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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바로 위 약간 왼켠으로 보이는 낮은 봉우리가 수로왕이 처음 나타난 구지봉이다. 그 뒤로 이어진 산줄기의 오른쪽 봉우리가 분산 정상으로, 사진에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되는 분산산성 성곽이 일부 드러나 보인다.
▲ 수로왕릉 전경 왕릉 바로 위 약간 왼켠으로 보이는 낮은 봉우리가 수로왕이 처음 나타난 구지봉이다. 그 뒤로 이어진 산줄기의 오른쪽 봉우리가 분산 정상으로, 사진에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되는 분산산성 성곽이 일부 드러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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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따르면, 김해 지역에는 수로왕이 오기 이전까지 아직 나라가 없었다. 고대 사회이므로 나라가 없었다는 것은 곧 왕이 없었다는 뜻이다. 왕이 없으니 당연히 신하도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무렵 김해 일대는 아홉 명의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다. 인구로 본다면 '모두 100호(戶)로 7만 5000명'이 살았다.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아홉 명의 추장을 사람들은 각각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이라 불렀다. 그렇게 아홉 추장들의 이름에 모두 干(간)이 들어 있는 것은 결국 '干'이 '추장'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줄기, 등뼈, 몸, 근본 등의 뜻을 가진 干은 신라에서도 '박혁거세 거서간(干)', '눌지왕 마립간(干)' 등에 쓰였다. 물론 최고 지도자를 왕(王)이 아닌 간(干)으로 부른 것은 거서간이나 마립간이 아직 절대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립간이라는 호칭이 왕으로 바뀌는 것은 22대 임금인 지증왕 4년(303)부터이다. '(지증왕)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중략) 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 (중략)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그 증거이다. 한문은 '지증왕 4년 겨울 10월에 신하들이 아뢰기를 (중략) 新은 왕의 업적이 나날이 새롭고 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新羅를) 나라의 이름으로 하고 (중략) 신라국 왕이라는 호칭을 (쓰자는 말씀을) 올리니 왕이 이를 따랐다'는 의미이다.

구지봉 정상
 구지봉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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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首露)왕이 처음[首] 나타난[露] 곳은 구지봉

가야의 첫 임금 수로왕은 구지봉에 처음 나타났다. 삼국유사는 수로왕이 처음 출현한 날의 첫 풍경을 '(김해 일대의 아홉 명 추장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무엇을 부르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3백 명이 (구지봉에) 모여서 그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사람의 음성 같기는 했지만 (말하는 이가)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었다'고 적고 있다.

이상한 소리가 '북쪽 구지'에서 났다는 것은 구지봉이 마을(김해)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실제로도 구지봉은 가야인들이 조개를 먹고 버려서 남은 패총유적과 집터 등 생활유적인 봉황대의 북쪽에 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난다. 김해의 패총 유적은 어째서 강변이나 바닷가에 있지 않고 시내 한복판에 있을까? 가야인들은 무엇 때문에 물에서 잡은 조개를 이곳까지 멀리 가지고 와서 먹고 버렸을까? 패총에서 남해까지는 무려 40리(16km)나 되고, 민물조개를 잡을 수 있는 서낙동강도 넘어지면 코 닿을 지척이 아니라 웬만해서는 10리(4km) 이상 떨어져 있는데…….

김해평야는 본래 바다였다

하지만 이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단숨에 풀리는 궁금증이다. 1861년에 만들어진 김정호의 지도는 그 당시만 해도 지금의 김해시청 앞 일대가 논밭이 아니라 바다였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서낙동강의 물에 떠밀려온 흙으로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평야를 만든 것은 식민지 시대였다.

그러므로 수로왕이 나타났을 당시 이상한 소리를 듣고 구지봉으로 달려온 이들은 구지봉 남쪽의 바닷가 마을, 지금의 패총유적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줍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멀리 장유면 삼문리나 주촌면 내삼리의 밭에 농사를 지으러 간 이들은 자기들의 사회에 왕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도 모르는 채 부지런히 잡초를 뽑으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로왕이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지금은 평야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배가 드나들던 바닷물을 뛰어넘어, 그렇게 멀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 정상으로 들어간 입구에서 본 구지봉 정상의 모습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 정상으로 들어간 입구에서 본 구지봉 정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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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소리를 들으며 구간 등은 엎드린 채 대답한다.

"저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기이한 음성은 또 다시 들려온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입니다."

하늘의 소리는 계속되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도록 하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하면서, 뛰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하게 될 것이다."

구간 등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곧 하늘에서 자줏빛 줄이 땅으로 드리워졌다. 줄 끝에는 금으로 만든 상자가 붉은 보자기에 쌓인 채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달려가  금상자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해처럼 둥근 황금알이 여섯 개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면서 함께 백번 절을 하고는 바로 그것들을 아도간의 집으로 옮겼다.

12시간 뒤인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아도간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의논 끝에 사람들은 금상자를 열어보았다. 이게 무슨 하늘의 조화인가. 여섯 개의 알들은 눈부신 용모를 뽐내는 어린아이들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평상 위에 앉힌 채 절을 올렸다.

10여 일이 지나자 아이들은 키가 9척으로 자라나 은나라 탕왕에 버금가는 풍채가 되었고, 얼굴은 용을 닮아 한나라 고조처럼 느껴졌다. 또 팔자 모양의 눈썹은 빛이 나는 듯하여 당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겹으로 된 눈동자는 우나라의 순임금과 마찬가지였다.

구지봉 아래에 세워져 있는 '영대왕가비'
 구지봉 아래에 세워져 있는 '영대왕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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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섯 아이 중 맨 먼저[首] 알에서 사람으로 변하여 나타난[露] 아이를 수로(首露)라 불렀다. 수로는 태어난 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나라의 이름은 대가락 또는 가야국으로 정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여섯 가야국이 탄생했다.

수로왕은 임시 대궐을 세워 거기서 살았다. 그는 매우 소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쌓은 계단도 겨우 3척에 불과하게 했다. 새 궁궐은 그 이듬해에야 지었는데, 그 때에도 모든 공사는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했다.

하늘에서 왔지만 아주 소박했던 수로왕

삼국유사는 수로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한다. 당시 아도간 등이 살던 마을의 본래 주민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실제로 하늘에서 툭 떨어졌을 리는 없는 일이니, 천강(天降)은 수로가 외지(外地)에서 온 강자(强者)를 뜻하는 이동 경로로 보면 되겠다.

수로가 처음 온 구지봉(龜旨峰)의 본래 이름은 구수봉(龜首峰)이었다. 현재 수로왕비릉이 있는 곳이 거북[龜]의 몸체 같고, 서쪽으로 뻗어나간 봉우리쪽이 거북의 머리[首]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풍수지리설을 믿는 일제가 땅의 기운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목 부분을 끊어 도로를 내는 바람에 지형(地形)이 변해버렸다.

물론 지금은 거북의 목 부분에 사람이나 산짐승이 다닐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식민지 때만큼 흉측한 모습은 아니다. 그 덕분에, 구지봉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다리를 건너게 된다. 주차장이 수로왕비릉 정문 앞에 있어서 자연스레 그리로 들어가게 되고, 먼저 파사탑(婆娑塔), 이어 수로왕비릉을 보고 나면 왼쪽으로 걸어 다리를 넘어 구지봉으로 간다.

구지봉에서 돌아보는 수로왕비릉 묘역 전경. 오른쪽의 비각 안에 파사탑이 들어 있다.
 구지봉에서 돌아보는 수로왕비릉 묘역 전경. 오른쪽의 비각 안에 파사탑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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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2년 2월 중순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구지봉, #수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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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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