가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나는 지난겨울 허허벌판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벌거벗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시간에 대한 불안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도 흥미롭다. 이는 물론 그만의 독특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시간은 무한하다. 옆이나 뒤로 감이 없이 앞으로만 간다. 인간은 그 무한한 시간의 아주 짧은 순간 존재하다 사라진다. 존재의 사라짐은 필연코 불안을 동반한다. 그래서 인간은 시계와 달력을 만들었으며 수많은 종교를 탄생시켰다. 오늘 하나가 잘못되면 내일 다시 시작하면 된다. 1주일, 한 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1년. 이렇게 시간은 반복된다.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은 해보았을 '작심삼일'의 근본적 성찰이다.

따지고 보면 여성들에겐 물건이 참 많다. 옷, 핸드백, 화장품, 거울, 구두, 액세서리 등등. 그렇지만 남자의 물건은 딱 하나다. 지금 바로 당신이 상상하는 그것, 그 물건이다.

남자들이여, 정말로 쓸쓸하지 않은가.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남자도 물건 하나 정도는 있어도 되겠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은 자신만의 물건에 집착한다. 남자의 물건 집착은 결핍에 대한 반항이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써놓고 보니 이 책 어딘가에 쓰여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이 문구가 정말 맘에 든다.

대선주자 문재인의 '바둑판'

대권주자로 평가받고 있는 문재인의 물건은 '바둑판'이란다.
 대권주자로 평가받고 있는 문재인의 물건은 '바둑판'이란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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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격적으로 남자의 물건에 관해 말한다. 이름만 대면 고개를 끄덕일 남자들의 물건을 풀어놓는다. 문재인이 문제야. 저자는 "인터뷰 대상 중 문재인이 제일 재미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인터뷰를 재미있게 하려고 해도 그는 단지 "하하하" 하고 웃어 버린단다. 사람 좋은 웃음이다. 그러나 저자에겐 난처한 웃음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대선주자로서 그의 몸값을 생각하면 여기서도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는데, 딱히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그는 스스로의 우직한 진정성을 닮은, 별로 고급스럽지 않은 두꺼운 '바둑판' 위에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턱을 괸 채 바둑판을 응시하는 그에게서 이토록 수다스러운 세상을 조율할 기운을 발견한다. 그의 책 <운명>은 진지하게 읽었다. 

경계인 조영남의 '뿔테 안경'을 고집하는 이유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조영남은 '경계인'이다. 가수, 화가, 신학, 평론, 작가, 그리고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까지 '경계인'으로서 그의 줄타기는 매번 아슬아슬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면 열에 일곱 번은 채널을 돌려버린다. 한 마디로 별로다.

세상을 시끄럽게 사는(혹은 그렇게 만드는) 사람에 대한 반감이긴 하지만, 나는 '경계인'보다는 한 분야에 집중하는 '장인'이나 '명장'을 더 높이 산다. 그는 감각적 '레토릭'과 예술적 '포트폴리오'를 너무 남발한다.

반면, 저자는 그의 이런 예술적 '재능'과 '끼'를 상찬하며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지구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평화의 논리가 미혼인 내게는 꽤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는 안경에 집착한다. 그의 커다란 뿔테 안경 사랑은 나름 신체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

스케치북, 벼루, 계란받침대, 수첩, 그리고 책상

카톨릭 신부같은 국민배우 안성기의 물건은 '스케치북'이다. 독일 생활을 오래한 차범근은 아침식사를 위한 '계란 받침대'를 빼놓지 않는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 교수는 '벼루'에 집착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인 '디지로그'를 설파했던 이어령은 '책상'에 집착한다. 그에게 책상은 작은 섬이다. 외로움을 털어버리고 위안을 얻으려는 욕망의 결정체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작업대 위의 컴퓨터도 그가 집착하는 물건이다.

시인 김갑수는 '커피 그라인더'에 집착한다. 나는 이 양반을 잘 모른다. 책과 관련된 TV 프로그램에서 그를 몇번 보았고, 책을 많이 읽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이 많구나 생각했을 정도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경기도지사 김문수는 '수첩'에 집착한단다.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는 그의 지론대로라면 수첩을 향한 집착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꼬장꼬장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나도 수첩을 가지고 다니긴 하지만 집착하는 정도는 아니다.

하얀 침대 시트를 대신하는 김정운 교수의 '만년필'

저자인 김정운 교수의 물건은 만년필이다. 그는 만년필에 집착한다. 그의 첫 번째 물건은 만년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원하는 물건은 하얀 시트가 덮여 있는 침대였다. 매일 하얀 시트에 덮인 침대에서 잠자고 일어나는 것이 그의 물건이자 욕망이었다. 하지만 그의 욕망은 무서운(?) 아내 때문에 그가 일부다처제를 채택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 태어나지 않는 한 결코 이룰 수 없는 소원이다. 해서 그는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을 '몽블랑'이나 '파카'에 집착한다.

더욱이 만년필은 그에게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아들이자 아버지로서 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물건이다. 그가 아버지와의 갈등을 만년필에 투영했듯이 아들과의 갈등과 화해는 그가 아끼는 만년필인 '파바카스텔' 속으로 투영된다.

나를 설레게 하는 남자의 물건

갤럭시노트(왼쪽)와 아이폰3Gs(오른쪽).
 갤럭시노트(왼쪽)와 아이폰3Gs(오른쪽).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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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내 물건을 이야기해 보자. 지금 내가 집착하는 물건은 '스마트폰' 정도다. 한 때 집착했던 노트북은 구닥다리가 돼버린 지 오래다. 물론 지금도 집 안에선 가장 소중한 물건이다. 처음 스마트폰을 구입할 때 무척이나 고민했다. 고민 끝에 2년 약정으로 샀다. 다달이 내야 하는 할부금이 포함된 고지서를 볼 때마다 속이 쓰리다.

더구나 최근에 보도된 조삼모사식 휴대전화 보조금 마케팅 수법에 치를 떨다가 '키보드 워리어'가 될 뻔도 했다. 최신형 소나타, DSLR 카메라, 42인치 3D TV, 나를 절로 미소 짖게 하는 강아지. 세상엔 나를 설레게 하는 물건은 정말 많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위한 대가를 지불할 경제적 여유나 섬세함이 없기 때문이다. 전세금 빼고 적금 해약하면 마음먹고 지를 수 있겠지만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다.

내 평소 신념 중 하나는 '카르페 디엠'이다. 그렇지만 옥상에 올라가 아무리 '현재를 즐겨라!'고 외쳐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진중권이 부럽다. 그는 '자동차 운전면허증'이 없다. 대신 그는 '비행기 조종 면허증'이 있다. 그는 자동차 대신 경비행기를 조종한다. 그의 물건은 저 맑은 하늘 위에 떠 있다. 나를 설레게 하는 물건은 매장이나 상품 진열대에 걸쳐져 있다. 그가 부러운 이유다. 4월, 잔인한 달이 가기 전에 상품 진열대를 하나 깨부수자. 합법적으로.

덧붙이는 글 | <남자의 물건> (김정운 씀 | 21세기북스 | 2012.02 | 1만5000원)



남자의 물건 -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21세기북스(2012)


태그:#남자,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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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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