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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의태 약수터 전경
 류의태 약수터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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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은 나라를 잃은 뒤 왕산에 들어와 5년 동안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구형왕의 입산은 보통 쓰이는 'OO산에 들어와 살았다'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보통은 절에서 살았다거나, 산속 마을에서 거주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구형왕은 '집도 절도 없는' 거의 산꼭대기에서 살았다.

그는 왕산에 살면서 물은 어떻게 마셨을까. 산에서 1km가량 떨어진 덕양전이 아니라 주차장 바로 아래의 왕림사를 평지로 치더라도 왕이 머물렀다는 수정궁까지는 한 시간 이상 올라야 하고, 그것도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 산길인데, 날마다 신하들에게 물지게를 지고 오르락내리락 하도록 시켰을까.

류의태보다 먼저 '류의태 약수터'를 발견한 구형왕

왕은 자신이 죽은 뒤 보통의 왕릉과 같은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나라를 잃은 왕에게 봉토를 한 묘가 어울릴 법하냐면서, 그냥 자신의 주검 위에 돌을 쌓아 무덤을 대신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래서 남은 것이 지금의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이다.

생각해본다. 왕이 비록 돌무덤을 만들라고 했지만 그의 세 왕자는 뒷날 신라 최고위 벼슬인 각간을 지낸 무력(武力, 김유신의 할아버지) 등이다. 왕자들이 그렇게는 할 수 없다면서 제법 왕릉답게 무덤을 만들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신하들 역시 그렇다.

그뿐이 아니다. 신라 법흥왕의 입장에서도 구형왕의 무덤을 돌무더기로 남겨두어서는 좋을 것이 없다. 그렇게 '푸대접'을 했다가는 금관가야의 남은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망국 금관가야가 남긴 인적 유산인 가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이 지닌 역량을 자국의 힘으로 활용해야 신라가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인가.

구형왕릉에서 1.4km를 걸어오르면 류의태약수터가 0.2km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구형왕릉에서 1.4km를 걸어오르면 류의태약수터가 0.2km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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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면, 구형왕은 아들들, 신하들, 그리고 신라왕 들에게서 두루 명망을 얻고 있었을 법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체면과 이익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왕의 유언을 고이 지켜주었다. 이는 구형왕에 대한 충성심과 배려심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상대도 되지 않는데도 무리하게 전쟁을 계속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왕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삼국사기>의 표현은 경순왕의 생각이지만, 그의 돌무덤 유언이 존중된 것을 보면 끝까지 싸우지 않고 스스로 나라의 문을 닫은 구형왕의 결정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평소에도 분명한 왕이었기 때문에 아들, 신하, 그리고 가야의 유민들이 그의 유언을 고스란히 지켜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말이다.

구형왕이 수정궁을 산 중턱 높은 곳에 지은 까닭

그런 추측을 바탕으로, 거의 왕산 정상부 턱밑에 수정궁을 짓고 산 말년의 구형왕이 하인들에게 저 산 아래까지 가서 식수를 길러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아니, 왕은 처음부터 수정궁 바로옆에 대단한 약수가 펑펑 솟아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자리에 집을 지었을 것 같다. 흔히 보는 약수터들은 대부분 물이 졸졸 흐르는 수준인데, 수정궁 옆 약수터는 바가지로 퍼붓듯이 생수가 펑펑 쏟아진다. 그만 하면 수정궁의 식수는 물론이고 다른 문제들도 모두 해결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수량이 되고도 남는다는 판단을 왕은 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그냥 물이 아니라 최고의 약수임에야!

구형왕릉에서 30분가량 숲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류의태 약수터'에 닿는다. 물론 '김유신 사대비(射臺碑)'를 지나면서 바로 나타나는 왼쪽 임도(林道)로 올라도 약수터에 닿는다. 산길과 임도는 중간쯤에서 만나고, 임도는 산 위쪽으로 계속 되지만 수정궁터와 약수터로 가는 화살표가 길가에 세워져 있으므로 찾지 못해 헤맬 일은 없다.

류의태가 누구인가부터 살펴보아야겠다. 그냥 약수터가 아니라 '류의태 약수터'라 하는 것을 보면 여기서는 류의태라고 하는 사람이 매우 중요하다. '류의태 약수터'에 대한 안내판이 구형왕릉 입구에도 있고 약수터 바로앞에도 있으므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약수터 앞의 안내판
 약수터 앞의 안내판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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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의성(醫聖) 류의태는 신의(神醫)

'류의태 선생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옛지명: 山陰縣 丁台)마을에서 출생하여 당대 제일의 하늘이 내린 신의(神醫)로 칭송받았다.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의성(醫聖)으로 칭송받는 허준의 의학적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며, 특히 의술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제공하여 해부학의 효시를 이룬 살신성인의 위대한 의학자로 전해진다.'

안내판은 조선 명종(1545∼1567 재위) 때의 명의인 류의태가 산청 사람이며,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감동적인 것은 제자 허준에게 자신의 주검을 해부하여 의학적 지식을 생생하게 습득하도록 했다는 대목이다. 허준을 '의성'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그를 왜 '신의'라 우러르는지 납득이 된다. 물론 뛰어난 의술이 그에게 그처럼 영광스러운  칭호를 안겨주었겠지만, 사람이 스스로 엄두를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할 '시신 기부'를 통해 의학 발전을 염원했으니 어찌 그를 신(神)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상찬하지 않을 것인가. 

안내판의 난삽한 문장을 매끄럽게 고쳐가며 약수터에 얽힌 이야기를 읽어본다. 작은따옴표 안의 내용은 안내판의 원문이거나 약간 가다듬은 것이고, 밖의 것은 읽기 좋도록 하기 위해 새로 쓴 글이다.

'류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난치병'에 걸렸다. 그는 '천년 묵은 사람의 해골에 담긴 물'을 말하는 '千蚓水(천인수)'를 마시고 자신의 병을 완치시켰다. 이 설화는 사람의 몸에 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역설하는 내용이다.

이 사진을 보면, 류의태 약수터가 얼마나 세차게 물을 뿜어내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진을 보면, 류의태 약수터가 얼마나 세차게 물을 뿜어내는지 알 수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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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류의태가 물의 종류에 대해 언급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물에는 서른세 가지가 있는데 약효가 모두 다르므로 약의 효용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는 물을 가려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물 중에는 이른 새벽에 처음 길은 우물물인 정화수(井華水)가 최고이고, 그 다음으로는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한천수(寒天水)'라면서, 그런 물을 오랫동안 마시면 '반위(反胃: 胃癌위암)을 다스린다'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왕산의 약수가 한천수에 해당된다'고 했다.

과연 왕산 류의태 약수터의 물은 '눈이 내린 한겨울에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이 참으로 좋다.' 그는 이 물을 길어 한약을 제조했다. ' 류의태 선생 활동시 한약 제조에 사용되었던 샘터(일명 약물통)의 약수는 돌너덜이 아래 자리잡은 서출동류슈(西出東流水)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고 있다.'

서출동류수란 서쪽에서 솟아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지형이 대체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이기 때문에 샘물의 길도 대부분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 있다고 한다. 즉, 서출동류수는 그 자체로 희귀하기도 하고 사람의 몸에 좋기도 하다는 것이다. 류의태 약수터의 한천수도 물론 서출동류수이다.

류의태의 놀라운 의술을 말해주는 전설 하나

예로부터 나라를 건국한 왕이나 기타 대단한 인물에게는 으레 신화나 전설이 따른다. 신의라 존경받던 류의태이니 그에게도 남다른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산청군 홈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는 '류의태 전설'의 내용을 논리에 맞게 첨삭하고, 또 문장을 매끄럽게 하면서 읽어본다.

한양 사는 김판서, 언제나 떵떵거렸다. 그에게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의 이름은 별당.

그런데 딸이 18세 되던 해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처녀인 딸의 배가 산등성이처럼 불러졌던 것이다. 별당은 울며불며 결백을 주장했으나 식구들은 창피하다고만 할 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시대에 처녀가 임신을 했으니, 게다가 일반 백성의 딸도 아니고 판서의 여식이 그랬으니 집안꼴이 거덜날 판이었다.

혹시 소문이 번질까 싶어 전전긍긍하던 김판서는 '그래!'하면서 류의태를 찾았다. 류의태 정도의 명의라면 능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 그런데 진맥을 마친 류의태는 너무나도 절망적인 결론을 내렸다.

"별당 아씨의 배부른 증세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병으로, 기적이 일어나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판서의 부인이 류의태에게 매달렸다. 어떻게든 딸을 구하고 싶은 모성은 '기적'이란 말에 실날 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류의태의 대답은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할 뿐이었다.

"별당 아씨를 사흘 내에 천리 밖으로 데리고 가면 행여 무슨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류의태가 떠난 후 김판서는 사랑채로 내려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그래도 별당의 어머니는 두 오빠와 의논을 했다. 별당이 임신을 했다고 소문이 나면 집안꼴이 뭐가 되겠느냐. 류의태의 말처럼 별당을 천리 밖에 내다버리자. 혹시 아느냐. 류의태의 말처럼 기적이라도 일어날는지…….

야심한 시각, 김판서 집에서는 횃불도 밝히지 않은 채 은밀히 몇 사람이 나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람들 속에는 가마도 두 채 있었다. 김판서의 부인과 별당도 같이 떠난 모양이었다.

집을 떠난 지 사흘째, 일행은 천리 밖까지 왔다. 이제 그들은 오늘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내일 별당을 버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별당의 배는 배 위에 바가지 하나 더 엎어놓은 것처럼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문득, 하인들의 방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하인들은 갓 죽은 노루를 주워와 삶고 있었다. 냄새를 맡은 별당은 작은 오라버니에게 자기도 한 그릇 먹고 싶다고 청했다. 별당의 말을 들은 어머니와 큰 오라버니가 눈짓을 했다. 한 그릇 가져다주라는 신호였다. 내일이면 버리고 갈 아이인데 그만한 소원도 못 들어줄까.

다만 그들은 평소 육식을 하지 않던 별당이 노루고깃국을 청하니 그것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러나 고깃국 한 그릇을 훌쩍 마신 별당은 한 그릇 더 갖다달라고 했다. 이윽고 포식을 한 별당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꼭두새벽, 별당이 자는 방에서 계속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더니 어머니를 찾았다. 김판서 부인은 딸을 버린다는 생각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으므로, 딸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얼른 그 방으로 달려갔다. 아니, 이럴 수가!
김판서의 부인은 방안에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자칫 기절을 할 뻔했다. 별당의 배는 푹 꺼져 있었고, 아랫목에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별당의 배가 이유 없이 부풀었던 까닭이 밝혀졌다. 어느 날인가, 별당이 연당 앞 노송 아래에서 소피를 보았다. 그때 벌레가 뱃속으로 따라 들어가 알을 깠고, 그것이 희한한 병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아무튼 별당의 배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얼굴에 화색이 번져오자 어머니와 오빠들은 너무나도 기뻐하면서 집으로 내달렸다. 자초지종을 들은 김판서는 완쾌된 딸을 보면서 한없이 기뻤지만,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치료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아내와 자식들을 천리 밖까지 고생시킨 류의태의 소행이 괘심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김판서는 딸의 완쾌 사실을 극비에 붙인 채 급히 류의태를 불렀다. 김판서의 위세라면 류의태 목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는 어찌 병명을 숨기고 내 식구들을 멀리까지 가서 애꿎게 고생을 하도록 했느냐? 양반을 속인 죄 죽어 마땅하리라!"

김판서가 호통을 폈다. 그러나 류의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렇게 말했다.

"별당아씨의 병은 천리 밖에서 죽은 노루고기를 사흘 이내에 실컷 먹어야 완쾌가 되는 병이온데, 소인이 여기서 어찌 그것을 구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또 제가 가서 설혹 구해 온다 해도 천리 먼길을 오가는 동안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되니 별당 아씨가 어찌 이 세상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소인이 자신 없다고 한 것은 하늘이 정해 놓은 일을 한갓 의원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김판서는 놀라서 딱 입이 벌어지는가 하면, 무안해서 얼굴도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왕산에서 바라본 덕양전(들판의 중앙에 숲이 우거진 속) 방향 풍경
 왕산에서 바라본 덕양전(들판의 중앙에 숲이 우거진 속) 방향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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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에는 작은 바가지들이 여럿 놓여 있다. 이곳까지 올라온 이들이 약수를 쉽게 마실 수 있도록 하려고 누군가가 배려를 한 결과이다. 구형왕릉에서 여기까지 허위허위 숨가쁘게 올라온 나는 그 바가지로 약수를 담아 마신다. 안내판의 설명처럼 '맛이 참으로 좋다.' 한겨울인데도 물은 전혀 차갑지 않아 단숨에 들이키기에 아주 알맞다.

약수를 연거푸 두 바가지 들이킨 나는 마치 별당아씨처럼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낀다. 이제는 평상같이 널찍한 돌 위에 편안히 앉아서 쉰다. 마음껏 약수를 마셨으니 타던 목도 이제는 더없이 시원해졌지만, 코앞의 맑은 공기와 눈앞의 푸른 하늘 덕분에 온몸이 다 날아갈 것만 같다.

그때 문득, 약수터에 바가지를 가져다놓은 이가 바로 현대 사회의 류의태 선생이라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게는' 류의태 선생이 될 수 있다. 누구든지 세상에 좋은 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므로.


태그:#구형왕, #류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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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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