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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2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조선일보> 2004년 3월 12일자 사설
 <조선일보> 2004년 3월 12일자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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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절대로 대한민국의 최고 책임자가 취할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위법에 대한 사과를 통한 정치적 해결도 … 거부한다면 이것은 헌법을 준수하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직분을 근본적으로 이탈할 것이다. 이뿐 아니다. … 대통령은 이 위태로운 나라 사정에 조마조마해온 국민들에 대한 사과도 사실상 거부한 셈이다."

2012년 4월에나 어울릴 법한 이 글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던 날인 지난 2004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 사설의 일부다. 우리 모두 잘 아는 대로 노무현을 탄핵한 주된 이유는 대통령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 선거법을 위반한 혐의 때문이었다.

선거법 위반을 사과도 하지 않고 국회 표결도 거부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직분을 근본적으로 이탈했다는 것이 <조선일보>의 주장이었다. 이와 뜻을 같이 했던 당시 야당 의원들은 여당 의원들을 국회 본회의장에서 몰아내고 이날 찬성 192표(반대2표)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민간인 사찰, 최고 수준의 국가반역행위

청와대 주도의 충격적인 민간인 사찰과 증거인멸 사건을 접하면서, '과연 청와대와 이명박 대통령에게 어떤 수준의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합당할까'하는 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사례는 노무현 탄핵 사건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명박 대통령도 지방선거나 서울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때 선거에 개입하는 발언을 했었고 '내곡동 사건'처럼 논란의 여지없이 실정법을 위반한 사항도 있으니, 이번 총리실의 불법사찰까지 더해 재임 때만 따져서 '전과2범'은 넘을 듯싶다.

내곡동 사건은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기보다 "잘 챙기지 못한 점"을 사과했기 때문에 진정한 사과인지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것도 사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이번 불법사찰 건에 대해서는 명백한 피해자가 있음에도 전혀 사과가 없다.

불법사찰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김종익씨에게 처음으로 사과한 최초의 공무원은 가장 말단에서 증거인멸의 지시를 수행했던 장진수 전 주무관이었다(<오마이뉴스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이후 이털남)> 63회(3월 30일 방송분)). <조선일보>의 기준으로 보자면 "헌법을 준수하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직분을 근본적으로 이탈"한 것이고, 노무현과의 형평성을 따진다면 이미 탄핵의 요건이 갖춰진 셈이다.

그런데 이번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은 선거법 위반이나 부동산실명법 위반보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하고 심각한 사안이다. 청와대 비서실이 검찰과 국세청, 심지어 집권당 의원까지 동원해 조직적으로 범죄행위를 저질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했으며,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찰과 공모하여 수사를 축소했고, 말단 공무원의 입을 막기 위해 재판을 조율하는 등 온갖 회유를 일삼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청와대가 범죄조직으로 둔갑해서 국가기관을 무력화시키고 대한민국과 그 주권자를 공격한, 총칼을 들지 않은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고 수준의 국가반역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노무현 기준'으로 본다면 아마 탄핵을 수백 번을 해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이 몰랐다면 설명하기 힘든 이번 사건

지난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민주통합당 'MB-새누리 심판 국민위원회' 박영선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BH하명'이라고 적힌 불법사찰 문건을 가리키며 "불법 사찰은 전임 정권에서 일한 사람의 약점을 잡고 충성맹세를 시킬지, 퇴출시킬지를 활용하기 위해 2종류로 분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민주통합당 'MB-새누리 심판 국민위원회' 박영선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BH하명'이라고 적힌 불법사찰 문건을 가리키며 "불법 사찰은 전임 정권에서 일한 사람의 약점을 잡고 충성맹세를 시킬지, 퇴출시킬지를 활용하기 위해 2종류로 분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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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이번 총리실의 불법사찰에 대통령이 연관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아직은 없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민정수석실과 사회정책수석실과 검찰이 불법사찰과 증거인멸에 개입했다. 이것만으로도 대통령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보좌관이 돈을 받거나 여론조작에 가담했다는 이유만으로 야당의 정치인들은 국회의원 후보 자리를 내놓았다. 국정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책임이 이보다 가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접적인 증거도 있다. KBS의 새 노조가 공개한 사찰문건에는 "BH(Blue House, 청와대) 하명"이 선명하게 적혀 있으며, 3월 31일 일부 언론이 확보한 사찰보고서에 따르면 '복무동향 점검보고 양식'에서 "보고서를 쓸 때 단순히 발생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구체적인 해당 상황에 대한 평가와 대상자의 역할에 대해 기술. 본인이 대통령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기술하라"는 부분이 나온다(<한겨레> 3월 31일자 "대통령이라 생각하고 보고서 써라", <부산일보> 3월 31일자 "'불법사찰' 이 대통령이 직접 해명하라")

대통령이 보지도 않을 보고서를 "대통령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기술할 이유는 전혀 없다. BH, 즉 청와대는 대통령이 사는 곳이다. BH의 주인은 대통령이다. BH는 비서관이든 보좌관이든 경호원이든 그 모든 조직과 인원이 대통령을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BH 하명'은 비서관이나 비서실장이나 여타의 다른 아랫사람의 하명이 아니라 바로 '대통령 지시사항'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 메모지에 적힌 'WH(White House, 백악관)'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뿐만 아니라 증거인멸의 전말을 폭로한 장진수 전 주무관은 <이털남>에서 자신과 관련된 문제가 'VIP'에게 보고되었다고 들었다는 진술을 한 바 있다. 대통령이 증거인멸의 과정과 그 가담자들에 대한 회유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다. 실제로 청와대는 7명의 기소자들에 대한 변호사 비용을 대는 등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회유하고 재판에 개입했다. 대통령이 몰랐다고 하기에는 이 모든 사실들을 한꺼번에 설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MB정권, '나쁜정권'이란 결론 피할 수 없다

핵심 관련자들의 녹취록이 낱낱이 폭로되고 사건의 전모가 시시각각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와 관계자는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혹은 되레 호통을 치면서 적반하장의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들에게 큰소리치는 행태는 마치 범죄현장을 들킨 조직폭력배가 "뭘 봐!"하면서 대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마침 범죄행위의 단골소품인 대포폰까지 청와대가 지급하지 않았던가.

급기야 청와대는 3월 31일과 4월 1일 청와대 논평을 통해 사찰문건의 80%는 노무현 정권 때의 것이고 그때도 민간인 사찰이 있었다고 대대적인 역공을 펴기 시작했다. 언론의 사명은 권력 감시라던 이른바 조중동과, '충성심 높은' 사장님을 낙하산으로 꽂은 KBS, MBC, YTN 등 방송사들은 이번 사찰사건 내내 소극적인 보도로 일관하더니 이날을 기점으로 청와대의 입장을 대문짝 만하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종편이라는 특혜까지 업은 전통의 조중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방송사들의 경우 측근을 낙하산 사장으로 내리꽂고 불법사찰을 통해 이들의 충성심을 확인하는 한편 그에 반대하는 노조동향까지 면밀히 파악하면서 폭력적으로 '방송 장악'한 효과가 아직까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청와대의 항변은 대단히 궁색해 보인다. 우선 사찰문건을 검토한 일부 언론과 KBS 새 노조는 전 정권의 사찰은 그 주체가 대부분 경찰이며 통상적인 사찰업무의 결과라고 밝혔다(관련기사 : 오마이뉴스, 한겨레뷰스앤뉴스). 이 점은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상황실 행정관을 지낸 전재수 전 비서관의 해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전재수 비서관 해명글).

무엇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이라면 없는 죄도 만들어서 폐인으로 만드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노무현 정권의 그런 엄청난 범죄행위를 지금까지 알고도 덮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대포폰까지 동원해 검찰과 짜고 증거인멸을 하면서까지?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지난 정부의 잘못이 현 정부의 잘못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했다고 해서 전두환의 쿠데타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에 전 정부에서도 불법적인 사찰이 있었다면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이고 현 정부의 잘못은 또 그것대로 책임을 지면 될 일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만약 청와대의 논평이 사실이라면, 이명박 정권이 지난 정권의 불법행위를 알고도 이를 자신의 불법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쓰고자 무려 4년 동안이나 은폐하고 있었다는 말이니까, 그만큼 이명박 정권이 스스로의 사악함을 계속해서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이 문제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 아무리 생각해도 이명박 정권은 정말 '나쁜 정권'이라는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한 국민의 삶 완전히 짓뭉개버린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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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정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순간이다. 어떻든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정도를 걷는 모습 자체가 국민에게는 위안이고 자존심이다. 대통령은 그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8년 전의 <조선일보> 사설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 사설이 나가던 날 노무현 탄핵안은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맞는 말이다. 대통령은 정도를 걸어야 한다.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은 정도가 아니라 한 국민의 삶 자체를 완전히 짓뭉개버렸다.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은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되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될 때까지 대통령직이 두 달 정도 정지되었다. 불법사찰로 국민의 삶을 짓뭉개고 증거 인멸에 개입한 대통령의 '정도'는 과연 무엇인가. 아니, 무엇이어야 하는가.

"국가공무원으로서 첫 번째 임무라 하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불법사찰의 증거인멸을 폭로한 장진수 전 주무관이 <이털남> 63회에 나와서 한 말이다. 그러나 2012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대통령의 사명감이 (만약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면) 말단 공무원의 사명감만큼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우리에겐 너무나 과한 욕심이 돼 버렸다. 청와대를 희대의 범죄조직으로 만들어 국민을 핍박하고 국가기관을 마비시키고 헌법을 유린한 대통령에게 더 이상 대한민국을 맡길 수는 없다.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일할 수 있게 된 영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주권자인 우리 국민과 대한민국의 자존심과 품격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 즉시 불법사찰의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과하고 증거인멸을 포함한 사건의 모든 진상을 공개하라.


태그:#이명박, #불법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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