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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을에 출마한 청년당 권완수 후보와 운동원들이 3월 29일 <오마이뉴스> 총선버스에 올라 즉석 인터뷰를 마친뒤 오연호 대표와 함께 인증샷을 찍고 있다.
 서울 마포을에 출마한 청년당 권완수 후보와 운동원들이 3월 29일 <오마이뉴스> 총선버스에 올라 즉석 인터뷰를 마친뒤 오연호 대표와 함께 인증샷을 찍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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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투표 마감을 1시간 정도 앞두고, 청년당 당사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내가 당을 선택 못 했는데, 청년당은 참신해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몇 가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어요."

자신을 50대 여성이라고 밝힌 그분은 이후 10분 정도 통화하면서 질문이라기 보다는 정치권에 대한 이런저런 불신과 답답함을 호소했다. 여러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는 그에 대한 청년당의 구체적인 입장(적어도 내 생각)을 듣는 대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청년당을 찍겠다"는 답변과 함께.

기분이 묘했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 20분. 문득 이상한 기대감이 들었다. 선거 운동 기간 내내 꿈꿔왔던, 3% 득표를 해서 원내 진입에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물론 잠시 뒤, 내 기대는 착각으로 드러났다. 출구조사 결과와 이튿날 새벽 무렵까지 지켜 본 최종 득표율은 0.3%. 청년당은 법적으로 해산이 결정되었다.

우리 가슴 속 한 떨기 불꽃에서 시작한 '청년당'

청년당 출발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서부터였다. '안철수 바람'의 강력한 계기로 열게 된 청춘콘서트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고, 콘서트에 참가했던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청년당 창당은, 청춘콘서트가 끝난 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젊은이들 절실함의 발현이었다.

올해 1월 1일부터 창당 작업에 착수해, 한 달 반 정도가 지난 2월 12일에 발기인 200명을 모아 정당의 예비 단계인 창당준비위원회 등록을 마쳤다. 꽤 빠른 속도였다. 언론은 안철수 교수와의 연관성을 제기했지만 청년당 창당 작업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청년당이 일군 모든 것은 돈 한푼 받지 않고 그동안의 모든 시간과 재능을 기부한 젊은이들의 몫이었다.

이때부터 여러 가지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난관은 5000명에 달하는 당원을 모으는 일이었다.

청춘콘서트에 서포터즈로 참여한 이들은 연 3000명에 달했지만, 실제로 당을 만든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뛰어든 이들은 그 가운데 1%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있던 뜻있는 젊은이들이 합세해 50여 명의 상근자원활동가들이 당 운영의 주축을 이루었다. 모두들 당원 모집을 위해 가까운 이들에게 연락을 돌렸지만, '정당 가입'이라는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내저었다.

"부담스러워서. 취업할 때 불이익 받는 거 아냐? 아직은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

결국 우리는 거리로 나섰다. 지하철로, 대학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젊은 사람들이 직접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당을 만들고자 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선뜻 당원가입서를 작성해 주었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전국에서 50여 명의 청년당 사람들이 6000명의 당원을 모집했다. 청년당은 3월 19일, 중앙선관위에 정식 정당 등록을 마쳤다.

두 번째 난관은 돈이었다. 청년당은 비례대표 4명과 지역구 3명 모두해서 7명이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입후보를 위한 공탁금만 모두 1억 500만 원이었다. 바위를 깨는 계란이 되겠다던 손수조에게는 1억에 가까운 후원금이 들어왔지만, 우리와 같은 '진짜 날계란'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형제 간에도 돈 문제는 조심하라는 우리나라 분위기상 가까운 이들에게 돈을 부탁하는 것은 후보자들 스스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원 모집 때와 마찬가지로, 후보자들의 지인들은 오히려 선뜻 십시일반 돈을 내어주었고, 이로써 후보 등록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세상은 아직 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km를 달려 만난 사람들... "청년당? 그런 것도 있어?"



선거운동 방식을 놓고 내부적으로 다양한 논의들이 쏟아졌다. 현안들에 대해 입장을 담은 논평을 내기도 하고, 블로그와 SNS와 같은 온라인 미디어로 끊임없이 소식들을 퍼나르기도 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논의 끝에 사람들을 수도권 쪽 선거운동팀과 전국유세팀으로 나누었다. 수시로 결합할 수 있는 수도권의 자원봉사자들과 당 사람들이 중앙에 남아 선거운동을 펼쳤고, 비례대표 후보를 포함한 15명 정도의 당 사람들이 '청춘봉고유랑단'을 꾸려 온갖 짐을 실은 승합차를 타고 전국 유세에 나섰다.

대구를 시작으로 부산, 울산, 진주, 창원을 거쳐 광주, 익산, 대전을 지나 마지막으로 양평 두물머리의 4대강 공사 현장을 찍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2주에 걸쳐 2000km를 다녔다. 숙식은 아는 사람들의 가정집에서, 식당에서 빌어먹으며 해결했다. 밤늦게 돌아와 새벽에 이동하며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못했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우리가 가진 이상한 에너지와 청년들이 직접 나섰다는 사실에 응원의 메시지를 던진 사람들, 그리고 "청년당도 있어?"라고 의아해하면서도 재밌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만난 사람들 다수는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보여주었다.

'지역구 의석 0, 정당 득표율 0.3%'의 의미

정당법 44조 3항에 따르면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석을 얻지 못하고 유효투표총수의 100분의 2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면 그 정당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해산된다. 이번 총선에서 2% 득표에 실패해 해산을 앞둔 정당은 16개로, 청년당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 큰 산을 넘은 기분으로 오히려 시원하다. "그래도 좋았어"라며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이, 지난 100일에 걸친 청년당의 몸짓은 이미 역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갖고 있다. 총선이 끝나고 누구는 승리를 이야기하고 누구는 패배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거대한 세력들이 언제 자신들의 모든 정치적 기득권을 내려놓고 국민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누구의 생각이냐고? 청년인 우리 스스로의, 또 거리에서 만났던 수많은 국민들의 생각이다.

투표 종료를 앞두고 당사에 걸려온 전화는 어느 쪽도 믿을 수 없다는 민심에 대한 반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청년들 역시 오랫동안 그 뜨거운 갈증으로 몸서리를 쳐 왔다. 청년당은 청년과 국민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물을 찾아 석달간 치열하고 처절하게 우물을 팠다.

지역구 3곳 합친 유효투표총수 5569표, 정당득표 0.34%, 7만3172표. 비록 우리는 원했던 결과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무엇보다 여의도에 살고 있는 '못난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과 국민들에게 이토록 떳떳한 일이 또 있었을까.

봄이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듯 꽃봉오리가 터져 나온다. 우리 스스로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고 세상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일, 우리의 몸짓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덧붙이는 글 | 김정현 시민기자는 청년당 공동대변인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청년당은 이번 총선에 후보 7명을 냈고, 정당번호 17번을 받아 선거운동을 벌였습니다.



태그:#청년당, #청춘콘서트,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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